이 남자, 네 가지로 모든 걸 해결했다
[역사 파고들기④] '조선 천재' 박규수의 특별한 학습법
▲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들이 전시되고 있는 남산한옥마을. 서울시 중구 필동 소재. ⓒ 김종성
조선시대 사대부처럼 자녀 교육에 극성을 부린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아마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듯하다. 요즘, 상급 과정을 미리 배우는 선행학습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선행학습도 사대부 가문에서는 비일비재했다.
대부분 사대부는 자녀가 다섯 살도 되기 전에 시 쓰기를 가르쳤다. 과거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인 시 쓰기에 조기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아주 일찍부터 '선행학습'을 시킨 셈이다.
그러니, 사대부 학부모가 사교육에 큰돈을 투자하는 건 당연했다. 어린 자녀를 위해 가정교사를 들이는 집안이 많았으니, 오늘날의 학부모보다 돈을 더 쓰면 더 썼지 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성공 거둔 집안... 하지만 그의 집안은 가난했다
그런데 이런 풍토 속에서, 사교육비를 거의 들이지 않고 사회적 성공을 거둔 인물이 있다. "타고나면서부터 천재였겠지"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실상을 살펴보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갈 듯하다.
그 주인공은 구한말의 선각자인 환재 박규수(1807~1876년)다.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동서양이 충돌하는 당시의 혼란기 속에서 조선의 앞날을 제시한 대표적 미래학자였다. 또 젊은 지식인과 관료의 스승이자 우상이기도 했다. 김옥균·김윤식처럼 당시를 풍미했던 인물의 상당수가 그의 문하생이었다.
박규수는 정치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도승지(대통령비서실장), 한성부판윤(서울시장), 공조·예조판서, 평양감사, 우의정 등의 경력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 박규수 초상화. 사진 출처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 삼화출판사
그래서 박규수는 남들처럼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을 수 없었다. 아버지나 집안 어른의 가르침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액 사교육은 박규수한테는 별세계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박규수는 어린 나이에 학문적으로 유명해졌다. 이조판서를 지낸 조종영이 망년지교(忘年之交) 즉 '나이를 초월한 친구'를 맺자며, 열네 살짜리 박규수에게 다가갈 정도였다. 개혁 성향의 효명세자(순조의 아들)도 자신을 도와달라며, 열아홉 살짜리 박규수에게 다가설 정도였다.
"그 정도면 타고난 천재였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런 단정은 성급하다. 물론, 박지원의 손자였으니까 어느 정도는 타고난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치열한 노력과 남다른 학습법 덕분이었다. 그의 학습법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타고난 천재 박규수... 독특한 학습법 4가지
첫 번째는 '두루두루 학습법'이다. 이른바 '학제적(學際的) 학습법'이었다. 가업인 유학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다. 유학은 기본이고, 천문학·금석학·고고학·의상학·연금술·식물학·약학까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박규수는 미술 공부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던 것이다. 문인이 그림까지 잘 그릴 경우, 사람에 따라서는 한 폭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한 편의 글을 쓸 수도 있다.
박규수는 승려들을 만나 불교에 관한 지식도 습득했다. 나쁘게 말하면 '문어발식 학습'이지만, 이런 다양한 학습은 그를 박학다식하게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통합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두 번째는 '신·구 지식의 통합'이다. 이것은 박규수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일반적인 학습법이었다. 새로 습득한 지식을 기존 지식과 접목시킴으로써 이해 및 기억의 효율성을 돕는 방법이다. 이것을 위한 도구 중 하나는 시 쓰기였다. 새로 습득한 지식을 시로 정리해 내면화하고 동시에 기존 지식과 융합될 수 있도록 했다.
일례로, 박규수는 열여섯 살 때 한양 도봉산 정상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시 한 수를 읊었다. 10대 시절에 남긴 시집인 <금유시집>에 나오는 작품이다. 다음은 시 일부다.
"세 개의 커다란 알약이 허공에 떠 있다.
하나(A)는 스스로 빛나서 밝구나.
하나(B)는 덕성이 고요하여
그저 생명을 자라게 할 뿐이구나.
하나(C)는 컴컴하기가 거울과 같아서
빛을 빌려 비추어주네."
태양(A)·지구(B)·달(C)에 대한 천문학적 통찰을 시로써 정리한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과학탐구 영역'을 공부한 학생이 새로운 지식을 시로 정리하는 것과 유사하다. 시 쓰기를 통해 복습한 셈이다. 또 다른 시집인 <장암시집>에는 지구과학 지식을 정리한 시도 보인다. 이 시에서는 "아아! 큰 안목으로 볼 때, 지구를 만져보면 호두 속살 같을 거야"라고 했다.
이처럼 박규수는 배운 내용을 음미하고 시로 정리하곤 했다. 이렇게 공부했기 때문에, 새로 습득한 지식이 기존 지식과 잘 '접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 박규수가 1871년에 청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의 등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또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에게 시를 지어주고 친분을 쌓은 뒤, 그들이 귀국하면 찾아가서 여행 소감을 듣곤 했다. 물론 그도 두 차례에 걸쳐 직접 중국을 여행한 적이 있다.
네 번째는 '사려 깊은 멘토의 도움'이다. 박규수가 가정교사를 들이지 못하고 집안 어른들한테 학문을 배웠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했다. 어른들은 그의 '문어발식 학습'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그런 특성을 활용해서 그를 지도하는 섬세함을 발휘했다.
일곱 살때였다. 하루는 박규수가 외가에 놀러 갔다. 그는 땅바닥에 석탑을 그리며 놀았다. 그런 모습을 외종조(외할아버지의 형제)인 류화가 지켜봤다.
류화는 "선비가 될 사람이 그림은 왜 그리느냐? 하필이면 왜 불교 석탑이냐?"라는 식으로 면박을 주지 않았다. 박규수의 문집인 <환재총서>에 수록된 글에 따르면, 박규수는 외종조로부터 다음과 같은 시를 받았다.
"네가 석탑을 그릴 때
한 층 한 층 높아지듯이
성자가 되는 일도 평범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네게 가르치나니 독서법은 이것이다."
석탑을 쌓듯이 단계적으로 학문을 이루라는 충고였다. 일곱 살짜리 외손자가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일부러 시까지 써준 것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외손자의 특성을 활용해서 학문의 길을 가르치고자 했던 셈이다. 이런 어른이 있었기에, 박규수가 학문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박규수는 학제적 접근법을 통해 통합적인 안목을 얻었고, 시 쓰기를 통해 신·구 지식을 융합했다. 또 새로운 것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으며, 사려 깊은 멘토의 도움을 받으며 학문을 연마했다.
이런 학습법이 밑바탕에 있었기에 박규수가 당대 제일의 지식인이 될 수 있었다. 집안이 가난해서 고액 사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자기만의 고급 학습법을 통해 박규수는 가장 성공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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