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바꿨을 뿐인데 큰 상을 타더라고요"
[임승수의 인생 내비게이션⑪]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내비게이션을 따라 차를 몰고 가다가 애먼 곳에 도착한 일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모두 함께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미래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한 인생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애먼 곳으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기자 말>
최근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라는 제목의 책이 대형서점의 판매순위에서 종합 1위에 오를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스튜어트 다이아몬드라는 사람이 쓴 책인데 '13년 연속 와튼스쿨 최고 인기 강의'라는 부제를 달아서 눈길을 끕니다.
아마도 하버드 명강의라는 콘셉트로 열풍을 몰고 온 <정의란 무엇인가>를 벤치마킹한 마케팅 전략이지 않나 싶네요. 이 책의 영어 원제목은 <Getting More>인데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라는 한글 제목 또한 기가 막히게 뽑았습니다. 출판사가 참 센스 있군요. 명문학교의 명강의에다가 눈길을 확 잡아끄는 매력적인 제목, 이래저래 판매대박의 퍼즐들이 맞춰진 책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저자에 대한 소개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STUART DIAMOND는 와튼스쿨 MBA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다. '뉴욕타임스' 기자로 일할 당시 퓰리처상을 받으며 승승장구했지만, 곧 변호사와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협상 전문가로 더 큰 명성을 얻었다.
JP모건 체이스, IBM,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 100대 기업 중 절반이 그에게 컨설팅을 받았으며,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UN 같은 국제기구도 그에게 자문을 구한다. 하버드, 컬럼비아, 옥스퍼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는 현재 모교인 와튼스쿨에서 협상 코스를 강의하고 있다. 그의 협상 코스는 와튼스쿨에서 13년 연속 최고 인기 강의로 선정되었으며, 학생들이 경쟁을 통해 들을 정도로 명성이 높다."
음... 역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군요. 마침 집 근처의 금천구립도서관에 이 책이 있기에 여기저기 들춰보다가 결국 대출하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이나 실용서 분야의 책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책의 목차를 훑어보다가 제 눈동자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 있습니다. 바로 '역지사지의 마음'이라고 적혀있는 부분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편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는 잘 알려진 한자성어입니다. 스튜어트 다이아몬드씨의 책을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저 역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철저하게 '역지사지'했던 기억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됐습니다. 사실 저 역시 누군가 저에게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망설임 없이 '역지사지'하라는 얘기를 해줬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제 삶을 돌이켜보면 상복이 없는 편은 아닌데, 그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상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2008년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 사업'에서 저와 이유리씨가 함께 쓴 책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책이 선정된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1988년에 제물포예술제에서 중등부 작곡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던 일입니다.
이 두 상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상금이 많다든지 의미가 있는 상이어서가 아닙니다. 제가 철저하게 '역지사지'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낸 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어떻게 '역지사지'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두 상의 사례를 통해 그 디테일을 공개하겠습니다.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2008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 사업'에 선정돼 1,0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았는데, 당시 저는 그 사업을 위해 제안서를 작성했습니다. 7편을 뽑는데 115편의 원고가 지원하는 바람에 경쟁이 치열했는데요. 어차피 우수저작을 선정하는 것은 심사위원의 몫이기 때문에 제안서를 통해 내 원고가 심사위원들이 찾는 바로 그 원고라는 점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저는 사업 공고 내용에서 심사위원들이 찾는 원고에 대해 몇 가지 단서를 발견했죠.
우선 지원 대상 및 신청 자격 부문에서 '신인저자 우대'라고 명시한 부분에 주목했습니다. 당시 저는 이미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지만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을 함께 쓴 이유리씨는 첫 책이었습니다. 저는 제안서 양식의 저자소개에 이유리가 신인저자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명시했습니다.
이유리
서강대 사학과 졸업 / 경인일보 문화체육부 기자
저서) 없음
저서가 없다고 일부러 명시하는 것이 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원하는 것을 얻을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자! '역지사지' 신공을 사용해보죠. 115편의 원고가 제안서와 함께 심사위원 앞에 놓여 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일일이 저자들의 제안서를 보고 신상명세를 조사해 신인인지 아닌지 파악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몇 명 안 되는 심사위원이 115명의 호구조사를 하고 있을 시간은 없겠죠? 원고 읽기도 바쁠 텐데요. 본인이 직접 신인저자라고 밝히지 않는 이상 심사위원 측에서는 신인저자인지 아닌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아직 저서가 없는 신인이라는 사실을 제안서에 명시하면 분명 이득이 됩니다. 그런데 아마도 추측컨대 많은 신인저자들이 제가 쓴 제안서처럼 저자 소개란에 '저서 없음'이라고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리 쓰기에는 좀 어색하고 민망하니까요.
