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그 제자에게 저의 큰 잘못을 깊이 사죄합니다

22기 졸업생 모교방문에 부치는 글

등록|2012.06.03 11:48 수정|2012.06.08 09:33
[기사 보강 : 5일 오후 3시 50분] 

안녕하세요? 박도입니다. 2012년 6월 9일은 대단히 좋은 날인가 봅니다. 올 연초 일본에 있는 한 문인단체에서 시집 발간 50호 기념일을 이 날로 정하였다고 저에게 참석을 부탁해 와 무심결에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초, 장원호 졸업생이 이 날이 자기들 기수 졸업 30주년 모교 방문일이라고 초청하여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선약을 어길 수 없어 여러분의 귀한 모임에 참석치 못하게 되었음을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고1 때는 1학년 3반 담임으로, 고2 때는 2학년 2반 담임으로, 그리고 국어 담당 교사로 일주일에 4~5시간 씩 가장 많이 만났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러분의 얼굴과 이름이 눈에 선합니다. 아직도 여러분 240명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기억할 것 같습니다.

저는 2004년 2월, 정년을 꼭 5년 남기고 더 이상 밥값을 못할 것 같아 조기 퇴직한 뒤 곧장 강원도 안흥 산골 마을로 내려와 얼치기 농사꾼으로 지내다가 2010년 11월부터 원주로 이사하여 평생 처음으로 아파트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28년 근무했던 이대부고(현, 이대부중) ⓒ 박도


제자 덕분 제주에 가다

"청춘은 희망에 살고 백발은 추억에 산다"고 하였는데, 이곳 강원도로 내려온 뒤 더욱 지난 추억을 되새기며, 즐겁고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생각하면 늘 감사한 마음과 때로는 지난날 나의 잘못한 언행이 새록새록 되살아나 매우 부끄럽기도 합니다.

▲ 박현선 가족과 제주에서(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현진 제주대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맨 오른쪽) ⓒ 박도


좀 창피한 얘기지만 저는 대학 재학시절 과에서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가는데 돈이 없어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 신혼여행 때도 그 무렵 가장 인기였던 그곳을 가 보지 못하다가 여러분 동기 박현선 님이 제주도에 살면서 우리 가족을 초청하여 1992년 이른 봄날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이 부분도 좀 창피) 3박 4일 제주여행을 매우 즐겁게 다녀왔습니다.

그때 바라본 제주도의 아름다움이 지금도 제 머릿속에 남아 있고, 그동안 제 작품 속에도 여러 번 제주 풍물을 그렸습니다. "아내가 귀여우면 처가집 말뚝 보고 절한다"는 속담처럼 박현선 님의 부군 제주대 서현진 교수님은 저에게 해마다 연하 인사와 때때로 문안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나중에야 서 교수님이 신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 듣고 매우 가슴 아팠습니다. 지금도 다정다감한 그분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마음이 아립니다. 다행히 박현선 님이 남편을 잃은 아픔을 털고 뒤늦게 다시 공부하여 지금은 미국의 큰 병원에서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에 감사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1999년 여러분 동기 이종원 님의 아버님(이영기 변호사) 주선으로 중국 대륙의 항일유적지를 다녀온 게 제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뒤 근현대사 연구와 항일유적지 답사로 국내외 여러 곳을 답사한 뒤 여러 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1990년대 어느 날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여러분의 동기 신민철 님이 뉴욕에 있는 자기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내 교무수첩에 적어주면서 "선생님, 미국에 오시면 꼭 찾아주세요. 그러면 제가 뉴욕을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라고 초대하였습니다.  저는 "고맙네"라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런데 "화장실이 어디입니까?"라는 말도 영어로 할 줄 모르는 꾀죄죄한 골동품 훈장이 2004년 2월에 천만 뜻밖에도 40여 일간 미국에 가게 되어 허드슨 강 언덕에 그림 같은 그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더군요.

신민철 님 내외는 고국에서 온 와룡 선생을 위하여 대서양에서 나는 온갖 진귀한 해산물을 상다리가 휠 정도로 차려놓고 대접했습니다. 그때 저를 안내하던 재미동포(박유종 선생)가 "도대체 선생님은 학생을 어떻게 가르쳐 이런 대접을 받습니까?"라는 찬사를 입이 닳도록 받았고, 그분과는 지금도 교류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날 밤 여러분 동기 김창현 님의 안내로 뉴욕 맨해튼의 야경을 구경한 뒤 신민철 님이 잡아준 호텔에서 잠을 자는데 하필이면 새벽녘에 불이 나 비상 탈출하여 호텔 주차장에서 오들오들 떨었습니다. 그 덕분으로 이튿날 아침밥은 호텔 측에서 무료로 제공하여 여비를 절약하였고, 숙박비도 일부 환불을 받았습니다.

