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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맞은 할아버지... 내 똥 먹고 나으셨다

내가 겪은 한국전쟁(3) 피란서 돌아온 뒤 마을 풍경

등록|2012.06.26 11:24 수정|2012.06.26 15:26
2012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2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그때 여섯 살 난 소년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내가 본 한국전쟁 이야기를 5회 정도 연재하고자 한다. 마지막 회는 최근에 발간된 한국전쟁 당시 프랑스 종군기자(AFP·르 피가르 소속) 네 명이 야전에서 발로 뛰며 작성해 전송한 기사들을 한데 묶은 <한국전쟁 통신>을 소개할 예정이다.

기사 사이에 소개하는 사진은 기자가 2004년, 2005년, 2007년 세 차례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 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발굴한 것들이다. 이 한국전쟁 사진 자료 가운데 일부는 이미 <오마이뉴스>에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제목으로 30회 연재한 바 있고, 그리고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 2, 3>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 <한국전쟁 Ⅱ> 등의 제목으로 사진집을 펴냈다. <기자 말>

거리마다 뒹구는 시체들

그해 9월 하순 무렵에야 피란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구미 장터마을은 성한 집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거리마다 사람의 시체가 뒹굴었다. 동네 곳곳에는 철모 탄피 탄통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심지어 부서진 인민군 탱크까지 전쟁이 끝난 지 서너 해가 지나도록 들판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하지만 무서워 감히 접근치도 않았다. 집집마다 부서진 집을 다시 짓거나 고치는가 하면 마을 빈 터에는 움집이 들어섰다. 그 움집에는 주로 북쪽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살았다.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전차포 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 NARA, 눈빛출판사


피란에서 돌아온 집마다 한두 식구가 보이지 않았다. 앞집 김 목수 집은 맏아들이 전쟁 중 행방불명됐고, 오거리 공씨네 술도가 집 외아들도, 그 옆 집 참기름 집 약목 댁도 전쟁 후 아들을 볼 수 없었다.

어른들의 귀엣말로는 아마도 그들은 전쟁 중에 부역을 한 관계로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갔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 집은 내 바로 밑 여동생이 피난에서 돌아오자마자 홍역으로 병원에 미처 가 보지도 못한 채 항아리에 담겨 도량동 싸릿재 공동묘지로 갔다.

피란에서 돌아온 뒤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경찰서로 불려갔다. 인민군 점령 기간 동안 그들에게 부역한 사람을 찾아 혼을 내거나 감옥으로 보낸다고 했다. 구미 임은동에 조아무개 농사꾼은 전쟁 중 잠시 동인민위원장이라는 완장을 두르고 인민군에 부역했다고 해 된통 두들겨 맞고 장독(杖毒·매를 심하게 맞아 생긴 상처의 독)으로 한 달 만에 죽었다.

구미 임은동 광평동 형곡동 일대는 1950년 8월 16일 미군이 떨어트린 융단폭격에 미처 피난치 못한 집은 거지반 폭격으로 사망해 전쟁이 끝난 뒤 온 동네 집집마다 한 날에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똥냄새에도 촌수가 있다

▲ 1950. 11. 2. 길거리에 버려진 고아들을 고아원으로 데려가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나의 할아버지도 경찰서에 불려갔다. 아마도 멀리 피란 가지 않고 유독 우리 집만 성하게 남은 것이 인민군들에게 편의를 봐준 게 아니냐는 억측을 낳았다. 때문에 경찰서에서 부른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경찰서에 가지마자 군복을 입은 전투경찰에게 몽둥이로 몹시 두들겨 맞았다.

그 소문을 듣고 할머니가 단걸음에 경찰서로 달려가 순경 부인 성주 댁을 우리가 피란시켜줬다는 이웃의 보증으로 할아버지는 곧 풀려났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당신 발로 돌아오지 못하고 고모부가 업고 모셔와 사랑에 눕혔다. 그 뒤 할머니는 자주 그때 일을 들먹이며 "고운 일하면 고운 밥 먹는다"는 말을 했다.

▲ 1951. 1. 8. 부산, 목판에 담배와 껌을 파는 소년. ⓒ NARA, 눈빛출판사


할머니는 북새통 피란길에 순경부인 성주댁을 보호해 준 덕을 봤다고, 그 성주댁이 당신 영감 살렸다는 말을 했다. 피난 중 밤이면 인민군들이 노숙하는 곳으로 와서는 전짓불을 비추며 경찰이나 군인 가족이 없느냐고 다그쳤지만 할머니는 성주댁을 끝까지 당신 며느리라고 극구 변호해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었다.

할아버지 매 맞은 장독에는 사람의 똥이 가장 특효라고 해 그날부터 나는 대변을 소여물 바가지에 보았다. 그런 뒤면  할아버지는 거기다가 막걸리를 부어 들이켰다. 한 번은 내가 들에서 놀다가 급해 거기서 대변을 보고 돌아왔다. 대신 사촌아우의 똥을 받아왔는데 할아버지는 끝내 들지 않았다.

▲ 1951. 5. 24. 부산,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전쟁 놀음은 잊은 채 길거리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그러면서 똥냄새에도 촌수가 있는 모양이라고 해 할아버지가 경찰서에 다녀온 뒤 처음으로 가족들이 크게 웃었다. 할아버지가 내 똥을 드신지 보름만에 마침내 건강을 회복하자 할머니가 오금을 박았다.

"영감 누구 땜시로 살아난 줄 아시오?"

애초 순경부인 성주댁이 우리 집 피란 행렬에 동행하는 걸 할아버지는 식구가 많다고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할아버지가 겸연쩍게 동문서답처럼 대꾸했다.

"덕을 쌓은 집안에는 경사가 있느니라."

▲ 51. 8. 18. 전쟁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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