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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의 달인, 농촌 들녘에 서다

귀농인 이규철씨 "이제야 진짜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아"

등록|2012.06.20 09:32 수정|2012.06.20 09:32

▲ 서울에서 태어나 살다 생면부지의 땅인 전라남도로 귀농한 이규철씨가 자신의 인삼밭에서 귀농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 이돈삼


"내 삶이 아니었죠. 한 대기업 캐피탈의 법무법인에서 일했었는데요. 날마다 사람을 다그치는 게 일이었죠. 죄인 취급하고. 그 사람의 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내 위치가…. 회의감이 들었죠. 귀농도 그래서 고민하게 됐구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에서 인삼 농사를 짓고 있는 이규철(43)씨의 얘기다. 이씨는 귀농자다. 5년 전 생면부지의 땅인 강진에 터를 잡았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했다. 귀농 직전 업무는 소송을 진행하는 일이었다. 회사에서 빌려준 돈을 갚지 않는 고객을 상대로 한 소송이었다.

"소송을 월 평균 30여 건 진행했어요. 피도 눈물도 없던 시절이었죠. 이유를 막론하고 이겨야 했으니까요. 그래야 돈을 받아낼 수 있었구요. 정말 힘들었죠. 적을 만드는 일이잖아요. 다른 사람의 적대감을 안 사고 싶은데…."

이씨의 귀농 배경이다. 부인(정영호, 42)도 동의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한테도 좋을 것 같았다. 농촌에서 뛰놀면 정서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 생활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생면부지 땅 강진에 터 잡은 '서울 토박이'

▲ 귀농인 이규철 씨가 자신의 인삼밭에서 인삼의 생육상태를 살피며 풀을 뽑고 있다. ⓒ 이돈삼


▲ 이규철 씨가 키우고 있는 인삼. 밭의 흙이 기름질 뿐 아니라 인삼의 뿌리도 튼실하다. ⓒ 이돈삼


남도에 둥지를 틀고 인삼을 재배한 건 우연이었다. 완도 보길도에 살고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강진을 알았다. 어머니 품처럼 포근해 보였다. 인삼을 선택한 것도 다른 지인을 통해서였다. 인삼에 매료됐다.

선진지를 찾아 다녔다. 금산, 강화, 풍기에서 해남까지 안 가본 곳이 없다. 그러고 나서 한 농가에 부탁을 했다. 일을 배우게 해 달라고. 돈도 필요 없고, 먹고 자면서 일만 배우면 된다고.

인삼재배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일도 많았다. 어찌나 고되던지 '군대(해병대) 생활보다도 몇 배 더 고됐다'는 게 그의 말이다.

▲ 이규철 씨의 인삼밭. 가뭄 탓에 스프링클러가 작동하고 있다. ⓒ 이돈삼


인삼재배법을 익힌 이씨는 강진에서 인삼재배를 시작했다. 그때까지 서울에 있던 부인과 세 자녀도 데려왔다. 지난 2007년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도시에서 사기를 치고 왔거나 망해서 온 게 틀림없다며 수군댔다.

농사일은 여전히 버거웠다. 틈나는 대로 선진 농가를 찾아다니고 교육도 쫓아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 가까운 곳에 재배법을 가르쳐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날마다 밭에서 일에 파묻혀 사는 게 일상이었다. 돈이 될 리도 없었다. 이렇게 힘들게 살려고 귀농했나 하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너무 힘들었어요.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어요. 한 번은, 귀농한 지 2년 정도 지났을 때쯤이었을 거예요. 술을 죽기 직전까지 마셨죠. 그러고 나서 아내한테 '서울로 돌아가자'고 했죠. 근데 오히려 다독거려 주더라구요. 힘 내자고. 할 수 있다고. 같이 열심히 하면 못할 게 뭐 있냐고. '영원한 내 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농사가 너무 좋아요... 진짜 내 인생 사는 것 같죠"

▲ 이규철 씨가 인삼밭에서 인삼의 생육상태를 살피고 있다. 이 인삼은 5년 된 것이다. ⓒ 이돈삼


▲ 인삼 씨앗. 이규철 씨의 5년 된 인삼밭에서 나온 것이다. ⓒ 이돈삼


이씨는 다시 마음을 부여잡고 일에 매달렸다. 새벽 서너시면 일어났다. 인삼재배에 적합한 유기질 토양을 만드는 데 노력했다. 서울에도 가지 않았다. 향수병인지, 한 번씩 다녀오면 사나흘 동안 일하기 힘들었다. 전화번호도 바꿨다. 서울에서 만난 인연과의 연락도 모두 끊었다. 오로지 농사일에만 매달렸다.

농사기술도 하나씩 터득했다. 배운 걸 나만의 기술로 응용도 했다. 그게 더 중요했다. 그 결과 지금은 인삼재배의 베테랑이 됐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인삼재배로 시험을 본다면 사시도 패스할 수준'이 됐다. 올해부터선 그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던 친구들과도 다시 만나고 있다.

그렇다고 일이 수월해진 건 아니다. 여전히 벅차다. 트랙터와 관리기 등 농기계로 마을 어르신들의 일까지 거들고 있어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하다. 시쳇말로 이러다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이왕 하는 일, 즐겁게 하자는 생각으로 한다.

▲ 이규철씨의 2년 된 인삼밭. 이씨는 유기농 토양을 만들어 어린 삼부터 튼실하게 키우고 있다. ⓒ 이돈삼


이씨의 인삼재배 면적은 30만㎡를 조금 넘는다. 모두 6년근으로 키운다. 한국인삼공사와 계약재배를 하고 있어 판로 걱정도 없다. 시쳇말로 없어서 못 판다. 유효사포닌의 효과를 배가시키는 홍삼 가공도 하고 있다.

일이 늘어난 만큼 소득도 쏠쏠하다. 그러나 아직 규모의 경제를 꾸리지는 못하고 있다. 초기 투자비가 많이 들어가서다. 앞으로 3∼4년은 더 갚아야 한다. 그 뒤엔 고스란히 순소득이다.

"서울에 살 땐 법에 대해선 자신 있었거든요. 농사는 문외한이었지만…. 그런데 지금은 농사에 자신 있습니다. 날마다 일의 연속인데 그래도 좋구요. 이제야 진짜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정말 편해요. 행복해요."

성실과 정직을 신념으로 인삼을 재배하고 있는 이씨의 맺음말이다.

▲ 탐스럽게 다음어진 이규철씨의 인삼밭. 싱그런 연녹색을 보이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 이돈삼


▲ 5년 된 인삼이 자라고 있는 이규철씨의 인삼밭 풍경. 이씨의 인삼밭은 대부분 공기 맑은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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