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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본 판문점 태극기... 이런 비극 또 없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⑭] 판문점과 개성, 그리고 이별

등록|2012.07.21 17:18 수정|2012.07.27 13:56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 서울 70km를 알리는 이정표 ⓒ 신은미


북한에서의 마지막 일정이다. 분단의 비극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판문점에 간단다. 서울에 살았을 시절에도 관심이 없어 가본 적 없는 이곳을 평양에서 가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 쓰라린 긴장감이 느껴진다.

판문점으로 가는 길은 조용하고 평온하다. "바로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도로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께서 평양에 오셨다"고 만룡 안내원이 설명한다. 남편이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께서도 서울에 한번 오셨으면 좋겠는데"라고. 그러자 만룡 안내원이 "남조선에 우리 동포들만 살고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니까 우리 인민들로서는 경호상 안심할 수가 없습네다"라고 대답한다.

'평산'이라고 적혀있는 표지판이 나온다. 내 본관은 평산인데 막상 이정표를 보니 기분이 묘하다. 얼마 더 지나니 해주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나온다. 남편은 북한과 아무 관계가 없지만, 본관이 황해도 해주다.

우리는 궁금증이 발동해 일행들의 본관을 물어봤다. 리만룡 안내원은 전주 이씨, 리인덕 운전기사 아저씨는 경주 이씨, 그리고 설경이는 김해 김씨란다. 남편과 내 본관은 모두 북한에 있는데, 이들의 본관은 모두 남한에 있다. 서로 쳐다보며 묘한 웃음을 짓는다.

서울까지 70km... 가슴이 아픕니다

남쪽 방향을 향하고 있는 우리 차량이 '서울 70km'라고 적혀있는 이정표를 지나친다. '서울'이라는 글자에 반가움과 친숙함이 마음의 눈물이 돼 울컥 솟구친다. 내 가슴이 비통함으로 마구 조여온다.

지금 나는 서로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최전방, 최전선을 구경하러 가고 있다. 누가 누구의 적이며 왜 무찔러야 하는 대상이 됐는지 내 머릿속은 백지가 돼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남편과 나는 딸 같은 설경이와 만룡 안내원, 그리고 착하디착한 운전수 당원 아저씨와 함께 '적군'의 차량을 타고 휴전협정지로 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인지되고 있을 뿐이다.

주변 경비가 삼엄한 것을 보니 판문점에 다 온 것 같다. 우리보다 앞서 외국 관광객들이 도착해 있었다. 우리 부부에게 판문점을 안내해 줄 군인 아저씨가 다가온다. 내가 북한에서 본 군인 아저씨 중에서는 제일 군인다워 보였다. 키도 크고, 말소리도 씩씩하다. 앞으로 둘러볼 판문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지휘봉으로 안내도를 짚는데,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다. 판문점 입구서부터는 이 군인 아저씨가 우리 차에 탑승해 함께 비무장지대로 가게 된다고 했다.
  
커다란 철문이 열린다. 출발을 알리는 다른 군인의 손 신호에 차량이 움직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차량이 멈춘다. 걸어서 들어가야 한단다. 우리 일행은 걸어서 정전협정이 맺어졌다는 건물에 닿았다. 그 건물 안에는 그 시절의 사진들과 협정 때 사용됐던 책상, 의자, 문서 자료 등이 보관돼 있었다.

▲ 북녘에서 바라본 판문점... '자유의 집'이 손에 잡힐 듯 ⓒ 신은미

▲ 판문점의 북한 병사들. ⓒ 신은미

▲ 정전협정 조인장에 있는 유엔기와 문서. ⓒ 신은미


예고 없이 전쟁날 수도 있다니...

이 방면으로 아무런 지식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나는 여러 가지가 의문과 의혹이 피어올랐다. 남북의 정전 협정에 왜 남한의 태극기 대신 유엔기와 인공기만 있는지 말이다. 아무리 유엔군이 우리나라를 도와줬다고는 했지만, 판문점에서 태극기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공군도 북한을 도와 참전했는데 오성홍기는 없지 않은가.

