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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는 단옷날 여인네들, CCTV가 훔쳐보네~

[서평] 수천 년 인권의 기억, 세계인권선언을 그림으로 읽다

등록|2012.07.27 09:57 수정|2012.07.27 10:15

▲ <세계 인권 선언>(이부록·조효제·안지미 저, 프롬나드 펴냄) ⓒ 프롬나드

"전쟁은 그렇게 무서운 것일까. 겨우 8살이나 11살쯤 된 어린애들이 남의 집 차 문을 부수고 들어가 닥치는 대로 훔쳐간다." (1944년 3월 29일)

책 <안네의 일기>의 주인공 안네 프랑크가 남긴 기록 중 한 대목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당시, 유대인이던 그는 가족과 함께 은신처에서 생활했다. 독일 나치군의 유대인 학살을 피하기 위해서다.

대학살, 종군 위안부, 핵전쟁 등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은 그야말로 '인권'이 무시되고 경멸이 팽배하던 시대였다. 1945년, 전쟁이 종료된 후 살아남은 대다수 사람은 야만적으로 변해버린 세상에 자괴감을 가졌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무의미한 살육과 증오의 시대를 거쳐야 하는 거지?'라면서 말이다.

이때 탄생한 것이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다. 국제연합총회(UN)가 선포한 이 선언에는 태어나면 누구나 얻는 천부인권부터 생존에 필수적인 양식과 표현의 자유를 동등하게 누릴 권리가 명시돼 있다. 세계인권선언은 총 30개(전문 및 본문)의 조항이 1748개의 단어로 이뤄졌을 만큼 상당히 함축적이다.

내전 중인 아프리카 수단의 아이들은 한참 뛰어놀 나이에 총을 잡고 피 튀기는 전쟁에 나선다. 먹은 것이 없어 동공마저 풀려버린 아이들은 무심코 땅바닥에 핀 독버섯을 따 먹는다. '5초에 1명', 인류는 기아로 숨져가고 있다. 이처럼 인권의 현 모습은 참담하기 그지없고, 세계인권선언은 갈피를 잃어 버렸다. 특히 우리네의 일상에선 그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다.

인권으로 똘똘 뭉친 <세계 인권 선언>

이때 국내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새롭게 태어났다. 이부록 작가·조효제 인권학자·안지미 북 디자이너가 공동제작한 <세계 인권 선언>이 바로 그것. 이 책은 '세계인권선언 읽기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인권을 찾아서> <인권의 풍경> 등의 저서와 국제앰네스티 및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활동해 온 조효제 인권학자가 책 서문을 썼다. 그는 다가오는 새 시대의 해답을 세계인권선언에서 찾는다.

"맹위를 떨치던 신자유주의가 최근 한풀 꺾이면서 그러한 조류를 맹신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좀 더 인간화된 사회체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해답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진, 그러나 아주 신선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세계인권선언을 펼쳐보면 된다."

책 표지와 본문 디자인은 안지미 북 디자이너가, 30개 조항의 이미지화는 이부록 작가가 맡았다. 특히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이 작가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시각이미지를 생산했다.

이들은 전쟁관련 픽토그램(사건과 관련한 물건 장소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상징적인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법) 비평 책 <기억의 반대편 세계에서 워바타>를 함께 만든 적이 있다. 해설을 맡은 김종길 미술 평론가는 선언 읽기에 앞서 그림을 보며 충분히 상상할 것을 권한다.

"선언의 문장이 떠오르지 않거든 이 책에 실린 그림을 연상해보라! 사실 구석기시대의 동굴 벽화나 암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오래된 언어인 것이다."

팔 벌린 두 남자... 평등할 권리를 의미하지요

▲ 책 <세계 인권 선언>(이부록·조효제·안지미 저, 프롬나드 펴냄) 중 제 7조 '법 앞의 평등할 권리'를 이미지로 그려낸 작품이다. 제 7조는 이와 같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어떤 차별도 없이 똑같이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위배되는 그 어떤 차별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러한 차별에 대한 그 어떤 선동 행위에 대해서도 똑같은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 프롬나드



선언을 형상화한 이미지는 세계와 장르를 아우른다. 한국 전통 풍속화부터,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까지. 그러나 이미지들은 낯설게 변형돼 있다. 제7조(법 앞에서 평등할 권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신체도(Vitruvian Man)'를 차용했다. 이는 '두 팔을 벌린 길이는 인체의 신장과 같다'는 이상적인 인체의 비례를 나타낸 그림이다.

