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실수가 만든 작품...청색 실험노트가 맛의 비결
[르포] '대한민국 1호' 쫄면의 탄생지 인천 광신제면을 찾아
▲ '대한민국 쫄면 1호'를 만든 인천광역시 중구 '광신제면.' 50년 넘게 자리를 지키던 간판은 지난해 태풍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 박소희
"간판만 갖고도 자랑이죠."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쉴 새 없이 잘라져 나오는 쫄면 가닥을 한 무더기로 모아 정리하며 이영조(52) '광신제면' 대표가 말했다.
인천광역시 중구 경동가구거리의 한 골목에 자리잡은 광신제면은 '대한민국 1호 쫄면'을 만든 곳이다. 약 50년 전 종업원이 실수로 냉면보다 굵은 면을 뽑으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이씨는 지난 2002년 가게를 인수해 남편 하경우(56)씨와 단둘이서 쫄면과 냉면, 소면을 만들고 있다.
13일 오전 9시쯤 광신제면을 찾았을 때 하씨는 한창 쫄면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대한 함지박 앞에는 20kg짜리 밀가루 포대 네 개와 양동이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기자 눈에는 그저 통은 통이요, 물은 물이었으나 제각각 일반 물, 소금물, 소다수로 다른 것이었다. 하씨는 "물과 밀가루의 비율은 3대 7이고, 밀가루를 80kg 쓰면 면은 100kg정도 만들어진다"며 반죽기에 먼저 밀가루를 쏟았다. 뽀얀 밀가루가 흩날렸고, 하씨는 얼굴을 찌푸렸다.
소면 배달을 마치고 온 이씨는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며 "지금 쓰는 반죽기말고는 여기 있는 기계 전부 다 50년 전 쓰던 것"라고 말했다. 1층 입구에 달렸던 '광신제면' 간판 역시 그대로였다. 하지만 지난해 여름, 거센 태풍에 간판이 떨어져버렸다. 그리고 사라졌다.
반죽기 빼고는 모두 50년 전부터 써오던 기계... 간판은 바람과 함께 사라져
"글쎄 고물장수들이 우리한테 묻지도 않고 맘대로 주워갔지 뭐에요. 오래 돼서 갖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새로 간판을 달았죠. 기계는 원래 못 쓰는 건데 우리 아저씨가 다 손 봐서 그냥 써요. 안 그러면 못 쓰죠."
옆에서 묵묵히 기계를 만지고 있던 하씨에게 다가갔다. 진한 기름 냄새가 번져왔다. 목장갑을 낀 손으로 볼트를 조이며 곧 면을 뽑을 성형기를 조립하고 있던 그는 "항상 면을 뽑고 난 후에는 기계를 다 해체해서 닦아 두고, 필요할 때 다시 조립한다"며 "한 번 면을 빼고 나면 며칠 쉬는데, 그냥 두면 밀가루 쉰내가 금방 난다"고 말했다. 광신제면은 예전보다 매출량이 감소해서 재고에 맞춰 3~4일에 한 번씩 면을 뽑는다. 하씨의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 50년 넘은 기계를 이용해 쫄면을 만들고 있는 '광신제면' 하경우씨. 하씨의 정성들인 관리 덕분에 장수하고 있는 성형기는 13일도 열심히 면발을 뽑았다. ⓒ 박소희
30분쯤 지났을 무렵 반죽이 완성됐고, 성형기도 제 모습을 찾았다. 면을 뽑을 시간이다. 이씨는 가게 안쪽에 있는 방에 들어가 컵받침만한 쇳조각을 들고 바늘로 콕콕 쑤셨다. 면의 굵기를 결정하는 사출기의 구멍에 낀 밀가루 조각들을 빼내는 작업이었다. "이 사출기를 잘못 끼워서 냉면이 아닌 쫄면이 나온 것"이라고 이씨는 설명했다.
사출기를 들고 나온 이씨는 완성된 쫄면을 담을 나무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은 이게 지저분해 보인다는데 안 그래요. 다 옛날 사람들 지혜에서 나온 것이죠. 플라스틱은 면 안에 찬 습기를 빨아들이지 못하는데, 나무는 그걸 흡수해요. 플라스틱판으로 바꾸려고 해도 차이가 나서 못 바꿔요. 최초 방식 그대로죠."