사업 제안서에는 저자 소개란 외에도 '원고 특징 및 차별성'을 쓰는 공간이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공간에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의 원고가 가진 특징과 차별성을 쓰라는 얘기인데, 제가 '역지사지' 신공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마 다음과 같이 밋밋하게 작성을 했을 겁니다.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이라는 책의 주제에 맞게 26편의 예술작품을 선정했고 두 명의 저자가 13편씩 나눠서 집필했다. 목차는 예술작품이 탄생한 연도순으로 배열했는데 각 글에는 저자의 단상을 담은 인테르메조(간주곡)가 들어간다.....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저는 '원고 특징 및 차별성'을 작성할 때도 철저하게 '역지사지' 신공을 사용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상금 1000만 원을 바라며 지원할 텐데... 단편소설도 아니고 모든 원고가 책 한 권 분량이니, 소수의 심사위원이 단시일에 책 한 권 분량의 수많은 원고를 다 읽고 당선작을 선정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렇다면 자신들이 일차적으로 당선작의 두 배 내지 세 배 수로 후보작들을 추릴 때 제안서에 나온 원고 특징 및 차별성을 읽으면서 원고의 일부만을 발췌해서 읽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 틀림없어. 그렇다면 원고 특징 및 차별성을 쓰는 것이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얘긴데....'
'역지사지' 신공을 통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원고 특징 및 차별성을 쓰는 부분에 제가 쓰고 싶은 내용을 쓸 것이 아니라 심사위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알고 싶은 내용을 써야 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업 공고에 나온 심사 기준을 다시 자세히 보았습니다.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습니다.
5. 심사 기준
o 원고의 우수성, 기획의 독창성 및 시장성 등
o 기타 저자 약력, 시의성 등을 유연성 있게 적용
요컨대 심사위원들은 우수한 원고, 기획이 독창적인 원고, 시장성이 있는 원고 등을 고려해서 당선작을 선정하겠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원고 특징 및 차별성을 쓴 곳에 무엇을 써야 하는지 확실했습니다. 단순히 원고의 내용을 요약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원고가 매우 우수하고 기획이 독창적이며 시장성이 있다는 것을 써야 하는 것이지요. 분명 심사위원이 채점하는 항목에는 분명 원고의 우수성, 기획의 독창성, 시장성 등이 따로 명시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래와 같이 제안서를 작성했습니다.
- 대중이 좋아하는 미술이나 음악 등의 예술작품을 매개로 그 이면에 존재하는 사회사를 끄집어내 서술하는 방식을 취했다.
- 공저를 통한 역할분담으로 미술, 음악 등의 다양한 예술작품을 다룸으로써 소재의 다양성과 참신성을 구현했다.
-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인문, 사회 및 정치에 관심이 있는 독자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 <오마이뉴스>에 2008년 5월부터 9월까지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제가 쓴 내용을 원고의 우수성, 기획의 독창성 그리고 시장성으로 나눠 분석해 보겠습니다.
원고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부분
- <오마이뉴스>에 2008년 5월부터 9월까지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어 많은 인기를 얻었다.
기획의 독창성을 주장하는 부분
- 대중이 좋아하는 미술이나 음악 등의 예술작품을 매개로 그 이면에 존재하는 사회사를 끄집어내 서술하는 방식을 취했다.
- 공저를 통한 역할분담으로 미술, 음악 등의 다양한 예술작품을 다룸으로써 소재의 다양성과 참신성을 구현했다.
시장성을 주장하는 부분
-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인문, 사회 및 정치에 관심이 있는 독자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물론 제안서의 '원고 특징 및 차별성' 항목을 잘 쓴다고 해서 원고가 최종 당선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심사위원들의 최종 선택을 받으려면 원고 자체가 힘이 있어야 압니다. 하지만 '역지사지'를 통해 제안서를 심사위원들의 입장에서 작성하지 않았다면 첫 번째 관문에서 아쉽게 탈락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첫 번째 관문에서 원고를 전부 읽지는 않을 테니까요.