이래서 한반도 문제가 '남북 간의 문제'가 아니라 '북미 간의 문제'라고 하는 것일까. 내 무지를 통탄한다. 아무리 음악을 전공해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고 해도 우리 근대사조차 모르는 나. '무식의 극치'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이러고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니...

'우리나라는 휴전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예고 없이 전쟁이 재발할 수 있다'는 말을 수 없이 들었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이 정전협정이 남북 간의 협정이 아니라 북미 간의 협정이었다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반도가 또다시 전쟁의 회오리 속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나라 잃은 설움마냥 왠지 모를 분함과 비참함이 내 마음을 짓누른다. 복잡하고 착잡한 심경으로 북쪽의 '판문각'에 올랐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에 남한의 '자유의 집'이 보인다. 가슴이 미어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이산가족이 돼 한평생을 살아온 남쪽과 북쪽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어떤 심정을 느꼈을지... 그들의 슬픔까지 내 마음에 들어와 더 착잡해진다.

눈앞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치 '땅따먹기' 놀이라도 하듯 줄을 그어 놓고, 제 땅에 들어오지 말라고 삼엄한 보초를 서고 있다. 그어 놓은 줄 너머 우리 아들들이 각기 다른 제복을 입고 경비를 서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 남녘에 보이는 한 건물에는 태극기가 펄럭인다. 내 마음은 지척에 계신, 보고 싶은 우리 엄마에게 달려간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 왕건릉에서 ⓒ 신은미

▲ 식당앞에 있는 선죽교 ⓒ 신은미


통일의 싹, 개성공단을 지나다

판문점을 떠나기 전,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가게 책임자의 어투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귀에 익숙한, 서울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경기도 억양이었다.

놋쇠로 만든 수저를 집어 들었다. 점원이 수저를 받아들고 계산대로 가져간다. 값을 치르고 나니 점원은 놋수저를 쇼핑백에 담으려 한다. 나는 필요 없다며 포장도 하지 않은 채 핸드백 속에 집어넣었다. 이를 본 기념품 가게의 나이가 지긋한 여성 책임자가 귀에 익숙한 말씨로 하는 말, "에이고, 종이 하나라도 아끼게 해 주려고..." 놀랐다. 어찌 그리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지.

개성시로 들어오는 길목에 고려의 역사를 연 왕건의 릉과 지금은 고려시대의 유물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 돼버린, 고려시대 학문의 요람이었던 성균관을 방문했다. 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묘도 들렀다. 모든 것이 내가 듣고 배운 것이라 다 알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또다시 해설원에게 들으려니... 판문점에서 목격했던 비극적인 장면과 어우러져 비애가 가슴에 깊게 다가온다.

수채화처럼 맑고 깨끗한 산수를 배경으로 하는 유적지는 가는 곳마다 한산하고 적막하다. 비극의 역사를 살고 있는 자손들의 슬픔을 함께 느끼고 있는 것처럼 쓸쓸한 공기가 차가운 서리가 돼 내 마음을 슬프게 한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가 암살됐다는 선죽교 바로 앞 식당에서 정갈하게 차려진 점심을 먹었다. 개성식 식단이란다. 오막조막한 그릇에 얌전하게 담겨진 반찬들이 마치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지금은 보기 힘들어진 놋그릇과 놋수저를 보니 제사상이 떠오른다. 준비한 사람의 정성이 가득 담긴 밥상이었다.

▲ 개성식 식단 ⓒ 신은미


"조선 사람은 김치찌개 먹어야 속이 풀립네다"

옆에 앉아 있던 설경이가 뭔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종업원 아가씨를 조용히 부른다.

"혹시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주문해도 되겠습네까? 집 떠난 지 오래 되다보니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김치찌개 생각이 간절해서 말입네다."
"물론 됩니다. 뭐니뭐니해도 조선 사람은 토장국(된장국)이나 김치찌개를 먹어야 속이 확 풀리지요. 금방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종업원 아가씨가 황급히 주방으로 달려간다. '김치찌개'라는 말에 나도 군침이 돈다. 눈치를 챈 설경이가 "김치찌개 드실 배를 조금 남겨 두세요"라며 애교섞인 미소를 짓는다.

