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 28일 토요일 오후 4시경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5층 세미나실에서 열린 <“시대의 협객, 구라의 원조” 배추가 돌아왔다!>, 중간에 방배추 선생, 우측에는 박재동 화백, 좌측 한국만화영상진흥원 김창현 ⓒ 김민관
지난 7월 28일 토요일 오후 4시,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5층 세미나실에서 '시대의 협객, 구라의 원조 배추가 돌아왔다!'라는 주제한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MBC <황금어장> 출연 당시 '대한민국 3대 구라' 중 한사람으로 꼽았던 방배추(본명 방동규) 선생이 출연했다.
한국 시사 만화계의 대부 박재동 화백(이하 박재동)이 사회를 맡은 이날 행사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K-comics 아카데미의 부대 프로그램 '프레시업! 만화창의 샤워'의 일환으로 열리게 됐다. '프레시업! 만화창의 샤워'는 만화가에게 창작 소재 개발 기회를 제공하고, 일반 시민들에게 문화 행사의 혜택을 제공하기 위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특강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방배추 선생(이하 방배추)은 이날 자신의 별명에 얽힌 뒷이야기부터 파리 유랑기 등 거친 기상으로 현실과 좌충우돌 부딪히며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선 사회를 맡은 박재동은 기타를 치며 노래에 홀로 심취해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뒤 그는 "백기완, 황석영과 함께 원조 삼대 구라인 만화하는 사람과 꼭 만나주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아쉬웠다"며 "방배추가 3년 전에 젊은 사람들과 함께 출전해, 식스팩이 안 나오면 출전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미스터코리아 대회에 나가 6등을 했다"고 그의 건장함을 소개했다.
배추(장수)에서 '17대 1'의 원조 싸움꾼까지
▲ <“시대의 협객, 구라의 원조” 배추가 돌아왔다!>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박재동 화백 ⓒ 김민관
방배추는 "한국전쟁 즈음에 휴교되어 학교가 거의 없었고 학생들도 없는 가운데, 서울 종로라든가 그 교외를 빌려서 운영되던 남녀가 함께 다니던 중학교 시절에 밀짚모자를 쓰고 '게다짝'(일본 사람들이 신는 나막신을 낮잡아 이르는 말)을 끌고 다녔다"며 "그때 배추장수를 닮았다고 해서 배추가 됐다"고 자신의 별명에 얽힌 유래를 설명했다.
방배추 가족은 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일제강점기 때 부유한 편이었다. 유치원도 다녔고, 또 당시 귀한 사탕도 쉬이 먹을 수 있었다.
방배추는 또한 운동에 소질이 있었단다. 소학교 시절 멀리뛰기 선수, 수영 단거리 선수 등으로 전국 체전에 출전했다. 소학교 5학년 당시 중학교 3학년 세 명이 다른 학생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때려 꺾었고, 이도 부러뜨렸단다. 더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다음부터인데, 방배추에게 맞은 학생들의 부모들이 따지러 저녁에 방배추의 집에 왔는데 방배추의 아버지가 대뜸 그들 중 한 아버지의 뺨을 때리더니 소학교 5학년에게 맞고 와서 따지는 게 창피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무안을 줬다고 한다. 그러자 피해자 부모들은 미안하다며 돌아갔다고 한다.
방배추는 "타고난 힘만 갖고는 싸움을 완전히 잘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수련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궁중 무술과 레슬링을 수련했다. 누군가를 때려 경찰서에 갔는데, 유도를 가르치던 강력계 형사가 자신과 겨뤄 이기면 놔준다고 해서 제압했다는 일화도 풀었다.
당시 배추를 사칭하던 사람도 많았다. '17대 1'이라는 말이 흔히 쓰이는데, 아마 그가 실제 싸웠던 것 중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결국 그는 패했고, 훗날 그가 어떤 기자랑 이야기를 하다 '17대 1'이라는 말이 퍼졌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방배추는 시라소니와 비견되는 시대의 협객으로 이름을 떨쳤다.
무술은 막고 때리는 것을 번갈아가면서 대련을 하지만, 싸움은 맞는 동시에 때려야 하고 피하면서 또 때려야 한다. 또 무술과 달리 룰이 없다. 어디서 공격이 시작될 지, 막상 싸워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그는 프랑스에서 싸운 경험도 이야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 사람은 체구도 크고 힘이 세 한국에서 맞붙었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배추와 맞붙은 자는 400명 정도 되는 조직원을 거느린 사람이었는데 근접전이 벌어지자 방배추는 상대를 박치기로 쓰러뜨렸다. 그래도 자신을 붙잡고 늘어지는 그의 눈에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갖다 댔고 손이 쑥 들어갔다고 했다.