원고에 대한 믿음, 거기다가 제안서를 심사위원 입장에서 잘 썼다는 확신이 더해져 나름 당선을 기대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공저자인 이유리씨는 그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요. 당시 정식으로 당선작 공고가 나기 전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측에서 미리 언론사로 당선자 명단을 공문으로 보냈는데, 문화부 기자였던 이유리씨가 언론사로 날아온 공문을 확인하고 기쁨에 들떠 저에게 바로 전화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때 저는 의기양양하게 다음과 같이 답했죠. "거봐요. 내가 당선될 거라고 했죠?"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의 경우처럼 당선에 대한 확신을 가진 또 한 번의 사건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1988년 제물포예술제에서 작곡 부문 대상을 받았던 사건입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저를 포함한 두 명이 선발돼서 작곡대회에 나가게 됐습니다. 이때도 역시 '역지사지' 신공이 대상을 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요.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작곡 대회가 열리는 장소에 들어가고 곧 대회가 시작됐습니다. 참가한 중학생들에게는 현장에서 바로 '뱃노래'라는 시가 주어졌는데요. 이 시에 맞춰서 피아노 반주가 딸린 노래를 만드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주어진 시간에 노래를 완성해 현장에서 바로 제출해야 하는 꽤 빡빡한 과제였는데요. 저는 이때도 '역지사지' 신공을 사용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이죠.
'도대체 심사위원들이 왜 뱃노래라는 시를 제시했을까? 시의 내용을 보니 이탈리아 베니스의 뱃놀이는 아니고 우리나라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내용이군. 그렇다면 서양음계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5음계 궁상각치우(서양음계의 도레미솔라에 해당)를 사용해야겠구나. 그리고 뱃노래니까 뱃사공들이 파도를 타고, 때로는 파도를 거슬러 넘실넘실 노를 저어가는 모습을 멜로디 라인으로 형상화시킬 필요가 있겠군. 그리고 피아노 반주에서는 우리 전통 장단 느낌을 살릴 필요가 있겠어. 딴~다단딴따, 이런 식으로 말이야.'
'역지사지' 신공을 이용하자 작곡 대회 심사위원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16마디의 멜로디를 쓰고 피아노 반주를 만들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는 과연 어떤 곡인지 궁금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뱃노래의 가사와 피아노 반주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멜로디만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아래의 악보가 바로 제가 당시 작곡한 곡의 멜로디입니다. 음악에 조예가 있는 분들은 멜로디에 제가 의도한 내용이 정확하게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대회장에 함께 오셨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가 "아마 대상 탈거예요"라고 자신있게 말씀을 드려서 어머니께서 무척 당황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앞서 얘기한 것처럼 제 예측대로 대상을 탔지요. 제가 확신을 한 것은 물론 곡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심사위원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것에 부응했다는 판단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역지사지' 신공을 사용하는 중학생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무척 당돌하고 무서운 중학교 2학년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원하는 것을 얻고 싶으신가요? 바로 '역지사지' 신공을 사용하세요!
▲ 베스트셀러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표지 ⓒ 세계사출판사
아마도 하버드 명강의라는 콘셉트로 열풍을 몰고 온 <정의란 무엇인가>를 벤치마킹한 마케팅 전략이지 않나 싶네요. 이 책의 영어 원제목은 <Getting More>인데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라는 한글 제목 또한 기가 막히게 뽑았습니다. 출판사가 참 센스 있군요. 명문학교의 명강의에다가 눈길을 확 잡아끄는 매력적인 제목, 이래저래 판매대박의 퍼즐들이 맞춰진 책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저자에 대한 소개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STUART DIAMOND는 와튼스쿨 MBA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다. '뉴욕타임스' 기자로 일할 당시 퓰리처상을 받으며 승승장구했지만, 곧 변호사와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협상 전문가로 더 큰 명성을 얻었다.
JP모건 체이스, IBM,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 100대 기업 중 절반이 그에게 컨설팅을 받았으며,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UN 같은 국제기구도 그에게 자문을 구한다. 하버드, 컬럼비아, 옥스퍼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는 현재 모교인 와튼스쿨에서 협상 코스를 강의하고 있다. 그의 협상 코스는 와튼스쿨에서 13년 연속 최고 인기 강의로 선정되었으며, 학생들이 경쟁을 통해 들을 정도로 명성이 높다."
음... 역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군요. 마침 집 근처의 금천구립도서관에 이 책이 있기에 여기저기 들춰보다가 결국 대출하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이나 실용서 분야의 책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책의 목차를 훑어보다가 제 눈동자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 있습니다. 바로 '역지사지의 마음'이라고 적혀있는 부분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편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는 잘 알려진 한자성어입니다. 스튜어트 다이아몬드씨의 책을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저 역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철저하게 '역지사지'했던 기억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됐습니다. 사실 저 역시 누군가 저에게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망설임 없이 '역지사지'하라는 얘기를 해줬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제 삶을 돌이켜보면 상복이 없는 편은 아닌데, 그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상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2008년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 사업'에서 저와 이유리씨가 함께 쓴 책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책이 선정된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1988년에 제물포예술제에서 중등부 작곡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던 일입니다.