식사를 하는 사람은 우리 일행뿐인데 여러 사람이 나와 우리 식사를 도와주고 있다. 한 종업원의 말씨에도 경기도 억양이 살짝 배어 있다. 친근하고 듣기 좋아 계속 말을 시켰더니 우리 의도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기꺼이 대화에 응한다.

정겨운 사람들과의 친근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개성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공원에 올랐다. 공원 한쪽에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다. 너무 사랑스러워 그곳에서 잠깐 쉬어 가자고 했다. 같이 사진을 찍고 싶어서다.

방해를 하지 않으려고 살짝 다가갔다. 하지만, 설명을 하고 계시던 선생님이 우리의 '무단 침입'을 반가이 맞아준다. 아이들에게 손님이 오셨으니 인사하란다. 아이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인사한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함께 온 학부형들이 먼저 카메라를 가져와 우리의 모습을 찍기 바쁘다.

아이들은 무슨 공연이라도 하러 왔나 보다. 여자아이들은 옅은 화장을 했다. 내 아이를 예쁘게 보이게끔 신경을 많이 쓴 엄마들의 솜씨임이 분명하다. 떠날 때, 우리 차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북한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는 사람처럼 판문점과 개성을 벗어나는 내 마음은 너무 슬프고 어두웠다. 차량은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바깥 경치도 풀이 죽어 보이는 듯하다. 설경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왼쪽으로 저 멀리 보이는 곳이 개성 공단입네다."

그 소리가 마치 캄캄한 방에 한 줄기 빛을 비추듯 내 마음에 소망의 빛줄기가 돼 스며든다. 저 개성공단이 통일의 씨앗이 돼 이 땅에 평화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 주길 바란다.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

어느새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벌써 내일 아침에 치러야 할 작별의 순간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엊그제 환영 만찬을 한 것 같은데, 오늘 환송 만찬을 '외교관 클럽'에서 연다고 하니 내 감정의 흐름 만큼이나 시간도 빨리 흐른 듯하다. 한창 외부수리를 하고 있는 식당의 어수선한 바깥 분위기가 꼭 내 마음처럼 느껴진다.

식당 안에 들어가니 서양식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치 서울의 한 레스토랑처럼 말이다. 우리 자리는 실내수영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 옆 테이블. 꽤 많은 외국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식당 이름이 '외교관 클럽'이니 아마 외교관들이지 않나 싶다.

바깥이 캄캄해 몰라봤는데, 실내로 들어와서 보니 만룡 안내원이 번들 번들 한 옷감의 셔츠를 입고 잔뜩 멋을 내고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설경이가 한마디 했다.

"만룡 동무, 오늘 의상이 그게 뭡네까. 꼭, 마술사처럼."
"이래뵈도 최고급 공단으로 만든 거야. 왜 기래?"
"흥, 공단도 공단 나름이지. 요 앞에 나가  마술 묘기나 하면 딱..."

결국 남편과 나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바탕 웃었다. 조금 촌스러워 보이긴 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지난 열흘간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추억을 짚다 보니 배를 움켜쥐고 웃느라 식사 시간 내내 허리를 펴지 못했다.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하면서 가끔 미소를 지을 것이다.

▲ 개성시 기와집 동네 ⓒ 신은미


공항 가는 길... 누구도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공항으로 가는 길이 온통 회색빛이다. 처음 이곳에 닿았을 때 봤던 회색빛과는 다른 회색빛이다. 정든 사람들을 두고 가야 하니 슬픔이 눈앞을 가려 세상이 다 회색으로 느껴진다. 이미 텅 비어버린 내 호기심 보따리에 앞으로 무엇을 채워야 할지 마음이 착잡하다.

애초에 별로 내키지 않았던 북한여행. 나는 '과연 북한사람들은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라는 호기심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그런 호기심마저 없었더라면 아마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이질감은커녕 '이들은 어쩌면 이렇게 우리와 똑같을까'라는 동질감을 안고 이곳을 떠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내 삶과 직접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유적지를 방문할 때도,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눌 때도... 곱씹다 보니 슬픔이 배가된다.

