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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목표는 '식민지'가 아닌 '일본화'였다"

군산대 구희진 교수가 보는 '일제강점기 군산의 도시구성과 삶'

등록|2012.06.04 11:04 수정|2012.06.04 11:04

▲ 일제강점기 군산의 도시구성과 삶에 대해 설명하는 군산대 구희진 교수 ⓒ 조종안


지난 5월 29일, 군산시립도서관 5층 교양문화실에서 열린 '군산학'(群山學·군산을 제대로 이해하기) 네번째 강좌에서 군산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구희진 교수는 "일제 침략의 목표는 조선 식민지화가 아닌 일본화였다"고 주장했다.

구 교수는 "일제의 조선 일본화 계략은 '황민화 정책'을 통해 주로 얘기되지만, 군산에서는 더 나아가 일본인이 이주해서 영구 정착하는 그야말로 '植民(식민)' 정책이 실행되었다"며 "군산·옥구 지역의 간척공사와 농장 지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고 부연했다.

구 교수 설명에 의하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불법 고리대금을 통해 토지를 수탈하거나, 비옥한 농지를 일본의 1/10밖에 안 되는 헐값에 사들여 소유지를 넓혀갔다. 또한, 기업형 대규모 농장들은 이윤의 극대화를 꾀하기 위해 대부분 철도 인근에 설립한다.

▲ 바둑판처럼 정리된 불이농촌 들녘. 당북초등학교 부근 항공사진 ⓒ 구희진


일본인 농장주들은 수리조합을 통해 저수지와 수시시설을 정비하고, 농지를 바둑판처럼 정리하여 물의 효율적 공급과 농업경영의 편리성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소작농들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경작권을 상실하게 되며 지주 중심의 농업경영이 이루어지게 된다.

농장은 농사개량이라는 명목으로 파종, 이앙 등 소작농민들의 모든 노동과정을 지배하면서 생산량을 극대화 시켰다. 이를 위해 농장은 공장과 같은 구조를 갖추게 되는데 농장주-지배인-주임-소작농민의 체계가 대표적인 사례로 내려온다.

구 교수는 "일본인 농장주들은 식민권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생산력 증진과 조선 농민의 노동력을 극도로 수탈하는 공장시스템으로 이익을 극대화했다"며 "그러나 쌀이 증산될수록 소작료가 증대되어 조선 농민의 궁핍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강조했다.

조선인 피땀으로 일군 농지, 주인은 일본인 이주자들

▲ 불이농촌 용수로공사(1920년대). ‘노동력 착취’ 현장이 바른 표현일 것 같았다. ⓒ 군산시


비옥한 농지와 서해안 갯벌을 끼고 있는 군산은 1899년 개항과 함께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온다. 그중 1904년 조선에 들어와 1919년 옥구(군산)에 농장을 설립하고, 1920년부터 3년에 걸쳐 간척사업(총 2천5백ha)과 저수지(3백ha) 사업을 벌인 '불이흥업 주식회사'의 '후지이'(藤井)는 조선 농민 착취의 상징 인물.
 
후지이는 공사가 끝나면 간척농지에 대한 영구 소작권 보장과 소작료 3년 면제, 공사임금 지급 등의 사탕발림 식 광고를 내고 3천 명 이상의 농민을 모집한다. 그러나 노임 착취는 물론 완공 후에는 군산에서 멀리 떨어진 '옥구농장' 농지를 가구당 다섯 마지기씩 소작을 준다. 지금의 어은리 4호 촌, 7호 촌, 옥봉리 9호 촌 등은 공사 당시 편의에 따라 붙여진 이름.

▲ 총독부가 불이농촌 일본인 이주자들에게 무상으로 지어준 기와집 ⓒ 조종안


통분할 일은 '불이농촌'의 일본인 이주자들에게는 가구당 60마지기씩 소작이 아닌 무이자 12년 상환 조건으로 소유권까지 넘겨준다는 소식이었다. 더욱 기막힐 일은 총독부가 일본인 333가구에 당시로는 거금인 100원짜리 기와집을 거저 지어주고, 공동목욕탕과 함께 교통편의를 위해 철도는 50%, 기선은 30% 할인 혜택까지 준다는 것이었다.  