이 두 상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상금이 많다든지 의미가 있는 상이어서가 아닙니다. 제가 철저하게 '역지사지'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낸 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어떻게 '역지사지'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두 상의 사례를 통해 그 디테일을 공개하겠습니다.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2008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 사업'에 선정돼 1,0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았는데, 당시 저는 그 사업을 위해 제안서를 작성했습니다. 7편을 뽑는데 115편의 원고가 지원하는 바람에 경쟁이 치열했는데요. 어차피 우수저작을 선정하는 것은 심사위원의 몫이기 때문에 제안서를 통해 내 원고가 심사위원들이 찾는 바로 그 원고라는 점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저는 사업 공고 내용에서 심사위원들이 찾는 원고에 대해 몇 가지 단서를 발견했죠.
우선 지원 대상 및 신청 자격 부문에서 '신인저자 우대'라고 명시한 부분에 주목했습니다. 당시 저는 이미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지만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을 함께 쓴 이유리씨는 첫 책이었습니다. 저는 제안서 양식의 저자소개에 이유리가 신인저자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명시했습니다.
이유리
서강대 사학과 졸업 / 경인일보 문화체육부 기자
저서) 없음
저서가 없다고 일부러 명시하는 것이 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원하는 것을 얻을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자! '역지사지' 신공을 사용해보죠. 115편의 원고가 제안서와 함께 심사위원 앞에 놓여 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일일이 저자들의 제안서를 보고 신상명세를 조사해 신인인지 아닌지 파악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몇 명 안 되는 심사위원이 115명의 호구조사를 하고 있을 시간은 없겠죠? 원고 읽기도 바쁠 텐데요. 본인이 직접 신인저자라고 밝히지 않는 이상 심사위원 측에서는 신인저자인지 아닌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아직 저서가 없는 신인이라는 사실을 제안서에 명시하면 분명 이득이 됩니다. 그런데 아마도 추측컨대 많은 신인저자들이 제가 쓴 제안서처럼 저자 소개란에 '저서 없음'이라고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리 쓰기에는 좀 어색하고 민망하니까요.
사업 제안서에는 저자 소개란 외에도 '원고 특징 및 차별성'을 쓰는 공간이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공간에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의 원고가 가진 특징과 차별성을 쓰라는 얘기인데, 제가 '역지사지' 신공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마 다음과 같이 밋밋하게 작성을 했을 겁니다.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이라는 책의 주제에 맞게 26편의 예술작품을 선정했고 두 명의 저자가 13편씩 나눠서 집필했다. 목차는 예술작품이 탄생한 연도순으로 배열했는데 각 글에는 저자의 단상을 담은 인테르메조(간주곡)가 들어간다.....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저는 '원고 특징 및 차별성'을 작성할 때도 철저하게 '역지사지' 신공을 사용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상금 1000만 원을 바라며 지원할 텐데... 단편소설도 아니고 모든 원고가 책 한 권 분량이니, 소수의 심사위원이 단시일에 책 한 권 분량의 수많은 원고를 다 읽고 당선작을 선정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렇다면 자신들이 일차적으로 당선작의 두 배 내지 세 배 수로 후보작들을 추릴 때 제안서에 나온 원고 특징 및 차별성을 읽으면서 원고의 일부만을 발췌해서 읽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 틀림없어. 그렇다면 원고 특징 및 차별성을 쓰는 것이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얘긴데....'
'역지사지' 신공을 통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원고 특징 및 차별성을 쓰는 부분에 제가 쓰고 싶은 내용을 쓸 것이 아니라 심사위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알고 싶은 내용을 써야 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업 공고에 나온 심사 기준을 다시 자세히 보았습니다.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습니다.
5. 심사 기준
o 원고의 우수성, 기획의 독창성 및 시장성 등
o 기타 저자 약력, 시의성 등을 유연성 있게 적용
요컨대 심사위원들은 우수한 원고, 기획이 독창적인 원고, 시장성이 있는 원고 등을 고려해서 당선작을 선정하겠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원고 특징 및 차별성을 쓴 곳에 무엇을 써야 하는지 확실했습니다. 단순히 원고의 내용을 요약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원고가 매우 우수하고 기획이 독창적이며 시장성이 있다는 것을 써야 하는 것이지요. 분명 심사위원이 채점하는 항목에는 분명 원고의 우수성, 기획의 독창성, 시장성 등이 따로 명시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래와 같이 제안서를 작성했습니다.
- 대중이 좋아하는 미술이나 음악 등의 예술작품을 매개로 그 이면에 존재하는 사회사를 끄집어내 서술하는 방식을 취했다.