여행하면서 비춰진 북녘 동포들의 가난함, 동시에 그들에게서 품어 나오는 아름다운 인간성과 동포애가 한데 어우러져 내 가슴에 파고든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그 누구도 말이 없다. 아무 말이나 빵빵 터트리는 남편도 말이 없다. 자동차 달리는 소리만이 온몸에 진동으로 와 닿는다. 그 누구라도 작별의 말을 꺼내면 슬픔이 울컥 폭발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때 남편이 애써 입을 연다.

"설경아, 다음에 오면 네 남편될 사람과 꼭 함께 만나자."

설경이는 말없이 미소지으며 눈물을 글썽인 채 얼굴을 돌린다.

숨 막히는 슬픔을 모면하기 위해 우리는 말 없는 포옹으로 마음을 전하고 재빨리 출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세 사람은 저 멀리서 떠나지 않고 손을 흔들고 있다. 달나라보다도 더 생소했던 저편에는 우리의 딸과 건실하고 다정다감한 옆집 애기 아빠, 그리고 순박한 동네 아저씨가 다시 만날 날을 희망하고 있다. 우리 부부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손을 흔든다.

"또 올게."

이 말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기약이 없는 이별이라는 것을...

북한 입국 때 맡겨놓은 휴대전화를 찾고 자리에 앉았다. 창밖, 활주로에 덩그러니 서 있는 고려항공 비행기를 쳐다보니 왠지 모를 연민이 솟구친다. 슬픈 마음을 누를 길이 없다. 남편도 계속 눈물을 글썽인다.

▲ 북한의 고려항공기 ⓒ 신은미


'독립' 외치던 한 핏줄 선열들은 무슨 말을 할까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적막함을 가득 안고 구름 속을 배회한다. 내 마음 역시 잘못 달아놓은 연줄처럼 머리 위 허공을 이리저리 배회한다.

분단이 고질적인 운명이 돼 속수무책으로 흘러온 '무감각의 지난 세월'!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한 맺힌 슬픔이 시퍼런 멍 망울이 돼버린 채, 꺼져가는 무심한 숯덩이처럼 우리 역사의 한편에 놓여 있다. 우리의 자손들은 내 형제가, 내 자매가, 내 이웃이, 내 민족이 누구인지, 누구였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맹렬하게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면서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비극적인 운명을 후손들에게 남겨주게 될 것인가. 어리석은 우리 세대의 그릇된 판단과 이기적인 아집으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채, 한 많은 세상을 살면서 말이다.

지난 시절,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채 '대한 독립'을 피 흘리며 외치던 우리 선열들은 지금의 배부른 졸장부인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까. 용광로처럼 뜨거워진 내 마음은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이내 차가운 얼음덩이처럼 서늘해진다.
     
우리의 크나큰 편견과 오만함이 훗날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굴욕의 역사가 돼 갚지 못할 부채가 되지는 않을까. '희망이 없다'고 외치는 우리 자녀들에게 최소한 우리가 저질러 놓은 조국 분단의 빚만이라도 해결해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남과 북의 곪을 대로 곪아버린 염증을 터트리고, 푹 패인 상처를 꿰매 건강하고 싱그러운 새살이 돋아나도록 소망의 묘약을 다시 한 번 발라야 한다. 분열과 미움이 화합과 사랑으로 어우러져 새 소망과 새 빛을 발휘하는 통일 조국의 가슴 벅찬 청사진을 생각 없이 살아온 내 삶의 부끄러운 반성문과 함께 조심스레 그려 본다.  

나는 진정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았을까. 내 이웃은, 내 형제는, 내 민족은 다름 아닌 바로 설경이고, 만룡 안내원이며, 리인덕 운전기사 아저씨인 것을... 먼 길을 돌고 돌아서야 만날 수 있었던 사랑하는 이들,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들이 바로 내 그리운 반쪽 나라, 내 민족, 내 선한 이웃이었다. 회개하는 심정으로 창밖 하늘을 바라본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다.
덧붙이는 글 2011년 10월의 여행기는 이번 회로 끝납니다. 곧 2012년 4월의 북한여행기가 연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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