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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향한 그리움은 늙을 줄도 모르는가"

제62주기 13차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열려

등록|2012.06.27 19:37 수정|2012.06.27 19:37

▲ 27일 오후 대전 중구 서대전시민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제62주기 13차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시낭송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족들. ⓒ 오마이뉴스 장재완


▲ 27일 오후 대전 중구 서대전시민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제62주기 13차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사전공연을 하고 있는 '극단 좋다'의 공연. ⓒ 오마이뉴스 장재완


▲ 27일 오후 대전 중구 서대전시민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제62주기 13차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이승만이 달아준 살인 허가장 이마에 달고/ 한 손에는 일본도요/ 또 한손엔 미군이 준 총을 들고/ 동족상잔 저지르는/ 광견들의 피의 축제...(중략) 아비 향한 그리움은/ 늙을 줄도 모르는 지/ 깊은 밤 잠 못 들고/ 한반도의 산천을 울리는/ 탄식소리 들리는가/ 영문도 모른 채/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신/ 아비의 유골 찾아/ 가시덤불 우거진 골령골/ 골짜기마다 헤매는/ 저 흰머리 날리는 고아들을 보라."

62년 전 한국전쟁 당시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한국 군경의 학살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전숙자 씨의 애끓는 시가 낭송되자 행사장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후퇴하던 한국군경이 대전 골령골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 등 민간인 수천명을 학살했다. 이를 추모하는 '제62주기 13차 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27일 대전 중구 서대전시민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렸다.

부모 또는 형제를 영문도 모른 채 잃고 60여 년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숨죽이며 살아왔던 유족들은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서도 마르지 않은 눈물 뚝뚝 흘리며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부르짖는 전 씨의 울부짖음에 일제히 눈시울을 붉혔다.

전 씨는 이날 "화려함도 나는 싫소/ 과시도 우리는 싫어/ 단 한 점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하루바삐 유골 발굴 마치어/ 우리 부친 편안히 모시고/ 이 몸도 잠들게 하라"는 글귀로 시낭송을 마쳤다.

이날 위령제에는 대전산내학살사건 대전유족회와 제주유족회, 여수순천유족회, 전국민간인학살 유족회 등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300여 명의 유족들과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 대표 및 회원 등이 참석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령들의 명복을 빌었다.

위령제의 시작은 극단 '좋다'의 추모공연이 장식했다. 산내에서 희생당한 영령으로 분한 배우가 두려움에 떨면서 무릎 꿇고 빌었으나 결국 총에 맞아 사망하고, 이를 위로하는 살풀이춤으로 이 영령이 편안하게 잠든다는 내용의 공연이 이어지자 장내는 금세 숙연해졌다.

단상 앞에 전시해 놓은 학살당시 현장 사진은 그 날의 피비린내 나던 현장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었고, 단상 정면에 빼곡히 내걸린 산내학살 사건 희생자 위패는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듯했다.

▲ 27일 오후 대전 중구 서대전시민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제62주기 13차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시낭송을 하고 있는 신순란, 전숙자 회원. ⓒ 오마이뉴스 장재완


▲ 27일 오후 대전 중구 서대전시민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제62주기 13차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유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유족대표 인사에 나선 (사)대전산내학살사건희생자유족회 김종현 회장은 "수천 명에 이르는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들의 후손 수백 명이 모여 조촐하게 억울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위령제를 개최한 지 벌써 13년이 흘렀다"며 "후손들이 모여 유족회를 만들고, 고인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세상에 밝히고자 노력한 결과로 대전산내학살사건의 진실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이어 김 회장은 "2011년 6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제소자와 보도연맹원을 법적절차 없이 살해한 것은 국가에 의한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밝혔다"며 "그러나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513명밖에 되지 않고, 또한 기나긴 세월 고통 속에 살아온 유족에 대한 보상문제 등도 요원한 상태다, 그러기에 아직도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억되지 못하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아픈 상처는 덮는다고 잊히지 않는다, 옳지 않은 과거를 반복하지 않는 방법은 명백히 밝히고 역사로 남겨 기억하는 것"이라며 "그러기 위해 아직 못 다한 조사와 발굴 그리고 추모공원 조성 등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끝으로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만들어갈 새로운 역사는 더 이상 증오의 역사가 아닌 화해와 평화의 장이 될 것이다, 정부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진실규명작업을 계속해 달라"고 호소했다.

추도사에 나선 장준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상임대표도 "지금이라도 정부와 국회는 못다 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며 "그리고 유해가 묻힌 곳은 하루빨리 발굴, 추모공원을 조성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위령제는 유족들의 헌화와 분향으로 마무리됐다. 한 송이 흰 국화를 제단에 바친 유족들은 머리를 숙여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고, 한 유족은 '아버지~ 아버지~'하고 외치며 큰 절을 올리기도 했다.

한편, 대전산내학살사건은 1950년 6월부터 7월 초까지 제주4·3 및 여수순천 사건 관련자 등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북 일원의 보도연맹원 등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의 민간인을 한국 군경이 법적절차 없이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이에 대해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010년 7월 군경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학살된 '대전형무소 재소자희생사건'은 '진실'이라고 밝히고, 정부에 대해 ▲유족에게 사과할 것 ▲위령사업 지원 ▲평화인권교육을 강화 등을 권고했다.

▲ 27일 오후 대전 중구 서대전시민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제62주기 13차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 27일 오후 대전 중구 서대전시민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제62주기 13차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산내 골령골 왜 변화를 모르는가


1950년 죄라는 명복도 없이
사슬에 꽁꽁 묶여 비명에 가신 곳
산내 골령골

끌려간 자식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 같아
대문 활짝 열어 놓은 채
발자욱 소리 들리는 듯
어머니라 부르는 소리 들리는 듯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눈물로 떠나가셨네

활짝 웃어주었던
아버지는 나라에 버림받아 끌려가셨고
남은 자식들은 나라가 만든 엉터리 법에 갇혀
세상의 불신 속에 숨죽여 살아온 세월
가슴으로 울며 고인 눈물 삼키며
어느새 백발이 되었네

아버지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는 채
해마다 이곳저곳 헤매며
허공에 위패와 제사상 모셔놓고
국화 한 송이로 아픈 가슴 달래었네

골령골 왜 변화를 모르는가?
수천 명을 죄목도 없이 희생시켜놓고
나라는 왜 책임을 질 줄 모르는가
세계속의 한국이라는 자랑스런 발전 앞에
왜 반성과 사죄에 대해서는 외면만 하고 있는 것인가?

많은 유족들 흰머리 노인 되어
마지막 넘으려는 해와 같거늘
떠나기 전에 가슴에 맺힌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소서

나라의 사죄와 정성으로 만든 무덤 앞에
술 한잔 철 철 넘치게
올리고 떠나갈 수 있도록
거듭거듭 정부에게 호소합니다.

/신순란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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