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성폭행한 그 놈 얼굴을 또 보라고?
[게릴라칼럼] 잘못된 대질심문의 신화... 피해자 중심으로 사고해야
얼마 전 친구에게 전화를 받았다. 이 친구는 청소년 대상 성교육 강사로 일하고 있다. 친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중 한 명이 성폭력 피해로 상담을 했다고 했다. 사건은 경찰에서 잘 조사돼 무사히 검찰로 이관되었다.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검찰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이 너무 다르니, 두 사람을 대질심문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피해자 학생이 "가해자 얼굴을 대면하기가 너무 싫다"며 "대질심문을 안 할 수 없겠느냐"고 상담을 해온 것이다.
성폭력 피해상담 경험이 없던 친구는 최선을 다해 검사실 담당 조사관, 사건 조사 담당한 형사와 통화하고 여러 관련 기관에도 전화를 했다. 하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대질심문을 며칠 앞둔 상태에서 결국 필자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그동안 관련 기관에게 어떤 답변을 들었냐고 물으니 "왜 피해자를 위해 사건 조사를 한다는데 협조하지 않느냐" "대체 당신이 누군데 남의 일에 나서서 왈가왈부하느냐" 등의 이야를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현실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원칙들이 사실상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2005년 전국성폭력상담소와 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가 주최한 성폭력 수사 재판 시민감시단 활동보고회 내용에 따르면 "검찰이 성인도 견디기 힘든 7시간의 대질심문을 5살난 아이에게 강요하며, 수치스러운 내용의 진술을 한없이 반복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2005년 이후 여성운동단체의 수사 재판 감시활동으로 인해 성폭력 피해자와 성폭력 가해자를 대질심문시키는 일은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지난 6월 기사화된 친족성폭력사건에서도 자매 2명이 7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삼촌인 J씨에게 성추행을 당했지만, 이를 조사한 경찰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이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특히 친족관계인 성폭력피해자와 가해자를 대질심문했을 뿐 아니라, 담당형사가 대질심문에서 가해자를 옹호하는 말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여전히 한국사회의 피해자 보호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 얼굴 보면...
대학교에서 성폭력상담을 하다보면 가끔 다른 행정부서와 갈등을 겪을 때가 있다. 이중 대질심문과 관련한 일도 꽤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피해자가 직접 우리 상담소로 신고해서 사건이 접수되면 괜찮은데, 다른 행정부서를 거치면 그곳에서 중재를 하거나 대질심문 관련한 문제가 발생한다.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면 대개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듯, 사건의 얼개를 맞추면 거의 비슷한 상황도 세세한 정황에서 진술이 판이하게 다른 경우가 많다.
피해자 말을 들으면서 "어머나! 그렇게 심각한 일이 있었어요? 어떡해요... 제가 꼭 해결해 드릴게요"라고 호언장담하게 된다. 하지만 가해자 말을 들으면 "그래? 피해자는 다르게 이야기하던데요. 그런 상황이면 뭐 어쩔 수 없지 않나요?"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있다.
이럴 때 손쉽게 택하는 방법이 대질심문이다. 안 그래도 업무가 많은 상태에서 미주알고주알 남의 말을 들으면서 하세월을 보내느니, 그냥 양쪽을 다 불러놓고 대질심문해서 이야기 듣는 편이 가장 빠르고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든 가해자든, 혼자서는 자기 유리한대로 말을 꾸며낼 수 있어도 서로 대면을 하면 거짓말 못 한다는 근거 없이 낙관적인 추측이 그 이면에 존재한다.
이러한 추측은 모든 개인은 어떠한 조건에서도 평등하며, 각자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계는 훨씬 더 복잡다단한 결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성폭력 사건을 들으면 많은 사람은 "왜 싫다고 말을 못 해?" "왜 그냥 그렇게 당하고 있어?"라고 되묻는다.
