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3년, 맨 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웠다"
[인터뷰]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이끈 한상균 전 지부장
▲ 5일 한상균 전 쌍용차지부장이 3년 간의 복역을 마치고 화성교도소 밖으로 나오고 있다. ⓒ 노동과 세계
▲ 한상균 지부장이 출소를 축하하기 위해 나온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노동과 세계
한 남자가 교도소에서 걸어 나왔다. 검은 티셔츠와 등산바지를 입었다. 밖에서 넣어준 새 옷이다. 자정이 다 됐지만 교도소 앞은 낮의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 뜨거웠다. 문 앞에서 많은 이들이 그를 기다렸다. 3년 전 경찰서로 연행될 때 그가 입었던 노동조합 조끼를 아직도 입고 있는 사람들이다. 0시 2분. 이 남자는 문밖을 나서며 주먹을 쥔 오른쪽 팔을 높게 치켜들었다. 밝은 조명이 그를 비춘다. 새 옷을 입은 그와 땀에 젖은 조끼를 입은 이들이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5일 한상균 전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차지부장이 경기도 화성교도소에서 3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 김정우 지부장을 비롯한 쌍용차지부 조합원들과 시민 300여 명이 그를 맞았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한 전 지부장이 카메라를 보고 서자 일제히 플래시가 터졌다. 대개 출소한 사람들이 그렇듯 하얀 두부가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두부를 먹이지 않았고 한 전 지부장도 찾지 않았다. 사람들은 손에 든 두부를 교도소 안쪽으로 힘껏 던졌다. 죄 없는 노동자가 두부를 먹을 게 아니라는 표현이다.
그리고 파업에 모든 책임을 떠안은 그는 경찰서로 향했다. 쌍용차의 법정관리가 끝났다는 소식도, 인도의 마힌드라가 회사를 인수했다는 소식도, 함께 싸운 그의 동료와 그 가족 22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감옥 안에서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그곳에서 한 전 지부장은 속이 끓었다. 그는 "맨 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웠다, 신문을 들춰보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며 그 마음을 표했다. 덥수룩한 수염은 전과 같았지만 살이 빠져 수척한 모습이었다.
"어제가 아내의 생일, 못 챙긴 3년치 생일 축하한다"
한 전 지부장은 화성교도소 앞에 마련된 '3년을 기다렸다 한상균'이라고 적힌 무대를 배경으로 자신을 찾아와준 사람들 앞에 섰다. 그는 보름에서 조금 살이 빠진 달을 가리키며 "그해 여름 공장 옥상에서도 저 달을 보며 우리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심정을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어 "매 순간순간 동지들을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시간이었다"며 "동지들의 생존권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징역을 산다면 평생도 살 수 있지만, 이명박 정권의 노동자 말살정책에 쌍용자동차가 희생양이 되는 모습을 보는 시간은 길기만 했다"고 출소 소감을 전했다.
사실 한 전 지부장은 출소 직후 대한문 앞에 차려진 분향소로 갈 예정이었다. 동료와 그 가족들의 죽음은 무엇보다 그의 수감생활을 힘들게 한 일이었다. 일정을 하루 미뤄 6일 방문하기로 했지만, 그는 "피와 눈물이 담긴 술 한 잔을 올리는 게 아니라 대한문에 갈 내 마음을 먼저 영혼들에게 전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어서 노동자로 살아도 조금은 행복할 수 있는 세상 만들었다고 보고하겠노라고 이야기 했습니다"라며 추모의 마음을 보냈다.
▲ 지난 2009년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이후 3년을 복역한 한상균 전 지부장이 5일 출소해 부인과 포옹하고 있다. ⓒ 노동과 세계
한 전 지부장은 부인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가 해고되고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의 부인은 작은 식당을 하나 냈다. 한 전 지부장은 "오늘 김밥을 싸느라 노곤해서 못 올 줄 알았다. 정말 고생만 시켰는데, 몇 분 지난 어제(4일)가 생일이기도 하다"며 "3년의 시간을 혼자서 견디면서 어느새 저보다 강한 동지가 되어 주었다. 늦게나마 몰아서 3년치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환영행사를 마친 한 전 지부장과 참가자들은 이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으로 이동했다. 3년 전 감옥으로 떠났던 그 자리다. 그곳에는 한 전 지부장을 환영하는 잔치가 준비돼 있었다. 동료들과 해고노동자 가족들이 소박하게 음식을 준비해 밥 한 끼를 같이 먹는 자리다. 김정우 지부장과 막걸리 한 잔을 나눠 마신 한 전 지부장은 자리 곳곳을 돌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위해 공장 앞으로 자리를 옮긴 한 전 지부장은 공장 출입문을 잠시 바라보다 "여기도 많이 변했네"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정문에는 전자식 출입통제가 이뤄졌고, 사측이 고용한 용역경비가 24시간 감시를 하고 있었다. 한 전 지부장은 인터뷰에서 "8·6합의가 이렇게까지 안 지켜질 줄은 몰랐다"며 "회사 스스로가 자본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반드시 공장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한상균 전 지부장이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노동과 세계
- 3년 만에 출소한 소감이 어떤가?
