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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이 버린 물건 쓰라니, 어머니 너무 하세요

[나의 시월드②] 용감하게 시작한 시집살이... 고부간 신경전은 계속

등록|2012.08.01 15:35 수정|2012.08.01 15:35
최근 '시월드'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시월드란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처럼 '시(媤)'자가 들어간 사람들의 세상, 즉 '시댁'을 의미합니다. KBS 주말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여주인공과 시월드 사이의 에피소드를 사실적으로 그려내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누구나 겪었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매콤 쌉싸름한 '시월드'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편집자말]
달력을 펼쳐보았다. 올해 시아버님 생신은 말복 날이다. 가벼운 한숨이 나온다. 그날 집안에 몰려들 가족들을 생각하면 어디 도망이라도 가고 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님 생신은 아이들 여름방학 한복판에 있다. 덕분에 아버님 생신은 우리 시댁의 공식적 가족행사이자 비공식적 여름휴가가 돼 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며느리인 나는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아버님 생신은 축하드릴 일이지만, 북적거릴 가족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땀이 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신혼부터 시부모님과 함께 살아온 나의 숙명(?)이려니 하며 스스로 위안한다. 남편은 막내지만 시부모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우리 집은 명절을 비롯해 갖가지 시댁 행사의 베이스캠프가 돼 버렸다.

더구나 며칠 전 귀국한 미국사는 큰 시누이까지 합류할 계획이다. 조카들도 제법 커서 이제 우리 집이 너무 비좁게 느껴질 정도다. 식사는 어떻게 준비해야 될 지, 잠자리는 어떻게 배치해야 될 지, 인근 맛집이나 유원지는 어디를 추천해야 될 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이게 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내가 감당해야 될 몫이다.

3년만 살고 분가? 13년째 같이 살고 있다

나는 1999년에 결혼했다. 1999년을 붙들기라도 하듯, 허겁지겁 12월에 식을 올렸다. 당시 내 나이 24세. 뭐가 그리 급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상황이었다. 친정엄마는 내 결혼식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저 어린 게 어떻게 시집살이를 할까' 겁이 나셨단다.

하지만 당사자인 나는 마냥 신났다. '시집? 거기도 사람사는 데 아냐? 설마 나를 잡아먹기야하겠어?'싶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딱 내 이야기였다. 3년만 살고 분가하자 했다. 하지만 그 3년은 어느덧 13년째 접어들고 있다.

시부모님과 함께 산다고 하면 열 명 중 열 명은 나를 보고 '모시고 산다니 대단하다'고 한다. 나는 시급히 정정한다. '모시고 사는 게 아니라 그냥 함께 산다'고. 그러면 그들은 '그게 그거지. 어쨌거나 진짜 착하다'고 말한다. 결혼 전까지 '착하다'는 칭찬을 이렇게 많이 들어본 기억이 없던 나는 시부모님과 함께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착하고 대단하고 굉장한 며느리가 돼 버렸다.

▲ 시어머니가 모아놓으신 한복 ⓒ 안소민


신혼초기에는 정말 대단했다. 어머님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나에게 일주일동안 아침 문안인사를 드리라고 했다. 아침마다 한복을 입고 큰절을 올린 뒤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1970년대 <여로(영구로 유명한 드라마)>와 같은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장면이었다.

이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란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시집이 있느냐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고 이어서 '너무 착하다'며 왠지 안쓰러운 시선을 보낸다. 그런데 나는 착하다, 나쁘다의 이분법적 사고를 떠나 요즘 유행하는 유체이탈화법을 써서 '24살 그 새댁은 정말 독특한 경험을 해 봤다'고 말하고 싶다.

한겨울 오전 7시면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때였다. 알람소리에 의지해 겨우 일어난 나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한복을 찾아입어야만 했다. 한복이라곤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하면서 부채춤의 '무대 의상' 정도로만 입었던 수준이라 옷고름 매는 방법도 잘 알지 못했다. 옷고름 매는 방법을 다시 배우고, 절하는 방법을 습득하며 순간 뼈저리게 느꼈다.

'드디어 내가...시집이란 걸 왔구나.'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새색시 한복 코스프레(?)에서 벗어난 나는, 그 후로도 어머님과 자잘한 일들을 두고 마찰을 빚었다. 내 입장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어머님은 여자나 어린애가 어른의 신발을 폴짝폴짝 넘어다는 것을 못마땅해 하셨다. 그렇게 되면 그 어른이 큰 일을 못하다는 것이었다.