밀가루 80kg이 탱글탱글한 쫄면으로 거듭나는 시간은 60분
이씨가 쭉쭉 뽑힐 면을 정리할 준비를 하는 동안 하씨는 성형기가 열심히 뱉어내는 반죽을 버리고 있었다. "기계 예열을 하고, 안에 남아 있는 찌꺼기 등을 버리기 위해서 첫 반죽은 그냥 버린다"며 하씨는 "꼭 소똥 같지 않으냐?"고 물었다. 볶은 메밀을 원료로 해 거무스름한 면을 쓸 때나 면이 타버릴 때면 더 닮았다고 덧붙였다. 원치 않는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면발의 굵기를 조절하는 사출기를 보여주는 광신제면 이영조씨. 약 50년 전, 종업원이 냉면용 사출기보다 구멍 큰 것을 기계에 잘못 끼워넣은 덕분에(?) 쫄면이 탄생했다. ⓒ 박소희
10시 40분, "해 봅시다!"라는 하씨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우리들의 행복한 쫄면 뽑기 시간'이 시작됐다. 내공 50년을 자랑하는 성형기가 거침없이 돌아가며 자신의 앞에 위치한 컨베이어 벨트를 향해 쫄면을 던졌다. 날카로운 패스를 받은 컨베이어 벨트는 드르륵 소리를 내며 쫄면의 '컨베이어 에베레스트' 등반과 하산을 도왔다.
"만져 봐요. 뜨끈뜨끈하죠? 면을 뽑는 과정에서 반죽이 기계랑 마찰하면서 열이 발생해 면이 익어서 나와요."
차근차근 설명을 하던 이씨는 갑자기 남편을 향해 외쳤다.
"이거 봐. 빨리해서 불량 나오는 거 봐요. 숙성을 충분히 시켰어야 했는데."
완성된 반죽은 일정 시간 숙성을 해야 면발과 면발이 붙어버리지 않는다. 사랑으로 하나가 된 면발은, 안타깝지만 불량품을 담는 빨간 소쿠리로 직행해야 했다. 면발들의 순애보에도, 이씨의 태도는 흔들림 없었다. '척척' 소리가 났고, 불량품 쫄면들의 사랑은 막을 내렸다.
쫄면은 면발이 굵어서 1시간정도면 80kg 넘는 반죽을 충분히 다 만든다. 면이 가는 냉면은 같은 양을 뽑을 때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컨베이어 벨트 끝에는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칼날이 기다란 면발을 적절한 길이로 끊어주고 있었다. 이씨는 잘려 나오는 면발을 받으며 "이거 정리하는 일은 아무나 못한다"고 말했다. 한 뭉치에 200g으로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나 못하는 '쫄면 줄 세우기'... 말수는 줄이고 정신은 집중해야
이씨는 쫄면을 두 뭉치씩 포개 나무상자에 5개씩 줄을 세웠다. 한 줄에 10뭉치면 2kg짜리 한 봉지 분량인데, 상자 하나에 네 줄이 들어간다. 약 8kg이다. 쫄면 뭉치마다 미세한 무게 차이가 있기 때문에, 면발이 나오는 순서대로 줄을 세우지는 않는다. 중량을 맞추다보면 간혹 쫄면 정리가 밀리기도 한다.
컨베이어 벨트 밖으로 추락할 위기에 놓인 면발을 구한 이씨는 "정신없다"며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하씨는 내내 주걱으로 성형기 안쪽에 들러붙은 반죽을 긁어내고, 사출기를 통과하는 면발을 확인하느라 조용해졌다. 윙 하는 기계 소리만이 작업장을 채우고 있었다.
11시 35분쯤 마지막 면발이 하씨의 주걱을 거쳐 이씨의 손에서 하나의 쫄면 뭉치로 태어났다. 성형기를 멈추고 컨베이어 벨트 쪽으로 다가온 하씨는 "뜨끈한 것 먹어봐라, 맛있다"며 기자에게 쫄면 조각을 권했다. 제면과정에서 한 차례 익은 쫄면의 맛은 갓 뽑은 가래떡과 비슷했다. 이날 뽑은 면의 양은 나무상자로 13판, 약 104kg이었다.