이런 건 무술 교본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란다. 그런데 눈 안에 집어넣은 손이 그렇게 뜨끈할 수 없었단다. 나중에 조직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친한 사이가 됐다고.
또 한 명의 원조 구라 백기완 선생(이하 백기완)과의 인연도 재밌는 부분이다. 친구가 여러 모로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백기완을 찾아 갔을 때 백기완은 '너 한 번에 몇 명이나 때려눕히냐'고 물었단다. 그래서 방배추는 '10명 정도는 되겠지'라고 했는데 돌연 백기완이 일어나 자신의 귀싸대기를 때렸단다. 백기완은 '조무래기 애들하고만 싸우느냐'며 '너랑은 안 논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만약 아팠으면 싸웠을 텐데 아프지 않았고, 그냥 가소롭게 생각돼 돌아왔는데, 일주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단다. 나중에 방배추는 백기완을 다시 찾아갔다. 그 둘은 친구가 됐다. 그는 백기완을 두고 '친구지만 꼼짝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싸움도 잘하고 호방하고 뚝심 있게 살아왔지만, 방배추는 유독 여성과의 로맨스는 약했다. 여자에게는 소심했던 것이다. 유독 전쟁 중 북한에서 피란민으로 내려온 아가씨에게 부모에게 데려다 주고 싶은 마음과 함께 특별한 감정이 생겼는데, 방법이 없어 지도를 그려 찾아주고자 했다. 그러다 그만 휴전이 돼 버렸고, 결국 아가씨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방배추는 당시 속이 많이 상했단다.
가난의 끔찍한 고통을 대면하다
방배추는 장충동으로 빚을 받으러 갔다가 당사자가 돈이 없다며 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 긋는 것을 보고, 현실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가난이 이토록 무서운 것임을 절감했다고 한다. 현재 방배추는 경복궁에서 문화재 지도위원으로 궁궐 안내 지도를 하지만, 소박하게 낮춰 스스로를 소위 '야간 경비를 본다'고 설명한다. 어쨌거나 웬만한 사람이면 야심한 시각의 이곳의 무서움을 견디지 못한다고. 싸움에서도 전연 피하는 게 없었던 그로서는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 평생 가장 무서운 대상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방배추는 이론만 있는 사회주의자들을 매우 싫어한다. 이들은 방배추 말에 따르면 망치질 한 번도 안 하고, 노동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 이들은 이름 없는 노동자로 사느니 형무소에 가는 게 낫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18세에 방배추는 순천역 부근에서 2년동안 돼지장사 등을 해 동대문시장에서 150만 환을 벌었다. 당시 30만 환이면 가게 하나를 살 수 있었다.
'고문',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 지난 7월 28일 토요일 오후 4시경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5층 세미나실에서 <“시대의 협객, 구라의 원조” 배추가 돌아왔다!>라는 주제로, 열린 자리에서 방배추(본명 방동규) 선생 ⓒ 김민관
민주투사들을 숨겨주기도 해 정권의 미움을 받던 방배추는 박정희 대통령 당시 형무소에 다녀왔다. 그 뒤 그는 치아가 모두 사라졌다. 그의 나이 40대였다. 방배추는 독방에 있었는데 휴지도 안 주고, 세수도 못하고, 운동도 안 시켰단다. 또 뒤에다 전기고문을 당하기도 했단다.
어느날 방배추는 발가벗겨진 채로 맞았다. 일어나 뭔가 만져져서 피인 줄 알았는데 똥이었다고. 항문이 열렸던 것이다. 이후 일주일 정도, 뭘 먹으면 거기로 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고문하는 사람은 꼭 둘이 들어왔는데 한 명은 고문하고 한 명은 고문을 말리는 시늉을 했단다.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양심선언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질 때 어디 관계도 없고 성명서 발표도 안 했던 그는 반정부적 행위자로 몰렸다.