우선 오른쪽 신체도는 원본처럼 사지를 뻗은 인체의 가로 및 세로길이가 같다. 양팔 끝과 발끝이 닿게 그려진 정사각형을 통해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왼쪽 신체도에 그려진 사각형은 가로가 더 긴데, 신장이 짧은 동양인의 인체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림은 인체의 비례를 갖지 못한 동양인이 서양인에 비해 열등한지 묻는다.

이부록 작가는 작업을 위한 이미지의 대부분을 새로 창작하지 않았다고 한다. 풍속화·종교화·랜드마크·사진·영화 등 세계에 널리 존재하는 모든 이미지에는 그 시대 속 인권의 풍경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작은 이미지 하나에도 시대를 거쳐 간 사람들의 아픔이 묻어있었다. 제22조(사회보장권,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차용된 밥숟가락 이미지에는 굶주림에 고통받던 민중의 삶이 담겨 있다. 이처럼 그는 이미지가 담고 있던 인권의 기억을 포착해 각 조항의 의미와 연결했다. 이렇게 탄생한 30개의 그림에는 작금의 현실도 담겨있다.

하루에 80회 정도 찍히는 당신... 괜찮으십니까

▲ 책 <세계 인권 선언>(이부록·조효제·안지미 저, 프롬나드 펴냄) 제 19조 '사생할의 권리'를 이미지로 그려낸 작품이다. 제 19조는 이와 같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사생활, 가족 관계, 가정 또는 타인과의 연락에 대해 외부의 자의적인 간섭을 받지 않으며, 자신의 명예와 평판에 대해 침해를 받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그러한 간섭과 침해에 대해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 프롬나드



대한민국은 국민 한 명당 하루 평균 CCTV에 '80회' 정도 노출되며, 국가는 공권력을 이용해 민간인을 사찰한다. 혜원 신윤복 선생의 단오도를 차용한 제19조(사생활의 권리)에는 단옷날 여인네들의 목욕재계를 훔쳐보던 두 남성의 시선이 CCTV로 바뀌어 있다. 이는 늘 감시 속에 있는 우리 사회를 비틀어 보여준다.

제20조(집회 및 결사의 자유)와 제23조(노동할 권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제20조를 상징하는 이미지에는 커다란 담 위에 홀로 서 있는 자를 향해 수많은 사람이 달려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들은 창과 활을 든 자들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며, 담 위에 서 있는 자는 오른쪽 발을 내밀고 뒷짐을 진 채 한가로이 바라보고 있다. 2009년 벌어졌던 용산참사와 쌍용차 사태가 떠오른다.

이부록 작가는 작업 도중 "어느덧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고 한다.

"작업 과정에서 유대인 학살, 종군 위안부, 노예제, 인디언 학살 등 슬픈 인간의 역사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21세기가 된 현재도 여전히, 인간은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있었던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스물두 번째의 죽음, 그리고 스물세 번째 죽음을 막고자 필사적인 시민들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다시 한 번 세계인권선언 제23조를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이 탄생한 지 어느덧 만 70년. 그 속에는 고통으로 피워낸 인류의 '세상살이 지혜'가 담겨 있다. 박원순 서울 시장은 추천사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인권.' 누군가에게는 조금은 어려운 단어일 수도 있겠습니다. 굳이 알 필요 없는 먼 뜻일 수도 있겠네요. (중략) 하지만 이 모든 다양한 입장 차이에도 '인권'은 역사 이래 인류가 발전시켜온 최고의 가치이자 개념입니다. 크고 작은 일상의 고민을 떠나 그림들을 넘겨보시지요. 인류 최고의 가치인 '인권'이 천의 얼굴로 다가올 것입니다. 책을 덮고 난 뒤 남을 더 조금 이해하게 되고, 더 남을 존중하게 되더라도 두려워 마시고요. 그래 봤자 결국은 '나' 존중받자고 하는 성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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