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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화된 통합진보당은 가라... 이제 새싹 틔울 때

7월 14일 변혁적 현장실천·노동자계급 정당 건설 토론회를 앞두고

등록|2012.07.05 16:56 수정|2012.07.05 16:56

▲ 지난 4월 25일, 평택 쌍용차 공장 정문 앞에 마련된 쌍용차 해고노동자 고 이윤형씨의 분향소. 그의 죽음으로 2009년 구조조정 이후 사망한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은 22명이 됐다. ⓒ 박소희


정확히 10년 전, 나는 감옥에 있었다. 1750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서 함께 살기 위해 파업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로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2001년 2월 20일 새벽 부평공장에 공권력을 투입했고, 노조위원장이었던 나는 그날부터 1년 동안 산곡동 성당에 갇혀 살아야 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근로기준법 24조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발생하면 정리해고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노동악법 1호'를 만든 후, 전국의 노동자들은 언제 잘릴 줄 모르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현대차, 만도기계로 이어진 정리해고와 공권력 침탈은 대우자동차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의 대가는 구속과 수배, 그리고 오랜 해고 생활이었고, 공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가정이 파탄나고, 노숙자가 돼 사라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1년 부평의 '노동자 잔혹사'는 고스란히 2009년 쌍용자동차로 옮겨왔고, 22명의 죽음이라는 가장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민주당 정권의 노동악법 1호, '정리해고법'이라는 괴물은 파산이나 부도에 이른 기업을 넘어 장래에 다가올 경영상의 위험까지 '정당한' 해고로 만들었다. 회계조작과 기술유출로 빚어진 쌍용차, 대우자동차 맞은 편에 있는 콜트·콜텍과 대우자동차판매, 한진중공업과 풍산마이크로텍, 시그네틱스와 K2코리아까지... 이름을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사업장에서 잔혹한 정리해고가 계속되고 있다.

부평의 노동자 잔혹사가 평택으로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2011년 고용보험 피보험자격을 상실한 사람 중 정리해고를 뜻하는 '경영상 필요에 의한 퇴직' 노동자는 10만3274명이었다. 이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2만6555명 이래 최대로 13년 만에 10만 명을 넘은 것이다.

이 수치에는 언제나 마음껏 쓰고 자를 수 있는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중소기업의 노동자들, 회사의 압력으로 자진 퇴사한 노동자들의 숫자가 빠져있다. 그만큼 정리해고가 전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름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정리해고 사업장 중에서 회사가 망해서 노동자가 정리해고를 당하고, 회사 사장도 '알거지'가 됐다는 기업을 들어본 적이 없다. 거꾸로 정리해고한 회사에서 사용자들은 고액의 주식 배당을 챙겨갔고, 더 큰 부자가 됐다.

5년의 해고 생활 후 공장으로 돌아왔더니, 정규직이 일하던 자리를 많은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2008년 겨울 미국발 경제 위기가 몰아치자, 회사는 정규직 전환배치를 통해 6개월 만에 1천 명이 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회사에 넘어간 정규직노조가 비정규직의 해고에 합의하는 비참한 풍경이 벌어졌다.

김대중 정부가 만든 정리해고법은 그렇게 정규직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을 실업자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리고 2012년 대우자동차, 아니, 한국지엠의 노동자들은 유럽발 경제위기로 언제 또 정리해고로 쫓겨날지, 지엠이 언제 우리를 버리고 떠날지 불안에 떨고 있다.

정리해고 사업장에 알거지가 된 사장은 있는가

11년 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파업 시절, 노동자 국회의원 한 명이 절실했었다. 정리해고와 공권력 진압에 맞서, 계엄을 방불케 하는 경찰의 잔인한 폭력에 맞서 온 몸으로 함께 싸워 줄 국회의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지고,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권영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출마했다. 200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으며 돌풍을 일으켰을 때 마음속 한 켠에 기대가 있었다. 의회주의에 매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현장의 노동자들은 적잖은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씩 노동자에게서 멀어졌다.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은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고 구속되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이 돼갔다. 거리와 공장에서 노동자, 서민들과 함께하는 투쟁이 중심이 아니라 국회 안에서 거래와 타협이 중심이 됐다. 그 결과, 2007년 대선 패배와 분당으로 이어졌고, 노동자들의 기대와 희망은 무너져 내렸다.

2001년 절실했던 노동자 국회의원

▲ '한지붕 세 가족' 통합진보당이 충선 후보 경선 갈등으로 인해 통합 성공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출범식에서 심상정, 이정희, 유시민 공동대표가 당기를 흔드는 모습. ⓒ 연합뉴스


지난 2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일부가 국민참여당과 통합해 통합진보당을 만들었을 때였다. 김대중 정부가 만든 노동악법 1호 정리해고법에 의해 가장 큰 고통을 겪었던 한국지엠의 노동자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정희 대표는 '참여정부의 과거를 묻지 않겠다'며 국참당의 유시민 대표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았고, 유시민 대표는 참여정부 시절 민주노동당이 참여정부에 반대만 해서 실패하게 만든 책임이 있다고 그 책임의 화살을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정조준했다.

