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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누가 이 엄마에게 돌을 던지랴

[하성태의 사이드뷰] 모성신화의 해체, 그리고 가해자의 가족에 대해

등록|2012.08.11 16:22 수정|2012.08.11 16:22

▲ <케빈의 대하여>의 한 장면. 예민한 엄마 에바와 말썽쟁이 아들 케빈. ⓒ 프리비젼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됐을까. 엄마를 하찮게 여기는 걸 넘어 경멸하는, 그리하여 세상을 온통 비뚤어지게만 바라보는 아들의 자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그 마음의 심연을 이 어머니는 도대체 어떻게 품어 안아야 할까. 아니 당사자인 그 아들은 온전히 자각하고는 있는 걸까?

망가져 버린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을 때, 과거를 찬찬히 성찰하는 일 만큼 선행되어야 할 것이 또 있을까. 영화 전체가 이러한 성찰과 숙고의 과정 자체이자 질문인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잔잔한 흥행 몰이 중이다. 불과 15개 스크린에서 1주일 만에 1만 명을 돌파하며 입소문을 낳고 있는 <케빈에 대하여>가 던져주는 충격은 실로 둔중하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 돼 있다는 경고를 드리는 바입니다) 전세계 영화팬을 경악케 했던 <다크 나이트 라이즈> 총격 사건이 바로 지난달이었다.  컬럼바인 고등학교의 참사를 비롯하여 잊을만하면 벌어지는 '경찰국가' 미국에서의 총기 난사 사고, 그 뉴스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그 범인들이 꽤나 '평범'하거나 '조용'한 인물들이었고, 그 부모 역시 사회규범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 수 십 명에 달하는 (소년소녀를 포함한)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앗아간 자식의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자식의 죄를 함께 감내해야 하는 부모는 어떤 심정일까.

만약 이 물음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는가. <케빈에 대하여>는 그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조심스레 반문한다. 만약 부모의 애정이 더 강했다면, 혹은 엄마의 모성이 지극했다면 이 '사이코패스'라 설명되는 범인들이 벌인 끔찍한 '묻지마 학살'을  막아 낼 수 있었을까?

▲ 피폐해진 삶을 이어가고 있는 현재의 에바 ⓒ 프리비젼


<마더>와 비교해도 충격적인 어느 엄마의 이야기

몇몇 평자들이 봉준호 감독이 <마더>와 비교하기도 했던 <케빈에 대하여> 역시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다. 더불어 '모성신화'의 해체에 관한 이야기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전세계로 여행을 다니던 에바(틸다 스윈톤 분)는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해 삶의 좌표를 수정해야 하는 좌절 아닌 좌절에 부딪치게 된다.

일과 아이의 양육, 두 가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삶도 버거운데, 아들 케빈은 세 살 때부터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다. 살갑게 대하는 아빠와는 달리 엄마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고 냉담하기만 한 케빈. 아들의 이런 삐뚤어진 심성은 급기야 아빠와 동생 몰래 엄마를 괴롭히는 수준에 도달한다.

영화는 과거의 충격적 사건으로 인해 망가진 에바의 일상과 심리를 관조적으로 응시하는 한편, 케빈의 성장과정을 통해 에바의 무관심과 애정부족이 아들을 비뚤어지게 했을지 모른다는 단서를 냉정하게 제시한다. 에바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던 케빈은 결국 고등학생이 된 후 학교 체육관에서 친구들을 무작위로 활로 쏴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것도 아버지가 사 준 활과 화살로. 결말에 배치한 이 충격적 사건은 <케빈에 대하여>가 만들어 놓은 난공불락의 성채와도 같다. 

▲ <케빈에 대하여>의 포스터. 그리고 현재의 케빈을 연기한 배우 이즈라 밀러. ⓒ 프리비젼


'모성'이 지니는 근원적 두려움에 대하여

피폐해진 에바의 현재 삶과 에바가 임신을 하게 되는 과거부터 (이즈라 밀러라는 배우가 탁월하게 연기한)케빈의 악행까지를 병렬구조로 연결시키는 <케빈에 대하여>는 에바의 심리 묘사에 꽤나 공을 들인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에 홀로 남은 에바는 가까스로 잡은 직장 외에 가끔 교도소에 수감된 케빈을 찾아 가는 일이 외출의 전부일 정도로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다.

허나 에바의 과거를 아무리 찬찬히 들여다본들 케빈의 이 악행은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길거리에 지나가다 (희생자의 부모로 보이는 여자에게)아무런 이유 없이 뺨을 맞아야 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집과 차가 (피해자들이 '해꼬지'를 한 것으로 보이는)붉은 색 페인트에 뒤덮이는 일상을 버텨내야 하는 에바의 삶은 말 그대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지옥 그 자체다.  

"내 아이가 안 좋은 아이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근원적 두려움이 나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린 램지 감독. 모성신화에 대해 꽤나 도발적이면서도 타당한 문제를 제기하는 이 엄마이자 여성인 여류 감독은 그러나 관객들에게 불편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던져줄지언정 섣불리 단죄하거나 위로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크린 너머 우리는 '케빈은 왜 그렇게 엄마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나'를 끊임없이 회의하고 숙고해야 하는 한편, 바, 망가져버렸을지언정 비난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모성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여성작가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케빈에 대하여>가 미국과 영국의 유수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모성에 대한 도발적이지만 합리적일 수 있는 문제제기 때문이리라.

반면 과거와 현재를 꾸준히 오고가는 공들인 편집과 그 형식이 온통 충격적인 결말만을 향하는 플롯 구조는 이 영화가 충격적 결말에 복무하기 위한 목적론적인 영화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을 여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에바를 제외한 여동생과 아버지까지 죽여 버리는 결말이 특히 그러하다.

▲ 관계를 회복할 수 없는 아들과 엄마, 그들 사이의 거리감. ⓒ 프리비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빈에 대하여>의 무심한 듯 세밀한 심리묘사는 그 울림의 강도가 만만치 않다. 예컨대, 종종 에바의 두 발을 지켜보는 카메라. 우두커니 남겨진 이 두 발은 떠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에바의 심리를 대변한다.

반면 토마토 축제 장면에서 출발하는 이 영화는 지속적으로 붉은 색 페인트나 피를 등장시키며 케빈의 악행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만국불변의 공통어인 모성을 분해하고 해체하는 한편 그로 인해 망가진 에바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엄마로서의 책임감과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 다시 말해 모성과 개인 사이의 그 미묘한 간극. 

시간이 흘러 교도소에 수감된 케빈, "지금은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아들을 에바가 힘겹게 안아줄 때, <케빈에 대하여>는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둔중하게 제기한다. 결국 영화의 질문은 에바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로 귀결되는 동시에 살아 남은자의 슬픔에 수반되는 삶의 존엄성으로 수렴된다.

'모성'에 대한 질문으로 출발한 영화가 결국 보통의 인간들이 평소 헤아리지 못하는 '가해자 가족'의 남겨진 삶까지도 생각해 볼 여지를 남겨주는 셈이다. 과연 이번 오하이오주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가해자의 가족들에게 무턱대고 비난을 쏟아 붓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폭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찬반이 분분할 질문을 잉태하고 있는 <케빈에 대하여>는 분명 더 많은 관객들과의 만남 속에 더 많은 논의를 거쳐야 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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