강원도 농장에서 농민 운동을 했던 때 함석헌 선생이 격려 방문을 했던 것 등이 기록됐고, 강원도에서 북한과 교신을 할 여지가 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오직 노력하는 소탈한 삶만이 소중한 것'
그는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하게 살 목적으로 피땀을 흘리지만, 대부분 별로 행복하지 않은데, 이를 국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을 부려 먹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나키스트이자 수직적 구조의 사회가 아닌 수평적인 삶의 형태를 주장하는 그에게서 '민초 중심' '몸으로 쓰는 삶' '속박되지 않는 삶'에 대한 정신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단적으로 운동을 하는 자는 고통을 겪는 자이고 따라서 남을 때릴 수 없다. 깡패는 칼로 찌르기만 하지 운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공식 행사는 고문 이야기로 채워졌고 이후 차려진 뒤풀이 자리에서 나머지 못다한 이야기를 이었다. 그는 순일한 삶의 자기 역량으로 '운동의 삶'과 '거짓된 정치'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역설했다. 또한 만화가들에게 투사와도 같은 큰 꿈을 심어줬다.
'경쟁 사회가 너무 싫다!'
방배추는 이름 없는 자가 소중한 이름으로 한 명 한 명 세상에 기억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2111년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그의 말에 따르면 외계인 침략 서사는 경쟁사회에서 온 것이다. 그렇게 먼 거리에서 온 존재들이 굳이 인간을 죽이러 오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정치인이나 어떤 대표성을 띠며 실상 현실에 많은 이름 없는 자들의 삶을 기리는 자리는 천성적으로 거북하다고 한다.
그에게 권위의식 따위는 없다. 방배추는 오직 가난만이 두렵고, 또 오히려 가난한 자만이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노동자의 삶에서 그는 삶의 기쁨을 얻고 만족하며, 없음에서 끊임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단다. 방배추는 문화재 지도위원으로 일하며 보통 사람이 빨리 걸어도 45분 걸리는 경복궁 야간경비원을 한다. 노동은 그와 평생 동거 동락한 주요한 부분이다.
곧 그의 삶의 원리처럼 '배고픔과 만족의 변증법'과도 같이 그 둘이 공수 전환하는 것이 곧 삶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권위나 재산을 채우는 것만으로 삶의 배고픔만을 인식하는 불행한 삶 대신, 또는 가난이 무엇인지 잊고 가난한 자들의 삶을 잊고 혼자만 무위도식하는 삶 대신 노동의 삶은 그래서 오히려 땀의 대가만큼의 진정성을 그 자체로 드러낸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만화가란
만화하는 사람은 미래를 멀리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의 앞선 말에 따르자면 시스템에 항거할 수 있고 모두의 평등한 연대, 땀과 노동으로 삶에 자신을 투여하는 그런 삶, 가난이 무서운지 아는 삶, 하지만 이 삶이 가난과 그리 멀지 않음을 아는 삶, 우리가 이 가난으로부터 연대하고 손잡을 수 있는 삶을 위한 만화여야 한다.
무한한 상상력으로 무한히 이동하며 노동으로 빚어낸 만화가 그가 말한 이상적인 만화가의 만화일 것이다. 진실은 진실 되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 아니 표현할 수 없다. 진실은 따로 있다. 이는 마치 도달 불가능한 실재라는 프랑스 철학자 라캉의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존경하는 함석헌 선생의 경우 형용사를 붙이지 않고 말을 짧게 한다.
그가 만화가에게 부여한 이상은 실상 젊은이들을 광범위하게 포함하는 것일 수 있다. 그를 만나기 전 그가 꽤 무서울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겸손이 깃든, 과장하지 않는 '구라'에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팔뚝을 걷어 근육을 보여줄 때는 그의 건장함에 또한 놀랐다. 평생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드넓은 스타일의 인생 무대는 한편 세계를 누빈 유목적 기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고문을 당했던 삶의 위기는 그가 가진 자유로운 이동성을 가장 크게 제한한 시기였던 것 같다.
동시에 그 많은 경험이 담담하게 흘러가고 있음은 그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또 커다란 현실과 막다른 시공간에 접해도 그저 별다를 것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의연함이 있음을 또한 보여주는 것 아닐까.
이제 78세가 된 정정한 할아버지는 우리와 다른, 하지만 매우 흥미로운 존재로 느껴졌다. 결코 그 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현실에 대한 집착과 얽매이는 것들,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철학적 몸을 몸으로 감각하며 사유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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