▲ 뉴욕에서 만난 옛 제자와 가족들과 즐거운 한때(오른쪽부터 김창현, 신민철, 필자, 그리고 신민철 부인 이지수 씨와 자녀들) ⓒ 박도


나의 큰 잘못

귀국 후 아내로부터 미국에서 바쁘게 사는 제자들을 괴롭혔다고 무척 호되게 야단을 맞은 뒤 2007년에는 조용히 미국에 갔으나 메릴랜드 주 락빌에 사는 이미진 님이 어떻게 알고서 굳이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마침 안내해 주시던 분과 같은 마을이라 찾아갔습니다.

▲ 제자 이미진 가족, 부군은 한국 출장 중으로 담지 못하였음 ⓒ 박도


그는 고국에서 공수해온 온갖 나물반찬과 심지어 복분자 술까지 차려놓고 친정아버지를 만나듯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미국에 있는 여러 제자들이 만든 예쁜 두툼한 카드까지 받았습니다. 제 살아생전에 그 빚을 다 갚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나에게 더욱 열심히 글을 쓰라는 격려로 알고 남은 날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꼭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지난 잘못을 여러분에게 깊이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이 고1 때인 1979년 어느 봄날 우리 반(1-3)은 교련시간이고, 옆 반(1-2)은 기술 가정 시간으로 교실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반 남학생들 가운데 미처 각반을 준비 못한 두 학생이 교련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지 않으려고 옆 반에 빌리러 갔으나 교실 문이 담겨 있자 복도 쪽 윗 창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가 사물함에서 각반을 가져 나온 모양인가 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시간이 끝난 뒤 교실로 돌아온 옆 반 여학생들의 책가방이 다 털리는 불상사가 발생하여 울부짖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 일을 조사 하던 가운데 우리 반 두 학생이 열쇠로 잠긴 옆 반 교실 윗 창문을 넘어 들어간 사실이 밝혀져 저는 그때 그 두 학생에게 "왜 문이 잠긴 남의 반에 창 넘어 들어갔느냐"고 두들겨 팼습니다.

그 몇 해 후 꼬리를 물던 교내 도난사고의 주범이 잡혔습니다. 주범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괴로웠습니다. 물론 저는 그때 그 학생들에게 문이 담긴 남의 반에 창 넘은 것을 탓하며 두들겨 팼지만 그때 그 학생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괴로웠겠습니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그때 저에게 매를 맞은 이아무개 제자는 1990년대 말 무렵 어느 목욕탕에서 하필이면 피차 벌거벗은 채로 만났습니다. 그때 제가 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지난 일을 정중히 사과하자 그는 "선생님, 저는 벌써 다 잊었는데요"하고서는 음료수 한 병을 사서 건네고는 온탕으로 들어가고 저는 목욕탕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제자 배아무개에게는 전화로만 사과했을 뿐, 아직 직접 만나 사과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에게 깊이 사죄합니다. 혹 오늘 그가 참석치 못하였다면 여러 분들이 꼭 전달해 주시고, 누구든 한번 별도로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1981년 설악산 수학여행 중, 비룡폭포에서 이대부고 2-2반 일동 ⓒ 박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

때때로 사진첩을 들추면서 여러분과의 추억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립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재직시절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르면 무척 마음이 아프고 교단에 선 게 매우 부끄럽습니다. 

오늘 제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역시 저는 훈장티를 벗어날 수 없기에 여러분에게 두 가지만 당부합니다.

첫 번째는 여러분도 이제 50에 접어든다고 하니 이제부터 노후 대비를 잘 하십시오. 늘그막에 비참하게 된 사람은 대부분 맨홀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 맨홀에 빠지는 대부분 사람들은 평소 불로소득이나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맨홀에 빠지면 헤쳐 나오기 힘듭니다. 낚시에 걸린 물고기는 먹이를 쉽게 구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둘째는 여러분 가정을 잘 지키십시오. 최근 우리 사회에 늘그막에 가정이 깨어진 집이 많은데, 이는 가족 간 소통부족과 가부장적인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왕이 되고 싶으면 여러분 부인을 여왕으로 모시고, 여러분이 여왕이 되고 싶으면 남편을 왕으로 모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부부는 해로하게 되고 가정은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여러분 가정의 화목을 빌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보탭니다. 죽으면 썩을 몸, 여러분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사십시오. 그러면 다시 만날 때 더 반갑습니다.

22기 졸업생 여러분, 사랑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안녕!!!
2012년 6월 옛 훈장 박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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