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교전, '햇볕'이 예고한 비극이었나?
'안보무능 비판'을 '햇볕정책 책임'으로 치환한 이명박 정부
▲ 원유철 국방위원장을 비롯한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2010년 10월 18일 오전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에 정박한 독도함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해군본부와 해병대사령부에 대한 국정감사에 앞서 제2연평해전 전적비를 찾아 참배를 하고 있다. ⓒ 유성호
현 정부가 햇볕정책의 대원칙으로 내세워온 '튼튼한 안보'의 실체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평소 한반도의 '해상 화약고'로 여겨져 온 곳에서 국방관계자가 "무방비상태에서 공격을 받았다"고 실토하지 않을 수 없는 어이없고 무참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현 정부의 '튼튼한 안보'는 햇볕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국민 기만용이었다고 해도 정부로서는 할 말이 없게 됐다. 국민들이 북한의 도발 못지않게 걱정하는 것은 현 정부의 안이한 대북 인식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2002년 7월 1일자 <조선일보> 사설)
"모든 것이 다 햇볕정책 때문이다."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인근 NLL 해상에서 벌어진 남북한 해상충돌 직후 나온 보수신문들의 반응은 딱 이 한마디로 정리된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도 이 교전을 "햇볕정책 때문에 필연적으로 빚어진 패전"으로 규정했다.
제2연평해전 이후 열린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나라당 박세환 의원은 "북한의 서해 무력도발로 현 정부가 '안보 지키기'가 아닌 '햇볕정책 지키기'에만 전념하고 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같은 당 맹형규 의원도 "서해교전 완패의 원인은 '절대로 북한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포함된 대통령의 '4대 교전수칙'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군 안팎에선 현 정부 출범 이후 군의 작전·군령·지휘체계 상의 주요 보직자들을 'DJ 하나회'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이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구현하는 '햇볕정치군'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명칭부터 바뀐 서해교전, 평가도 180도 달라져
하지만 보수세력의 이런 평가는 이명박 정권 출범 직후인 2008년 '패전'에서 '승전'으로 180도 바뀌었다. '서해교전'으로 부르던 명칭부터 승전의 의미를 담은 '제2연평해전'으로 변경됐다. 당시 해군 수뇌부는 '해군 교리상 서해교전을 해전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명칭을 바꾸었다.
2009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한승수 국무총리는 "제2연평해전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사수하기 위해 우리의 용감한 해군 장병들이 북한의 기습도발을 온몸으로 막아낸 승리의 해전"이라며 "이명박 정부는 작년부터 제2연평해전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우리 해군의 승전으로 다시 평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올해 꼭 10년을 맞는 제2연평해전 기념일을 앞두고 보수세력은 햇볕정책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을 퍼붓고 있다.
당시 북한 해군의 선제공격으로 우리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을 당한 것은 김대중 정부의 정략적 대북 유화정책에 매몰되어 북한의 도발징후를 고의로 무시해서 빚어진 비극이라는 주장이다. 또 교전 당시 우리 해군의 손발을 묶었던 것이 친북적 햇볕정책을 밀어붙였던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잘못된 지시 때문이었다는 것이 보수세력의 인식이다.
'선제공격 불가' 교전규칙은 이명박 정부도 같아
▲ 이명박 대통령이 6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제57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 현충탑에 분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사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2002년 7월 22일 열린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당시 이준 국방부장관은 "합참의 작전예규는 연평해전 이전이나 이후에도 교전규칙의 기본정신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 햇볕정책이나 대통령의 4대 교전수칙과는 무관하다"고 답변했다.
최근 국방부 관계자도 기자에게 "교전규칙은 연합사(한미연합사령부)에서 정전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군사적 행동규칙"이라고 설명하며 "1997년 10월 작성된 이후 '선제공격 불가'를 명시한 것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인데도 제2연평해전 때는 선제공격을 못해서 패전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제2연평해전이 잘못된 햇볕정책 때문에 필연적으로 벌어진 일이라면 이 정책을 계승한 참여정부 시절에는 서해상에서 남북 군사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오히려 경계임무를 수행 중이던 해군 초계함이 침몰하고 휴전 후 최초로 우리 영토에 포탄이 떨어져 민간인과 해병대원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난 것은 북을 압박해 못된 버릇을 고치겠다며 햇볕정책을 폐기한 이명박 정부 아래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는가.
제2연평해전 당시 작전 실패의 책임자로 지목되던 합참 작전본부장을 초대 국방장관으로 앉힌 사람도 바로 이 대통령 자신이다. 대북강경책을 선택했으면서도 정작 국방예산 증가 억제정책을 택했던 것도 바로 이 정부였다.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 도발도 햇볕정책 탓?
연평도에 북한의 포탄이 떨어지던 그 시점에 청와대에서는 "확전이 되지 않도록 대처하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천안함 사건 당시 다짐했던 '강력한 응징'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모든 책임을 햇볕정책 탓으로 돌렸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과 보수언론의 현실인식은 판박이다.
연평도 포격 도발 직후인 2010년 11월 29일 이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지난 20여 년간 대화와 협력을 통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며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핵개발과 천안함 폭침에 이은 연평도 포격"이라며 북한 도발의 모든 책임을 '햇볕정책'으로 돌렸다.
이 대통령은 또 "그동안 북한 정권을 옹호해 온 사람들도 이제 북의 진면모를 깨닫게 되었을 것"이라며,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졸지에 '북한정권 옹호자'로 만들어버렸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안보무능' 비판을 이미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는 '햇볕정책' 책임으로 치환시켜버린 것이야 말로 정략적이고 무책임한 일이라는 비판에도 이 대통령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제2연평해전 10주년, 대통령의 메시지가 우려스럽다
이명박 대통령은 29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제2연평해전 기념식에 참석한다. 이 대통령은 기념식에 앞서 제2연평해전 전적지를 참배하고 기념식이 끝난 뒤에는 전사자 6명의 이름을 딴 고속함들을 순시하면서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할 예정이다. 최근 종북 논란에 대한 이 대통령의 발언 등으로 비춰볼 때 한층 강한 안보 메시지가 나올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임기 마지막 해 대선을 앞두고 이 대통령이 쏟아낼 메시지는, 반세기 넘게 시대착오적 냉전논리를 여전히 조자룡의 헌 칼처럼 휘두르는 외눈박이 보수언론들의 행태로 볼 때 우려스럽다.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것이라면 소모적인 논쟁이 되기 십상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