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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가 한국교회에 기여를 해?

[서평] 최규창의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등록|2012.08.02 17:58 수정|2012.08.02 17:58

책겉그림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 강같은 평화

<나꼼수>는 사실 크리스천이라면 듣기에 거북한 방송일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욕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기존교회를 걸고 넘어지는 모습들은 근본주의 신앙인들에게는 용납이 안 되는 일이죠.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겐 '악마의 방송'처럼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래도 <나꼼수>에 열광했습니다. 그것도 중산층과 서민층이 많이 빠져들었죠. 대통령과 정치인이 벌이는 꼼수를 적나라하게 들춰낸 까닭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점잖은 보수 언론과 몸을 사리고 있는 진보언론에서 못하는 이야기들을 여과 없이 풀어낸 것 말이죠.

그 방송이 좋다고 해도 진행자들 모두를 좋아하는 건 별개일 수 있겠죠? 방송 내용은 피부에 와 닿아서 좋아하지만, 막말하는 방송인들 자체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마치 기업의 가치와 기업주를 따로 구별하는 맥락이라 할 수 있겠죠. 목사의 설교 내용은 좋아하지만 목사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비호감을 갖는 경우도 그렇고요.

최규창의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강같은 평화 펴냄)는 <나꼼수> 현상으로 들여다 본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비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로마의 속국인 데가볼리의 한 지역인 거라사 지방의 미치광이(狂人)와 그 지역 사람들의 모습으로 해석해 낸 게 그것이죠. 지배국이었던 로마를 향해 그 지역 사람들은 폭력욕구가 드세졌는데, 그 욕구를 대신 짊어질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광인이 바로 적임자였다는 것입니다. 조선 명종 때 백정이었던 임꺽정의 광기와 조선 민중들의 모습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죠.

"르네 지라르의 말대로 거라사 주민들은 제국의 감시와 폭력 앞에 광인을 공식적으로 마을에 들일 수는 없으나 그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는 마을을 대신하여 제국에 독설을 퍼붓고 돌을 던질 수 있는 위상이 주어진 자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당시의 거라사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제국과 도시가 유지되는 패턴도 여전히 힘의 삼각 구도에 의존하는데, 그 구성 요소는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 압제당하는 민중, 그리고 견디다 못해 터져 나오는 그 사회의 그림자로서의 광인이다."(121쪽)

그는 오늘날 기득권 세력이 이득을 취하는 방식을 '폭력'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전쟁을 통해 합법적으로 취해왔다면, 지금은 정당화된 권력과 폭력을 동원하여 그걸 노린다고 하죠. 2009년 1월에 벌어진 '용산 참사'도 그런 흐름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만인에 의한 일인의 희생'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설명하기도 하죠. 온 국민을 제압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실은 그런 희생양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데 폭력과 억압으로 과연 군중이 제압당하는 걸까요? 아닐 것입니다. 권력자들이 거시권력을 사용하여 폭력을 행사할 경우 그 모순점들도 속속들이 노출되는 세상이죠. 그러니 절대적인 억압은 오히려 상대적인 저항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히틀러의 나치 체제도 그랬고, 우리나라의 군사정권 시절도 그랬습니다.

다만 그가 고민하는 부분은 미시권력입니다. 그것은 거시권력과는 달리 드러나지 않는 교묘한 폭력과 억압을 주도한다고 하죠. 더불어 정당한 공권력을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문화 매체를 장악하는 음모가 숨어 있다고 하죠. 사상이 의심스런 연예인들의 방송활동을 제한하거나, 교수들의 재임용을 탈락시킨 것, 그리고 민간인 사찰도 그런 흐름이라고 하죠. 지금 안철수 교수를 깎아내리는 것도 그런 꼼수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요?

"안철수가 차기 대선에 출마할 것인지 아닌지도 여기서 판가름 날 가능성이 높다. 본인은 공시적인 입장을 밝힌 적이 없는데 보수 신문들은 연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며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압박을 하면 겁을 먹을 것이라는 전통적 프레임을 사용하는 것인데, 때로는 그것이 먹히지 않는 상황도 있다는 것을 집단적 의사결정으로는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압박이 심해지면 안철수는 출마를 결심할 가능성이 높다."(161쪽)

이런 이야기들만 줄곧 쏟아내고 있으니, 이 책의 의도가 궁금해질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사실 <나꼼수> 현상으로 한국사회만 들여다본 게 아닙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초월적인 비전을 품도록 하는 데 진정성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원론적인 사상의 틀에 허우적대기보다 초기한국교회가 주도했던 물산장려운동과 농촌계몽운동 같은 차원을 주도하는 것 말이죠. 거짓과 불의에 대해서는 공의와 정의의 폭로로 맞서고, 경제와 교육과 가정문제로 괴로워하는 민중을 향해서는 어머니의 품처럼 보듬는 자세 말입니다.

"나꼼수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다. 교회의 지식이 무속의 굿거리에 갇혀 있을 때, 나꼼수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폭로하고 있다. 나꼼수의 광기가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카오스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이유로 교회가 그들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제자들도 정확히 알아보지 못했던 예수의 신성을 광인은 정확히 알아보았듯이, 광인의 눈에는 미친 세상이 그대로 보인다."(329쪽)

오늘날 교회가 제 기능과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고 세상 사람들은 이야기하죠. 예수 그리스도가 추구한 가치와 작금의 교회가 추구한 가치가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게 그것입니다. 거짓을 거짓으로 불의를 불의로 직격탄을 날렸던 예수님에 비해 오늘날 교회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치부까지도 무조건 덮고 가길 바란다는 것이죠. 아울러 가난한 대중을 품고 가셨던 예수님에 비해 오늘날 교회는 가난한 자와 부자를 차별한다고 하죠. 공의와 사랑이라는 교회의 두 기둥이 흔들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요?

<나꼼수>가 한국사회에 청량제와 같았다면, 이제 한국교회가 그 역할을 해야 할 때입니다. 최규창이 이 책을 낸 가장 큰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나꼼수>가 품고 있는 초월적인 가치를 한국교회가 하루 속히 회복하는 것 말입니다. 달콤한 약은 스스로 몸을 망치지만, 쓰디 쓴 약은 언제나 몸에 몸에 이롭다는 걸 한국교회가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나꼼수>가 한국교회에 기여한 점도 적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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