"야, 이러지 마!" "이러시면 성희롱인 거 아시죠?"라고 따끔하게 경고할 수 있는 관계라면 애초부터 성폭력은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성폭력은 피해자보다 우월한 가해자의 사회적·경제적 지위 탓에 거부의사를 밝히기 힘든 관계에서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용기를 내 수사기관에 신고했는데, 다시 가해자와 대면한 채 피해상황을 또박또박 말하는 일은 그 자체로 또다른 고통일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성폭력 사건뿐만 아니라 학교 폭력이나 집단따돌림 같은 인권침해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과장된 대질심문 신화... 믿지 마세요
보통 청소년 사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이나 학교폭력 사건은 개인과 개인 간의 사건이라기보다는 특정 또래집단이 1명의 아이를 괴롭히거나 폭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경우에 피해자는 1명의 가해자가 아니라 여러 명의 가해자와 대질할 수도 있다. 설령 1명의 가해자와만 대질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여러 가해자 친구들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혹은 청소년과 성인 사이에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경우, 청소년인 피해자는 성인인 가해자 앞에서 위축되어서 제대로 진술을 못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질심문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는 이 모든 맥락이 삭제된 채 "네가 찔리는 게 없는데 왜 시원시원하게 말을 못해? 뭐 숨기는 거 있는 거 아냐?"라는 식으로 피해자를 질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대질심문(對質審問)은 소송법에서 등장하는 심문기법의 일종으로, 증인과 증인, 당사자와 당사자, 또는 증인과 당사자 등을 대면시켜서 질문·응답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질심문의 목적은 증인이나 당사자의 상호 진술이 어긋나 재판장이나 수사관이 대질심문하여 진실 여부를 가리거나, 진실인지 허위인지의 심증을 얻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대질심문은 드라마틱한 진실 규명보다는, 피해자나 가해자 쌍방의 반응을 살펴서 정황증거를 파악하는 데 다소 용이할 뿐이다. 별다른 증거가 없는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는 수사관의 고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과연 조사관의 심증을 위해서 이렇게 피해자에게 폭력적인 상황을 연출해야 할까?
피해자와 가해자를 관통하는 관계 및 권력에 대한 성찰 없이 이루어지는 대질심문은 진실을 밝혀내기보다는 오히려 허위사실을 옹호하는 자료로 악용될 수 있다.
애초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내 친구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질심문이 하루 남은 상황에서도 아직 어떻게 할지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친구는 여러 성폭력상담소에 전화해서 이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는 상담전문가를 찾았지만, 시일의 촉박해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피해자가 원치않는 대질심문, 결국 취소
나는 친구에게 그럴 것이 아니라 직접 담당검사에게 전화해 피해자가 대질심문 하기를 꺼려하니 대질심문 자체를 취소하거나, 적어도 아동·청소년 피해자 법률조력인제도를 통해서 변호사 입회하에 대질심문을 받도록 하라고 말했다.
피해자는 물론 사건에 대해 친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상황이니까, 어설픈 전문가보다 친구가 직접 나서는 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다만 이것도 사람의 일인지라 그간 전화가 오고가면서 담당 수사관과 갈등이 있었으니, 입바른 말로 따박따박 따져서 검사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것보다, 현재 피해자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어떻게 할지 검사와 같이 상의해보라고 했다.
이건 나도 선배 상담자에게 배운 것인데, 피해자를 위한답시고 담당경찰이나 검사랑 너무 척을 지면 오히려 사건 조사가 원활하지 않아 피해자에게 불리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선배들도 담당경찰이나 검사가 거슬리는 말을 할 때에도 한 두 번은 피해자를 위해서 참는다.
결과적으로 친구는 담당검사랑 통화해서 이 상황을 잘 설명했고 검사는 자신은 피해자가 대질심문을 거부하는지 몰랐다며 흔쾌히 대질심문을 취소했다. 사건이 잘 해결되었다며 고맙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도 매우 안심이 되었다. 청소년인 피해자가 억지로 대질심문을 하게 되면 어떡하나 마음이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반성폭력운동의 성과로 이제 피해자가 대질심문을 거부하면 수사기관에서 받아들일 정도로 한국 사회 성인식이 발전했구나 싶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여전히 개선해야할 제도가 많지만, 한국 사회가 느리지만 그래도 변화한다는 사실이 이 우울한 치세를 지나갈 수 있는 작은 희망이면 좋겠다.