"지나고 보니까 시간은 금세 간 것 같다. 힘들어 하는 동지들 곁으로 올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활력을 찾은 것 같다. 이 짧은 시간에도 희망을 느꼈다."
-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그의 가족 22명의 연이은 죽음이 쌍용차 사태를 사회적 문제로 만들고 있다. 소식을 들을 때 어땠나?
"맨정신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지금 맨정신 같아 보이지만 나도 진단을 한 번 받아봐야 할 거 같다. 밖에 있었으며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과 보지 못한 것은 차이가 크다. 독방에 있으면서 22명의 만장을 벽에 걸어 놨다. 혼자서 추모하는 건데 그게 거의 매일의 일상이었다. 그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것에 자괴감이 많았다. 심정을 표현하기 어려운데, 신문을 들춰보는 일이 힘들었다. 무서울 정도였다. 배달이 오면 바로 보지 못하고 한참 뒤에 들춰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랬다. 그런 시간이 지속됐다."
- 돌아가신 분 가운데 특별히 기억하는 조합원이 있나?
"특별하게 누군가를 구분하기 어려운 문제다. 돌아가신 가족들은 제가 확인할 수 없지만 조합원들은 전부 다 또렷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더 안타까웠다."
"이 나라에 존재해야 할 공장의 모습 찾아 반드시 돌아가겠다"
- 지난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로 희망버스가 주목을 받았다. 안에서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다.
"희망버스에 나 역시도 희망에 대한 간절함을 담아 보냈다. 이 사회의 연대가 현재 침체돼 있는 노동운동을 과시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자발적 노력들이 보이는 건 큰 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 폭이 넓어지면서 자본과 정권이 하려는 노동자 죽이기를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옥쇄파업을 마치고 '8·6합의'를 이끌어냈다. '1년 후 무급휴직자 복직' 등 합의 사안이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는데, 합의서를 만든 주체로서 어떤 생각을 하나?
"당시 노동자들이 엄청나게 큰 아픔을 가진 상태에서 합의를 했다. 어떤 조건이나 문구의 문제라던가 이행의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 뒤로 잉크도 마르기 전에 모든 사안을 어기고 갔기 때문에 회사 스스로 자본의 본질이 이렇다라는 걸 뚜렷하게 보여줬다. 쌍용차가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정권이 개입한 이후로 변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박한 자본으로 변하는 모습이다."
- 정치권에서 '쌍용차특위' 등 문제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정치권을 떠나서 쌍용차 문제가 사회적 공분으로 되고 있다. 해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는 상황이다. 사람이 죽는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본질에는 정리해고가 있다. 자본이 노동자들을 소모품화하고 노예로 만들려고 한다는 본질들이 있다. 그것에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편을 들면서 노동자들은 억압한다. 지금은 합법적 파업을 할 수 없는 조건이다. 이제 정말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건 식은 죽 먹기가 됐다. 이런 것을 바꿔가는 게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 등 뒤로 공장이 있다. 공장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지금 안에는 노동자들이 훨씬 더 땀을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들었다. 사측에서 결단을 해야 한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해고노동자, 무급휴직자, 징계해고자 누구 할 거 없이 내가 청춘을 바친 공장에서 다시 볼트를 조이고 차를 만들고 퇴근길에 동료들과 해장국을 먹고 싶은 마음이다. 그것이 현재 이 나라에 존재해야 할 공장의 모습 아닌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반노동정책들을 뚫고 반드시 공장으로 돌아가겠다."
-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미안하다. 이 운동을 하면서 가족을 돌아보지 못했다. 3년 기다려준 것만으로 큰절을 몇 번은 해야 할 거다. 입학식부터 졸업식까지 한 번도 챙겨주지 못한 딸과 아들이 있는데. 굴곡 없이 자라줘서 그것만으로도 아빠가 힘을 내고 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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