어른의 물건을 소중히 다뤄야한다는 어머님의 그 마음은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빨래를 널 때도 어른 것을 위에서부터 널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이르러서는 '왜 그래야 하느냐'는 말대꾸가 목구멍까지 차 올랐다.

몇 년전 어머님과 크게 틀어진 적이 있었다. 어머님은 당신 물건들을 잘 버리지 못하신다. 딸과 며느리들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엄마! 물건 좀 제발 버리고 새로 사세요'라고 닥달한다. 어머님 물건애착의 결정판은 당신의 자녀들의 물건에 대한 애착으로 나타났다.

시누이들이 이사를 가거나 짐을 옮길 때마다 어머님은 시누이들이 필요 없다며 2초의 망설임도 없이 홀랑 버린 세간을 다시 들고 돌아오셨다. '이 멀쩡한 것들 아깝게 왜 버리냐. 다들 돈이 썩어났냐'는 게 어머님의 지론이셨다. 고장난 곳은 수리하고, 더러워진 것은 반들반들하게 닦아서 새 살림을 만드셨다.

그와 함께 내 불만도 쌓여갔다. 어머님이 물건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나도 높이 산다.  하지만 나는 시누이가 버린 물건을 내가 다시 사용해야 된다는 그 현실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산다는 이유만으로 예쁜 살림살이도 고르지 못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어머니의 감정변화, 이젠 '딱' 보면 안다

▲ 시어머니가 모아놓으신 보자기들 ⓒ 안소민


13년을 살다 보니 어머님과 나는 서로의 감정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해졌다.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나는 어머님께 불만이 있으면 얼굴에 곧바로 나타난다. 어머님께서는 그걸 곧바로 감지한다. 나 역시 어머님의 태도, 말 한마디에서 어머님의 기분을 재빨리 흡수한다. 재밌는 사실은 우리 고부간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우리 두 사람의 감정기류에 너무나 무디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여보. 어머님 무슨 일 있어? 기분 별로이신 것 같은데?"
"뭘~ 아닌 것 같은데..."
"아니야.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아무것도 없어.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서 그래."

"얘, 소민이 회사에서 무슨 일 있니?"
"아뇨. 왜요?"
"아니. 그냥 기분이 좀 안 좋은 거 같다."
"그래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나중에보면 십중팔구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어머님과 나는 어느 때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친모녀처럼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13년을 살았지만 한 달에도 몇 번씩 둘의 사이는 '흐렸다 맑았다'를 반복한다. 남들이 보기엔 아주 평화롭고, 잔잔한 고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잔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어머님과 나는 끊임없이 서로의 감정을 주고 받고, 조율하기를 반복한다. 

남들은 말한다. 그러면 인생 피곤해서 어떻게 사냐고. 맞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게 바로 진짜 '시집살이'가 아닌가 싶다. 시집살이라는 게 반드시 노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시집살이는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의외로 상대방의 기분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사람을 이해하려는 능력만큼은 탁월하게 발달하게 되었다.

좀 나쁘게 표현하면 눈치가 빠삭해졌다는 것이고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남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더 많아졌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능력이 고부간 서로간에 향상되어야 하는데, 가끔은 어느 한 쪽만 강요된다는데 있다. 다행히 우리 집은 두 고부간의 촉수가 발달되어있어 그리 무디지 않고 균형 있게 발달해가는 중이다.

MBC 방송 파업이 끝나자마자 일이 산더미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쁜 와중에 시댁손님맞이까지 할 생각을 하니, 어깨가 더욱 무겁다. 다시 '시집살이'의 능력을 발휘해서 어머니 입장으로 생각해본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오는 큰딸과 손주들이 얼마나 반가울 것인가. 어머님입장에서도 며느리인 내 입장을 한 번 생각해줘야 한다. 날도 더운데 손님 치르려면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래도 역시나 올해 복날은 별로 기다려지지 않는다. 막상 가족들을 보면 나 역시 즐겁고 반갑기는 하지만 촉수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을 생각을 하니 조금 피곤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짜기도 하고 달기도 하고, 시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하고. 그것이 바로 내 딸에게는 그다지 '강추'하고 싶지 않은 시집살이의 맛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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