검찰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이 너무 다르니, 두 사람을 대질심문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피해자 학생이 "가해자 얼굴을 대면하기가 너무 싫다"며 "대질심문을 안 할 수 없겠느냐"고 상담을 해온 것이다.
성폭력 피해상담 경험이 없던 친구는 최선을 다해 검사실 담당 조사관, 사건 조사 담당한 형사와 통화하고 여러 관련 기관에도 전화를 했다. 하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대질심문을 며칠 앞둔 상태에서 결국 필자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그동안 관련 기관에게 어떤 답변을 들었냐고 물으니 "왜 피해자를 위해 사건 조사를 한다는데 협조하지 않느냐" "대체 당신이 누군데 남의 일에 나서서 왈가왈부하느냐" 등의 이야를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현실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원칙들이 사실상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2005년 전국성폭력상담소와 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가 주최한 성폭력 수사 재판 시민감시단 활동보고회 내용에 따르면 "검찰이 성인도 견디기 힘든 7시간의 대질심문을 5살난 아이에게 강요하며, 수치스러운 내용의 진술을 한없이 반복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2005년 이후 여성운동단체의 수사 재판 감시활동으로 인해 성폭력 피해자와 성폭력 가해자를 대질심문시키는 일은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지난 6월 기사화된 친족성폭력사건에서도 자매 2명이 7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삼촌인 J씨에게 성추행을 당했지만, 이를 조사한 경찰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이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특히 친족관계인 성폭력피해자와 가해자를 대질심문했을 뿐 아니라, 담당형사가 대질심문에서 가해자를 옹호하는 말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여전히 한국사회의 피해자 보호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 얼굴 보면...
▲ 가해자 중심의 성폭력 사건 처리는 사건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높다. 사진은 영화 <도가니>의 한 장면. ⓒ 삼거리픽쳐스
대학교에서 성폭력상담을 하다보면 가끔 다른 행정부서와 갈등을 겪을 때가 있다. 이중 대질심문과 관련한 일도 꽤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피해자가 직접 우리 상담소로 신고해서 사건이 접수되면 괜찮은데, 다른 행정부서를 거치면 그곳에서 중재를 하거나 대질심문 관련한 문제가 발생한다.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면 대개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듯, 사건의 얼개를 맞추면 거의 비슷한 상황도 세세한 정황에서 진술이 판이하게 다른 경우가 많다.
피해자 말을 들으면서 "어머나! 그렇게 심각한 일이 있었어요? 어떡해요... 제가 꼭 해결해 드릴게요"라고 호언장담하게 된다. 하지만 가해자 말을 들으면 "그래? 피해자는 다르게 이야기하던데요. 그런 상황이면 뭐 어쩔 수 없지 않나요?"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있다.
이럴 때 손쉽게 택하는 방법이 대질심문이다. 안 그래도 업무가 많은 상태에서 미주알고주알 남의 말을 들으면서 하세월을 보내느니, 그냥 양쪽을 다 불러놓고 대질심문해서 이야기 듣는 편이 가장 빠르고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든 가해자든, 혼자서는 자기 유리한대로 말을 꾸며낼 수 있어도 서로 대면을 하면 거짓말 못 한다는 근거 없이 낙관적인 추측이 그 이면에 존재한다.
이러한 추측은 모든 개인은 어떠한 조건에서도 평등하며, 각자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계는 훨씬 더 복잡다단한 결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성폭력 사건을 들으면 많은 사람은 "왜 싫다고 말을 못 해?" "왜 그냥 그렇게 당하고 있어?"라고 되묻는다.