물론 우리 조합원들은 민생 경제와 민주주의를 파탄내고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명박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국지엠은 해외매각 반대와 정리해고 투쟁이 있었고, 이는 김대중 정권에서 벌어진 일인데, 정리해고법을 만들고 노동자들의 저항을 폭력으로 짓밟은 세력을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것을 동의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쌍용자동차를 비롯해 전국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는데, 그들은 오직 야권연대와 권력에만 목숨을 걸고 있었다. 지난 시간 노동자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싸웠던 이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노동자 정당, 노동자 후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권력의 진흙탕에 처박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 정당이 아니었던 통합진보당

현장의 노동자들에게는 통합진보당보다 더 화가 나게 만든 것이 민주노총이었다. 2001년 대우자동차 파업 당시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하는 '우리의 조직'이었다. 적어도 2006년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악법에 반대해 민주노총이 파업을 할 때까지만 해도 조합원들에게 희망과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민주노총 역시 노동자들에게 멀어졌다. 민주노총 중앙은 관료화되고 관성화된 조직이 됐다. 그리고, 목숨을 건 노동자들의 투쟁에 총파업은커녕 거리의 투쟁조차 제대로 조직하지 않았다.

2008년 촛불항쟁, 2009년 쌍용차 77일 점거파업, 2010년 현대차 비정규직 25일 점거파업, 2011년 김진숙 지도위원 85호 크레인 309일 고공농성까지 민주노총은 총파업과 투쟁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으로 전락했고, 급기야 희망버스 때에는 한낱 승객에 지나지 않았다.

소위 진보정당이 3대 악법을 만들고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세력과 통합하려고 할 때 민주노총이 보여준 모습은 참담했다.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초기에 국민참여당과 통합에 반대하더니, 통합 이후에는 심지어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와 공동유세를 다니며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에 면죄부를 줬다.

민주노총은 현장의 조합원들과 산별연맹, 지역본부의 반발에도 대의원대회가 아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강행하더니, 부정선거 사태가 벌어지자 조건부 철회로 변경하고 혁신비대위를 지지하며 '통합진보당 고쳐쓰기'에 '올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떠난 노동자들의 마음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진보정당은 노동자를 버렸고, 노동자들도 통합진보당을 마음에서 지웠다.

민주노총의 '통합진보당 고쳐쓰기'?

▲ 김진숙 지도위원, 송경동 시인,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실장과 쌍용차, 재능, 콜트콜택 비정규노동자들로 구성된 '어머니의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지난 2월 20일 오후 고 이소선 여사와 아들인 전태일 열사의 묘가 있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을 찾았다. 고 이소선 여사가 생전에 '희망버스'를 타고 만나고 싶어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던 김진숙씨가 굳은 표정으로 묘역에 도착하고 있다. ⓒ 권우성


지난 2월, 소위 진보정당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악법을 만들었던 세력과 통합하고, 민생과 현장을 외면한 채 '묻지마 야권연대'에 매몰되어 있을 때였다. 부평의 한 허름한 술집에서 노동운동가들을 만나 고민을 토로했다. 그리고 노동자의 땅에 노동자 계급정당의 씨앗을 새로 심자고 했다.

현장의 조합원에게 신뢰받는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정파를 넘어 온 몸을 바쳐 싸워왔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가장 처절하고 치열하게 싸웠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하는, 무너진 현장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투쟁과 연대를 통해 만드는 노동자계급 정당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시작했다.

쉽지 않은 제안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현대차·기아차·한국지엠을 비롯한 대공장에서부터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 지역에서 치열하게 싸워왔던 지역지부와 현장의 간부들까지 많은 이들이 전국적 현장투쟁의 복원과 노동자 계급정당을 시작하자는 마음을 보여줬다.

토론 모임의 제안서가 공개되고, 지난 6월 11일 대전에서 열린 1차 공개토론회에 전국에서 참가한 활동가들은 현장의 노동자들이 느끼는 절박함을 생생하게 얘기했다. 현장을 버리고 떠난 진보정당과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태로 인한 절망감, 그리고 노동자계급 정당과 변혁적 현장실천에 대해 고민을 나눴다.

7월 14일 대전에서 2차 공개토론회가 열린다. 이번 토론회에서는 각 지역과 현장의 토론회에서 나온 노동자들의 고민과 바람을 모아내려고 한다. 금속노조의 7월 파업과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든 사내하청 정규직화 투쟁, 민주노총의 8월 총파업, 대통령선거 투쟁,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의 시기와 방향 등을 머리를 맞대고 나누려고 한다.

금속을 넘어 모든 산업과 지역에서 무너진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현장의 실천과 치열한 토론을 모아나가려고 한다. 노동의 땅에 새로운 노동자정당의 씨앗을 뿌리려고 한다.

노동자 대투쟁 노동자정당의 씨앗에 풍족한 거름

그러나 우리 앞에 넘어야 갈 장벽과 헤쳐 나가야 할 가시덤불이 많이 있다. 가장 큰 장벽은 현장 노동자들의 체념과 절망이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정파의 깊은 골, 과거의 관성은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때로는 극심한 가뭄이, 때로는 홍수와 태풍이 우리의 길을 막아설 것이다.

하지만 화물연대와 건설노조의 파업에서 시작한 거대한 노동자 투쟁은 탐욕의 자본에 맞서는 새로운 노동자 정당의 씨앗에 풍족한 거름이 될 것이다. 금속과 민주노총의 총파업과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투쟁으로 노동자 계급정당의 작은 씨앗은 마침에 커다란 열매를 맺을 것이다.

7월 14일 민주노총 대전본부에서 진정한 노동자 정당을 바라는 동지들을 만나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김일섭씨는 전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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