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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층에서 날고 싶었는데 그림 때문에 참았지"

김기종 화백 , 갈대와 장미로 표현되는 그의 심상

등록|2012.07.13 15:44 수정|2012.07.16 11:48

▲ 김기종 화백 ⓒ 이민선


백발의 화가와 갈대. 어쩌면 이렇게 그림과 화가가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화가는 반바지에 민소매 티셔츠 차림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그가 그리는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였다. 김기종(64) 화백의 첫 인상이다. 작년 6월에 처음 만났으니 벌써 1년 전 일이다.

경황이 없던 터라 의례적인 인사만 나눈 채 악수도 없이 그의 화실을 빠져 나왔다. 그의 화실이 있는 건물 5층으로 사무실을 옮기던 날이었다. 그 후 우린 거의 눈인사만 나누며 지냈다. 그의 화실은 3층, 내 사무실은 5층인지라 오며 가며 가끔 마주쳤지만 뭐가 그리 바빴는지 차 한 잔 나눌 시간도 만들지 못했다.

그의 화실을 지날 때 마다, 눈인사를 나눌 때마다 그가 그린 갈대에 대한 궁금증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갈대만 그릴까, 자기 모습과 꼭 닮은 대상물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을까? 지난 9일 오전, 그의 화실 문을 두드렸다.

김 화백은 1년 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반바지에 민소매 티셔츠, 그리고 백발. 차림새는 같았지만 한 쪽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그림은 달랐다. 갈대는 딱 한 점만 남아 있고 피처럼 붉은 장미만 벽면에 가득했다. 넉살좋게 차 한 잔 얻어 마시러 왔다고 하니 "커피 어때?" 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싱크대 쪽으로 걸어갔다. 

"갈대는 다 어디로 갔어요?"
"아~ 이젠 장미로 바꿨어, 그동안 갈대는 많이 그렸으니까."
"선생님과 잘 어울렸는데, 좀 서운한데요."

갈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문을 두드렸는데 엉뚱하게도 갈대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먼저 묻게 됐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릴 만큼 그려서 이젠 장미로 바꿨단다. 그동안 왜 그토록 갈대에 집착했는지 물었다. 

"2008년에 하던 사업 다 접고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섰을 때부터 그렸어. 이젠 프로가 됐으니까 주제가 있어야 되겠고. 갈대가 내 신세하고 딱 맞더라고, 내 머리카락이 이렇게 하얀지도 그때 알았어.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왔지. 내가 사업을 할지도 몰랐고, 육십이 넘어서 그림을 그리며 살 줄도 몰랐어. 갈대! 사람들이 참 좋아했어, 아마 자기 인생하고 비슷해서 그랬을 거야."

그림 그리며 갱년기 우울증 이겨내

▲ 바람 ⓒ 김기종


김 화백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갈 때까지 그림과 무관한 인생을 살았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첫 직장은 학교였다. 그가 그림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직장에 들어간 이후부터다.

"그림 언제부터 그렸냐고? 학교 졸업하고 시골 중학교에서 기술 선생하고 있을 때지. 아~미술 선생 따라다니면서 그림 그리는데 그렇게 재미있는 거야. 내 몸속에 기질이 있었나봐. 애들 가르치는 건 사실 나하고 맞지 않았어. 그래서 4년 만에 그만 두고 그림과 관계있는 도자기 회사 디자인실로 들어갔어. 그래서 사업도 하게 된 거고."

하고 싶던 일이 직업이 되자 그야말로 만사가 형통했다. 일이 재미있다 보니 한 눈 안 팔고 열심히 할 수 있었고, 그 만큼 성취도 있었다. 그러다가 1996년에 자신이 몸  담고 있던 회사를 인수해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돼, 그래야 잘 할 수 있어. 회사 인수하고 IMF 터졌는데 난 그 때 떼돈을 벌었어. 주로 수출을 하고 있었는데 환율이 올랐던 거지.  그러고 보면 운도 중요해. 그 뒤로는 사업가로 승승장구 했지. 그런데 쉰 살이 넘으면서부터, 사업도 안정되고 하니까 뭔가 허전해지더라고. 내가 왜 사나 자꾸 생각하게 되고. 갱년기 우울증이 온 거지, 그때 내 눈에 띈 게 그림이야."