"야, 이러지 마!" "이러시면 성희롱인 거 아시죠?"라고 따끔하게 경고할 수 있는 관계라면 애초부터 성폭력은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성폭력은 피해자보다 우월한 가해자의 사회적·경제적 지위 탓에 거부의사를 밝히기 힘든 관계에서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용기를 내 수사기관에 신고했는데, 다시 가해자와 대면한 채 피해상황을 또박또박 말하는 일은 그 자체로 또다른 고통일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성폭력 사건뿐만 아니라 학교 폭력이나 집단따돌림 같은 인권침해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과장된 대질심문 신화... 믿지 마세요
보통 청소년 사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이나 학교폭력 사건은 개인과 개인 간의 사건이라기보다는 특정 또래집단이 1명의 아이를 괴롭히거나 폭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경우에 피해자는 1명의 가해자가 아니라 여러 명의 가해자와 대질할 수도 있다. 설령 1명의 가해자와만 대질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여러 가해자 친구들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혹은 청소년과 성인 사이에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경우, 청소년인 피해자는 성인인 가해자 앞에서 위축되어서 제대로 진술을 못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질심문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는 이 모든 맥락이 삭제된 채 "네가 찔리는 게 없는데 왜 시원시원하게 말을 못해? 뭐 숨기는 거 있는 거 아냐?"라는 식으로 피해자를 질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대질심문(對質審問)은 소송법에서 등장하는 심문기법의 일종으로, 증인과 증인, 당사자와 당사자, 또는 증인과 당사자 등을 대면시켜서 질문·응답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질심문의 목적은 증인이나 당사자의 상호 진술이 어긋나 재판장이나 수사관이 대질심문하여 진실 여부를 가리거나, 진실인지 허위인지의 심증을 얻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대질심문은 드라마틱한 진실 규명보다는, 피해자나 가해자 쌍방의 반응을 살펴서 정황증거를 파악하는 데 다소 용이할 뿐이다. 별다른 증거가 없는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는 수사관의 고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과연 조사관의 심증을 위해서 이렇게 피해자에게 폭력적인 상황을 연출해야 할까?
피해자와 가해자를 관통하는 관계 및 권력에 대한 성찰 없이 이루어지는 대질심문은 진실을 밝혀내기보다는 오히려 허위사실을 옹호하는 자료로 악용될 수 있다.
애초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내 친구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질심문이 하루 남은 상황에서도 아직 어떻게 할지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친구는 여러 성폭력상담소에 전화해서 이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는 상담전문가를 찾았지만, 시일의 촉박해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피해자가 원치않는 대질심문, 결국 취소
나는 친구에게 그럴 것이 아니라 직접 담당검사에게 전화해 피해자가 대질심문 하기를 꺼려하니 대질심문 자체를 취소하거나, 적어도 아동·청소년 피해자 법률조력인제도를 통해서 변호사 입회하에 대질심문을 받도록 하라고 말했다.
피해자는 물론 사건에 대해 친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상황이니까, 어설픈 전문가보다 친구가 직접 나서는 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다만 이것도 사람의 일인지라 그간 전화가 오고가면서 담당 수사관과 갈등이 있었으니, 입바른 말로 따박따박 따져서 검사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것보다, 현재 피해자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어떻게 할지 검사와 같이 상의해보라고 했다.
이건 나도 선배 상담자에게 배운 것인데, 피해자를 위한답시고 담당경찰이나 검사랑 너무 척을 지면 오히려 사건 조사가 원활하지 않아 피해자에게 불리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선배들도 담당경찰이나 검사가 거슬리는 말을 할 때에도 한 두 번은 피해자를 위해서 참는다.
결과적으로 친구는 담당검사랑 통화해서 이 상황을 잘 설명했고 검사는 자신은 피해자가 대질심문을 거부하는지 몰랐다며 흔쾌히 대질심문을 취소했다. 사건이 잘 해결되었다며 고맙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도 매우 안심이 되었다. 청소년인 피해자가 억지로 대질심문을 하게 되면 어떡하나 마음이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반성폭력운동의 성과로 이제 피해자가 대질심문을 거부하면 수사기관에서 받아들일 정도로 한국 사회 성인식이 발전했구나 싶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여전히 개선해야할 제도가 많지만, 한국 사회가 느리지만 그래도 변화한다는 사실이 이 우울한 치세를 지나갈 수 있는 작은 희망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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