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도 죽어야 교과서에 실릴 수 있다?
도종환 시 논란... 교육과정평가원 '정치적 중립성' 훼손 드러나
▲ 민주통합당 도종환 의원이 지난 9일 오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교과서 시(詩) 삭제 논란과 관련해 자유발언을 한 후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교과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도종환 민주통합당 의원의 작품을 뺄 것을 출판사에 권고해 논란이 됐다. ⓒ 연합뉴스
도종환 의원은 시를 쓰는 국어 선생님이었다. 이제는 교사가 아닌 국회의원이 됐지만 그는 여전히 '시인'이다. 그가 쓴 시와 산문의 교과서 수록 여부를 두고 일었던 파문이 많은 논란과 문제점들을 남긴 채 진정되는 듯 보인다.
논란의 시작은 그가 '국회의원', 그러니까 정치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시인이었으면 별 문제 없었을 시가 '정치적' 혐의를 입은 것이다. 그가 시로 민족과 조국을 헐값에 판 칠일(문학)을 한 것도, 독재 정권에 부역하며 시로써 곡학아세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처음 문제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성태제 원장, 아래 평가원)이 '정치적 중립성' 등을 운운하며 교과서 발행 출판사들을 상대로 도종환 의원의 작품을 뺄 것을 사실상 '명령'(권고라는 형식일 빌림)함으로써 발생했다. 교과서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면서 평가원 스스로 '정치적으로 편향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왜 그랬을까.
저작권법 제 25조를 먼저 살펴보자.
"고등학교 및 이에 준하는 학교 이하의 학교의 교육 목적상 필요한 교과용 도서에는 공표된 저작물을 게재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교과서를 만드는 집필진이나 출판사들은 공표된 저작물의 주인에게 동의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교과서에 실을 수 있다. 물론 수록했던 작품이나 글을 빼는 것도 마찬가지다. 저작권자의 동의나 허락 없이도 교과서에 실을 수 있다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법대로 하면 도종환 의원의 글을 싣거나 빼거나 하는 게 전적으로 교과서 집필진이나 출판사의 마음대로라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평가원의 권고 형식을 빌린 명령 조치로 한 순간에 도종환 의원의 글이 수록된 모든 교과서에서 그의 작품이 날아갈 뻔했다. 이는 현재 초중등학교 교과용도서(교과서+지도서) 발행 체제를 살펴보면 이해가 좀 더 쉬워진다.
도종환 시 논란 '검정도서', 진짜 문제...
우리나라의 교과용도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교과부가 저작권을 가진 '국정도서', 교과부장관의 검정을 받은 '검정도서', 국정도서나 검정도서가 없는 경우 또는 이를 사용하기 곤란하거나 보충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사용하기 위하여 교과부장관의 인정을 받은 '인정도서'가 그것이다.
얼핏 보면 다양한 듯보이지만 세 가지 모두 교과부장관의 승인이 없이는 교과용도서로 채택될 수 없다.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교과부장관의 승인이 없으면 폐기 처분이라는 말이다. 국정도서가 있는 교과의 경우 교과부에서 만드는(위탁하기도 함) 국정도서 사용이 원칙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여러 출판사에서 만든 동일한 교과목의 다양한 교과용도서를 교과부가 승인하면 해당 학교에서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검·인정도서이다.
이번에 논란이 된 것이 바로 이 검정도서들이다. 그러니 교과부나 검정업무를 맡는 평가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검·인정도서 출판사에 그들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교과서 제작 단계에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이렇게 무너지고 만다.
이는 국가가 교육과정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인데 사실상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과정이 집권 세력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교육과정의 방향과 지침을 마련하고 이에 맞추어 교과용도서를 제작하는 상황이다. 이런 탓에 평가원이 그토록 주장했던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처음부터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란 특정 정치 권력이나 세력 등이 교육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데 이 역시 빛이 바랜 지 오래다.
교과용 도서가 검정이든 인정이든 사실은 국정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교과부장관의 승인이 없이는 통용될 길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이번 평가원의 행태는 그들 스스로 교육과정을 통제·지시하며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고백하고만 꼴이 돼 버렸다.
더욱이 평가원이 스스로 내놓은 '초·중등학교 검정 교과용도서 편찬상의 유의점 및 검정기준(2011. 8)'을 살펴보면 각각,
"'문학' 영역에서는 문학의 다양한 특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관점과 방법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며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내용을 선정한다. "(중학교 '국어' 편찬상의 유의점)
"교육과정에 제시된 '세부 내용'의 교수·학습에 필요한 내용을 선정하되, 특정 주제, 갈래, 시대, 지역, 작가에 편중되지 않도록 균형 있게 선정한다."(고등학교 '문학' 편찬상의 유의점)
라고 밝혀 놓고 있다.
평가원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위해"... 옹색하다
▲ 9일 발표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보도 설명자료. 교과서 심사 원칙이 나와 있다. ⓒ 윤근혁
위 두 가지 어느 기준에도 도종환 의원의 시나 산문이 배제돼야 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문학작품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특정한 것에 편중되지 않는 균형감을 갖추기 위해서라면 도종환 의원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다양한 작가와 작품들이 교과서에 들어가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여기에 보태어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유지를 위해 현존 인물(현역 정치인 포함)에 대한 내용 제외"라는 기괴한 명분을 내세우는 옹색함은 안쓰러움을 넘어 무섭기까지 하다.
▲ 가수 서태지 ⓒ 서태지닷컴
살아있는 문화대통령 가수 서태지씨 이야기가 미국의 교과서에는 수록될 수 있어도 우리 교과서에는 실릴 수 없다는 말 아닌가. 적어도 그가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계 최고의 노인국가를 예비하고 있는 나라에서 건강히 살아있는 게 죄가 되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면 죽어야 한다는 이런 우격다짐이 또 어디에 있을까.
결국 이번 논란은 평가원(사실상 교과부)이 자신들의 정치적 편향성을 교과용도서에 반영하고자 검정도서 시스템을 이용해 출판사들을 쥐고 흔들며 '정치적 중립성'을 스스로 훼손함으로써 사달이 난 것이다. 제가 친 그물에 스스로 걸린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런 위험한 놀이 때문에 상처를 받는 건 학교 현장의 교사와 학생들일 수밖에 없다. 부디 상식적인 생각으로 정책이나 제도를 집행해 주기를 그래서 더 이상 이런 논란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끝으로 한 가지만 묻자. 지난달 26일, 평가원이 교과부의 협조 아래 주관한 2012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일제고사) 고2 국어 시험에 소설가 채만식의 '태평천하'가 지문으로 출제되었다. 채만식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무려 6쪽에 걸쳐 친일 행적이 기록돼 있는 친일(파)작가이다.
하고 많은 작가들 가운데 이런 친일(파)작가의 작품을 학생들에게 제시하고 문제를 풀도록 한 것은 친일(파) 행적 미화 의도가 담긴 것으로 이러한 행위야말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한 것이라 말한다면 평가원(교과부)에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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