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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고 설립자 '최송설당 선생 동상' 등록문화재로 지정

국내 현존 전신 동상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평가

등록|2012.06.19 17:16 수정|2012.06.19 17:16

▲ 김천고 설립자 최송설당 선생의 전신 동상. 교내 송설역사관 안에 보관되어 있으며, 교정에는 모형 동상을 따로 세워두었다. ⓒ 김천고

경상북도 김천시 소재 김천고등학교를 설립한 최송설당 선생의 동상이 6월 19일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596호로 지정됐다. 윤호중 조각가의 1950년 작품 최송설당 동상에 대해 문화재청 누리집은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전신(全身) 동상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송설당의 동상이 처음 제작된 때는 1935년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1944년에 공출해갔다. 지금 국가의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받게 된 작품은 원작을 재현한 것이지만, 용접 기술이 없던 당시의 우리나라 동상 제작 기술을 증언하는 자료적 가치가 높다.

일제가 공출한 원작을 1950년에 재현

최송설당은 환갑이 지날 때까지도 상 위에 집어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근검절약한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절약해 모은 전재산 32만2천1백 원을 1930년 김천고보 설립을 위해 선뜻 희사한 여장부이기도 했다. 1930년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은 13원. 그녀가 희사한 32만 원은 요즘 돈 45억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1855년 김천에서 태어나 1939년 타계한 최송설당은 영친왕 이은의 보모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래 그녀의 선조들은 홍경래의 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증조 할아버지는 옥사했다. 할아버지는 유배지에서 죽었으며, 간신히 살아남은 아버지 최창환은 글방 선생 노릇을 하며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환갑 때까지 제대로 반찬도 없는 밥 먹고 살았던 송설당

아들 없는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최송설당은 어릴 적 아버지가 탄식하는 집안의 내력을 들었다. 그녀는 비록 딸이지만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드리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겠다고 결심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부모를 봉양하며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해주고 받은 품삯으로 손바닥만한 밭을 장만하고, 그것을 다시 마당만한 논으로 불리면서 재산을 모았다.

훗날 그녀는 땀흘려 모은 돈으로 각처에 흩어져 있는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일가 친척에게 전답을 나눠주는 등 가문을 일으키는 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제대로 된 교육기관 하나 없던 김천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는 전재산을 내놓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 지난 6월 16일 김천고에서는 송설당 선생 73주기 추도 행사가 열렸다. 사진은 그의 동상 앞에 화환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 ⓒ 김천고



등록문화재란?
나라의 중요 문화재들을 중앙정부는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중요민속자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다.
지방정부(광역자치단체)는 국가지정 문화재가 되지 못한 것들 중 가치가 높은 문화재들을 유형문화재, 기념물, 무형문화재, 민속자료로 지정한다. 또 지방정부는 그 아래 등급의 문화재를 문화재자료로 지정한다.
국가나 지방정부로부터 지정을 받지 못한 문화재는 비지정 문화재라 한다. 문화재로 지정을 받으려면 만들어진 지 100년 이상 돼야 한다. 그러나 50년 이상 100년 사이의 작품들 중에도 가치가 높은 것이 있다. 문화재청은 그것들을 별도로 등록문화재(근대문화유산)라는 이름으로 지정한다. 이번에 새로 문화재 지정을 받은 연세대 소장 '러들로 흉판'과 '최송설당 전신 동상'도 등록문화재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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