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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나 된 나팔꽃, 본 적 있나요?

[포토] 30년째 씨 받아 한결같은 나팔꽃 심는 할머니

등록|2012.07.21 15:17 수정|2012.07.21 15:17
제가 사는 빌라에 80세 전후한 연로하신 할머님께서 올해 이사를 오셨습니다. 오다가다 인사 드리고 하는 이웃 사이입니다. 이번 봄에 할머님께서는 빌라 주차장 안쪽 한켠에 어떤 씨앗을 화분에 심으셨습니다. 그때 제가 한창 고추, 상추, 부추 등 화분 야채 키우기에 정신이 팔려 있을 즈음입니다.

그때 할머님께서는 그 씨앗이 나팔꽃이라고 하셨습니다. 할머님은 이 나팔꽃 이외에도 여러 가지 화초들을 같이 키우고 계셨습니다. 야채 위주로 키우는 저와는 성향이 좀 다르셨지요. 그때 제가 할머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할머니, 나팔꽃 말고 야채를 심으시면 어떨까요? 종종 따 잡수시고요."
"헤헤, 이 나팔꽃은 30년 전부터 심어온 것이야. 나는 꽃이 좋아."

이야기를 듣어보니 30년 전에 처음 심었던 나팔꽃에서 씨를 받은 후 해마다 새로운 씨앗을 받아 계속 심으셨다는 것입니다. 30년, 즉 30세대에 걸쳐 나팔꽃 자손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꽃종류를 좋아하신다면서요.

그동안 여러번 이사를 다니시면서도 이 나팔꽃씨는 꼭 챙겨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올해에도 어김없이 이렇게 씨를 심고 꽃을 피워내신 겁니다.

그때 할머님께서는 씨앗을 심으면서 "너무 오랫동안 종자를 받아서 심었더니 이제는 꽃이 별로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보다 생각했습니다.

봄에 그렇게 씨를 심고 나서 조금씩 커가는 나팔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할머님께서는 나뭇가지도 세워주고 줄기가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끈도 이어주면서 나팔꽃을 정성껏 돌보셨습니다. 그때 저도 같이 도와드렸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나팔꽃보다는 야채를 이렇게 정성으로 키우시지 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나팔꽃에 담긴 30년 세월의 의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키우는 야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다른 분들의 화분도 그러기를 바랐던 마음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최근 들어 비가 오락가락 하면서 제 화분에 물주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종종 그 할머님께서 저희 화분에 물을 주시는 장면도 볼 수 있었습니다. 여하튼 최근에는 그것들에 별로 신경을 쓰지 못했고 밤중에 들어오다보니 화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아침, 불현듯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었습니다. 나팔꽃이 활짝 피었던 것입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에 어찌나 반갑던지요. 도심속 여느 화단, 화분에서 풍겨오는 일반적인 모습일 텐데 제게는 참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30년이라는 적잖은 기간의 세월 동안 이어져온 나팔꽃. 천천히 혹은 꾸준히 이 세월을 할머님과 함께 살아오는 동안 나팔꽃에게도, 할머님에게도 어떤 아픔이나 어려움 혹은 기쁨도 있었겠지요.

씨앗을 심는 것에서부터 꽃을 피우고 지고, 열매를 맺고 영글며 씨앗이 단단해지면서 생을 마감하고... 기다려주며 인내하고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이 나팔꽃과 할머님은 삶을 같이 해 오셨습니다.

요즘처럼 '빨리 빨리'를 외치고 인스턴트가 판치는, 심지어 사랑조차도 인스턴트 사랑이 만연하고 마치 공장에서 달콤한 과자 찍어내듯 속성으로 사랑하고 끝내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초스피드로 달려가는 세상임을 생각하면서 저 느긋한 나팔꽃의 화려함에 더욱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나팔꽃이 비로서 활짝 피고 나서야 그 세월의 넉넉함과 꾸준함, 지속적이고 한결같은 나팔꽃과 할머님의 정성스러움이 지금 시대의 인스턴트 사랑과 대조되면서  머릿속에서 갑자기 떠오르더군요. 물론 저만의 느낌일수도 있겠지만요.

가까이 들여다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보고 그 속에 귀도 들이대보면서 혹시나 30년 전 그 세월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시도해보기도 했답니다. 어떤 의미를 더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따로 찾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 나팔꽃이 저렇게 피어있는 그 자체가 제겐 의미였으니까요.

경이롭기까지 한 나팔꽃의 여러 모습을 담아봤습니다.

▲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색을 지녔다. ⓒ 윤태


▲ 보면 볼수록 매료된다. ⓒ 윤태


▲ 세 쌍둥이 같은 나팔꽃, ⓒ 윤태


▲ 푸른색과 잘 어우려졌다. ⓒ 윤태


▲ 정성스럽게 나뭇가지와 끈도 달아주셨다. ⓒ 윤태


▲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마치 태양같다. ⓒ 윤태


▲ 한폭의 그림같다. 30년째 대를 이어오고 있는 나팔꽃. ⓒ 윤태


▲ 도심 한가운데서 이런 풍경은 정겹다. ⓒ 윤태


▲ 이 할머님은 야채보다는 꽃 종류를 많이 심으셨다. ⓒ 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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