이렇게 해서 그는 쉰 살 무렵에 다시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된다. 취미로 짬짬이 그림을 그리는 수준을 넘어, 화실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세미프로' 단계로 접어들었던 것. 

"회사가 안산이고, 집이 안양이니까, 출퇴근 하려면 물왕저수지를 지나야 하는데, 저수지 근처에 있는 갤러리 카페가 자꾸 눈에 들어오더라고. 한번 들어가 봤지, 주인이 그림 그리면서 호구지책으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어. 그래서 나도 그림 그린다고 얘기를 했더니 아주 반가워하더라고. 그 뒤로 거기 들락날락 하다가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 친해졌고 그러다가 아예 그 근처에 화실을 하나 내 버렸어. 2년 뒤에는 아예 집에다가 화실을 꾸몄고."

김 화백은 이렇게 그림을 그리며 갱년기 우울증을 이겨냈다. 비록 프로는 아니었지만 어찌 보면 이 시기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였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을 비롯한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탄 것도 이때고, 한국환경미술대전과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한 것도 이 시기다.

날고 싶은 나를 잡아준 건 그림

▲ 장미 ⓒ 김기종


그림을 그리며 갱년기 우울증은 이겨냈지만 사업은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하는 일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2008년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 그래서 접었지. 사업 정리하면서 날고 싶기도 했어. 더 추락하기 전에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정리하고 싶었지. 사업도 할 만큼 해봤고, 마누라는 나 없어도 먹고살 것 같고. 이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날고 싶더라고, 그 때 내 화실이 26층에 있었어, 거기서 날아서 하늘로 가고 싶었지."

이때 그를 잡아준 건 그림이었다.

"그런데 내가 못한 게 하나 있더라고, 바로 그림이야 그림을 마무리 짓지 못했어. 그래서 참았지. 그래서 여기에 화실 차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거야, 전업 화가가 돼서 갈대를 그리기 시작한 거지. 이제 내가 왜 그토록 갈대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지? 갈대가 우리 인생이잖아."

갈대 그림의 제목은 '갈대'가 아니고 '바람'이다. 김 화백은 갈대 그 자체에 주목한 게 아니라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에 주목했다. 갈대가 김 화백 자신이고 갈대를 흔들고 있는 바람은 그가 육십사 년을 살아오면서 겪어온 '세파'다.

"근데 왜 이젠 장미냐고? 갈대는 그릴 만큼 그렸잖아. 갈대 끝내고 나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때 옛 친구를 찾아 갔는데, 아 그놈이 큰 화면에 여자 입술 하나만 달랑 그렸는데 그렇게 섹시하게 보이는 거야. 그거 보고 장미 그리기 시작한 거지.

요즘 그림은 단순 명료해야 돼. 관조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 별로 없거든. 단순 명료하고 화려하고 섹시하지 않아? 이거 굉장한 노하우가 있는 그림이야, 밑그림 스케치 한 다음 다섯 번 이상 그리고 일곱 번 정도 색 입힌 거야. 굉장히 힘들어.

이게 지금 보면 그냥 장미 하나만 보이잖아, 나중에 보면 딴 그림도 보일 거야, 누드가 보일 수도 있고 죽은 작가 그림이 보일 수도 있고, 말하자면 이중 스크린이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그림을 그리려고."

하얗게 센 김 화백 머리카락과 갈대가 잘 어울리는 것처럼 피처럼 붉은 장미는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과 잘 어울렸다. 그림은 자기 심상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표현 하는 것이라. 김 화백은 말한다. 그렇다면 장미로 표현되는 그의 마음은 무엇일까?

김 화백은 아직 장미를 세상에 내놓을 마음이 없다.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독특함과 강렬함이 배어 있어, 어디다 걸어도 당당 할 때쯤 세상에 내 놓을 것이라 한다. 장미로 표현되는 그의 마음은 그가 장미를 완성해 세상에 내놓을 때쯤 알 수 있을 듯하다.
덧붙이는 글 안양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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