- 공저를 통한 역할분담으로 미술, 음악 등의 다양한 예술작품을 다룸으로써 소재의 다양성과 참신성을 구현했다.
-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인문, 사회 및 정치에 관심이 있는 독자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 <오마이뉴스>에 2008년 5월부터 9월까지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제가 쓴 내용을 원고의 우수성, 기획의 독창성 그리고 시장성으로 나눠 분석해 보겠습니다.
원고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부분
- <오마이뉴스>에 2008년 5월부터 9월까지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어 많은 인기를 얻었다.
기획의 독창성을 주장하는 부분
- 대중이 좋아하는 미술이나 음악 등의 예술작품을 매개로 그 이면에 존재하는 사회사를 끄집어내 서술하는 방식을 취했다.
- 공저를 통한 역할분담으로 미술, 음악 등의 다양한 예술작품을 다룸으로써 소재의 다양성과 참신성을 구현했다.
시장성을 주장하는 부분
-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인문, 사회 및 정치에 관심이 있는 독자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물론 제안서의 '원고 특징 및 차별성' 항목을 잘 쓴다고 해서 원고가 최종 당선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심사위원들의 최종 선택을 받으려면 원고 자체가 힘이 있어야 압니다. 하지만 '역지사지'를 통해 제안서를 심사위원들의 입장에서 작성하지 않았다면 첫 번째 관문에서 아쉽게 탈락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첫 번째 관문에서 원고를 전부 읽지는 않을 테니까요.
원고에 대한 믿음, 거기다가 제안서를 심사위원 입장에서 잘 썼다는 확신이 더해져 나름 당선을 기대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공저자인 이유리씨는 그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요. 당시 정식으로 당선작 공고가 나기 전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측에서 미리 언론사로 당선자 명단을 공문으로 보냈는데, 문화부 기자였던 이유리씨가 언론사로 날아온 공문을 확인하고 기쁨에 들떠 저에게 바로 전화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때 저는 의기양양하게 다음과 같이 답했죠. "거봐요. 내가 당선될 거라고 했죠?"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의 경우처럼 당선에 대한 확신을 가진 또 한 번의 사건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1988년 제물포예술제에서 작곡 부문 대상을 받았던 사건입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저를 포함한 두 명이 선발돼서 작곡대회에 나가게 됐습니다. 이때도 역시 '역지사지' 신공이 대상을 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요.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작곡 대회가 열리는 장소에 들어가고 곧 대회가 시작됐습니다. 참가한 중학생들에게는 현장에서 바로 '뱃노래'라는 시가 주어졌는데요. 이 시에 맞춰서 피아노 반주가 딸린 노래를 만드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주어진 시간에 노래를 완성해 현장에서 바로 제출해야 하는 꽤 빡빡한 과제였는데요. 저는 이때도 '역지사지' 신공을 사용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이죠.
'도대체 심사위원들이 왜 뱃노래라는 시를 제시했을까? 시의 내용을 보니 이탈리아 베니스의 뱃놀이는 아니고 우리나라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내용이군. 그렇다면 서양음계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5음계 궁상각치우(서양음계의 도레미솔라에 해당)를 사용해야겠구나. 그리고 뱃노래니까 뱃사공들이 파도를 타고, 때로는 파도를 거슬러 넘실넘실 노를 저어가는 모습을 멜로디 라인으로 형상화시킬 필요가 있겠군. 그리고 피아노 반주에서는 우리 전통 장단 느낌을 살릴 필요가 있겠어. 딴~다단딴따, 이런 식으로 말이야.'
'역지사지' 신공을 이용하자 작곡 대회 심사위원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16마디의 멜로디를 쓰고 피아노 반주를 만들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는 과연 어떤 곡인지 궁금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뱃노래의 가사와 피아노 반주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멜로디만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아래의 악보가 바로 제가 당시 작곡한 곡의 멜로디입니다. 음악에 조예가 있는 분들은 멜로디에 제가 의도한 내용이 정확하게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필자(임승수)가 1998년 제물포예술제 작곡 대회에서 작곡한 뱃노래의 멜로디 ⓒ 임승수
당시 어머니가 대회장에 함께 오셨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가 "아마 대상 탈거예요"라고 자신있게 말씀을 드려서 어머니께서 무척 당황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앞서 얘기한 것처럼 제 예측대로 대상을 탔지요. 제가 확신을 한 것은 물론 곡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심사위원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것에 부응했다는 판단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역지사지' 신공을 사용하는 중학생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무척 당돌하고 무서운 중학교 2학년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원하는 것을 얻고 싶으신가요? 바로 '역지사지' 신공을 사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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