불이 농촌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마을 이름을 자신의 출신지역 이름을 따서 히로시마 촌, 미나미사가 촌, 나라 촌, 사가 촌 등으로 짓고, 불이공립 심상소학교(현 문창초등학교)와 불이척식 농사학교를 세우는 등 제2의 일본 만들기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조선 농민들은 불이 농촌에 가서 농사와 집안일을 해주며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김중규의 <군산역사 이야기> 참고)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비밀리에 연합국과 종전협정을 모색하던 일본이 항복 조건으로 내세운 두 가지 사항이 천황제 유지와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 유지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가 일본에 얼마나 중요한 식량창고였는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군산의 도시구성과 삶

▲ 네 개 권역으로 나눈 1930년대 군산 시가지 ⓒ 구희진


구희진 교수는 일제강점기 군산을 '개항장 거리'(조계지 중심), '천대전'(千代田) 거리, '탁류의 거리', '신파의 거리' 등 네 권역으로 나눠 당시 주민의 생활상과 도시 공간에 서려 있는 역사, 문화 등에 대해 설명했다.

구 교수 설명에 의하면 개항장 거리는 한 나라의 독점을 막으려고 공동조계지(각국조계지)로 출발했으나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일인들은 군산진이 있던 수덕산 중턱에 위치한 영사관 중심으로 생활 터전이자 근대 물질문명을 과시하는 전시장으로 꾸몄다.

▲ 영사관 부지에 1908년 새로 지은 이사청 건물 ⓒ 군산시


영사관은 이사청으로 사용되다가 1908년 헐리고, 근대문명의 상징으로 흰색 고딕양식의 2층 건물로 새로 지었다. 주변에는 경찰서, 우체국, 병원 등이 있었다. 그 옆 산자락엔 일인들의 정신적 구심인 신사(神社)를 두고, 근대문명의 총아인 공원을 개발했는데 지금의 월명공원이다.

둘째, 천대전 거리는 일인들이 붙인 행정구역 이름으로 지금의 신창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황궁과 중앙부처 등이 모여 있는 일본의 정치·행정 중심지 명칭을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붙인 것. 지금도 이곳엔 히로쓰 가옥을 비롯한 일본인 부호 집들이 남아 있다.  

개항 초기 군산에 온 일본인은 행상, 소매상 등 생계형이 다수였으나 경술국치(1910) 이후 일제의 척식 정책이 강화되면서 가족단위 영구적 거주자가 많아졌다. 1920년대 '산민증식 계획'으로 미곡 수탈량 급증과 함께 커다란 부를 축적하게 되고, 이때부터 천대전 거리는 일인 부호들의 주요 거주지가 된다.

셋째, 탁류 거리는 이름에서 나타나듯 조선인들의 생활공간이다. 개항 이후 신지식과 부를 추구하는 조선인들이 모여들어 지금의 죽성로와 영동 일대에 소규모 가게를 내고 영업을 했으며 대부분은 조계지의 도로를 닦거나 막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름 하여 '밑바닥 인생'.

구 교수는 "특히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는 조선인 노무자들과 미선공들은 개복동이나 둔율동 달동네에서 토막집을 짓고 거주했다"며 "일제강점기 이곳에서의 조선인들의 삶을 채만식의 <탁류>가 잘 드러내고 있으므로 '탁류의 거리'로 이름 지었다"고 말했다. 

▲ 1910년대 초 전북에서 최초로 지어진 극장 군산좌(1920년대 모습) ⓒ 군산시


넷째 신파의 거리는 소비문화 중심지를 뜻한다. 일제강점기 군산은 개항장 중심의 물질문명 공간과 조선인 거리의 이중 구조였다. 이렇게 수탈적인 이중 구조를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일제는 접점 지역에 경찰서와 소방서를, 부호들이 사는 지역에는 헌병 분소를 배치한다.    

경찰서를 경계로 일본인 주거 지역엔 백화점, 양복점, 사진관 등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소비시설이 즐비했다. 반면 조선인 거주지에는 희소관, 군산좌 같은 극장이 들어선다. 이에 조선인들은 '사랑을 따르자니 돈이 울고 돈을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는 신파극 대사를 '조국을 구하자니 생활이 울고 생활을 따르자니 조국이 운다'로 바꿔 부르며 고달픔을 달랬다.

구희진 교수는 "조선인 거류지역에 대한 이해, 일본인 거류지역에 대한 이해, 그리고 양자의 이중구조에 대한 이해 위에서 근대 군산에 대한 이해의 기초가 마련될 수 있다"며 "네 구역 모두 근대 문화자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밝히며 강의를 마쳤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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