'쫄면의 탄생지' 광신제면이지만, 여름철 인기상품은 역시 냉면이다. 이곳에서는 생메밀만 쓴 함흥냉면과 볶은 메밀을 첨가한 메밀냉면, 해초를 넣어 녹색빛깔이 도는 클로렐라 냉면 등 세 가지를 만든다. 이씨는 세 종류의 냉면을 보여주며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칡냉면은 100% 칡즙을 쓰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칡 원액을 넣은 면의 색은 흐린 밤색"이라며 "보세요, 메밀냉면 색깔이 흔히 알고 있는 칡냉면이랑 같지 않냐"고 설명했다.
▲ 광신제면에서 만드는 세 가지 종류의 냉면. 왼쪽부터 볶은 메밀을 쓴 메밀냉면, 생메밀만 쓴 함흥냉면, 해초를 쓴 클로렐라냉면. 이씨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칡냉면은 사실 100% 칡즙을 쓴 게 아니라며 "진짜 칡즙을 쓰면 흐린 밤색 면발이 나온다"고 말했다. ⓒ 박소희
냉면의 비밀은 또 있다. 점심을 먹으며 하씨는 "여름에 냉면이 인기가 좋은 건 맞지만, 날씨에 따라 매출이 다르다"며 "너무 더운 날에는 사람들이 집에 있느라 냉면집에 가지 않고, 비가 계속 오면 추워서 안 먹는다"고 말했다. 이 부부와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이 그랬다.
마지막 단계인 포장작업에는 기자도 참여했다. 잘 마른 면발을 '쫄면'이라 쓰인 비닐봉지 안에 넣는 일은 예상외로 쉽지 않았다. 면이 중간에 갈라지거나 삐뚤빼뚤하게 채워졌다. 이씨는 "마른 부분을 맨 밑으로 넣은 뒤 면을 잘 모아서 착착 쌓아라"며 "우리 아저씨도 어설퍼서 늘 타박 준다"고 했다. "기자님한테는 뭐라고 안 하겠다"라는 이씨 한 마디가 서늘했다.
'좋은 면발'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또 연구
▲ 물냉면을 보기만해도 더위가 싹 가신다. 국물도 고소하다. ⓒ 조정숙
작업장 한 쪽에는 밀가루가 묻어 청색 표지가 하늘색이 된 노트 한 권이 있었다. 밀가루와 물, 소금물, 소금, 전분 등 면의 종류마다 재료를 어느 비율로 넣어야 좋을지를 연구한 하씨의 비법 노트였다. 점심식사 후 그는 '실험노트'라고 쓰인 수첩과 클리어 파일을 기자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좋은 면발을 만들기 위해 수차례 연구하고, '방부제는 쓰지 않고, 좋은 재료만 사용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에 광신제면의 면발을 맛본 사람들은 또 찾는다.
이날 오후에는 한시간 반쯤 걸리는 송도국제도시에 사는 오옥자(79, 인천시 연수구)씨가 냉면을 사러 들르기도 했다. 오씨는 "오랫동안 이 동네에서 살았고, 원래 주인이 운영할 때부터 계속 먹어왔다"며 "면 맛이 좋고, 위생사고가 난 적도 없어서 이사 간 후로도 냉면은 꼭 광신제면 제품을 쓴다"고 말했다.
▲ 반죽 30분, 성형 1시간 반, 건조 1시간 등 총 3시간여를 거쳐 완성된 쫄면을 포장하고 있는 모습 ⓒ 박소희
그러나 맛과 질, 역사에 비해 경영 사정은 좋지 않다. 하씨는 5년 전부터 인천의 한 건물에 근무하며 냉난방시설을 관리하고 있다. 면발만 만들어서는 생계 유지가 어렵기 때문이다. 나라 전체가 불황인데다 연수·남동구 쪽에 신도시가 형성되면서 구도심이었던 중구와 동구의 상권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부부가 하루에 밀가루를 240kg 쓰던 날은 제법 오래된 이야기다.
"(쫄면을 최초로 만든 곳이라고) 입소문은 났는데 지하 1층에 있다 보니 들르는 사람도 없고, 옛날부터 먹어본 분들은 택배로 주문하기까지 하는데. 인터넷으로 판매해볼까 생각도 하는데 비용 문제로 고민이죠. 정성들여 만들려고 하고, 대한민국 최초로 쫄면을 만든 곳이라는 역사까지 있으니 자부심이야 있죠. 장사만 더 잘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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