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뱃사공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것은?
함안에서 제일로 치는 비경, 악양루에 오르다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다."
습지가 많은 데다 비가 오면 피해가 심했던 함안 가야읍을 두고 한 말이다. 함안은 방어산, 여항산, 서북산 등이 있는 남쪽이 높고 강과 습지가 있는 북쪽이 낮은 '남고 북저'의 땅이라 예로부터 '물이 거꾸로 흐르는 땅'이라는 불렸다. 이로 인해 왕조시대에는 역수의 땅이라 하여 홀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오히려 역모는 없었고 충신이 배출된 땅이기도 하다.
함안은 강을 마주하고 있는 의령과 인근의 김해, 창원과 더불어 저수지와 습지가 많다. 특히 법수면 일대는 대송리 대평늪이 천연기념물 제346호로 지정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면적당 습지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함안의 물이 모이는 서북쪽의 남강은 곳곳에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었다. 의령과의 경계가 되는 남강가는 예부터 와룡정, 악양루, 합강정, 반구정 등 아름다운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기연당과 무진정 같은 전통 정원도 있어 풍류객들의 발길을 끈다.
함안의 군청 소재지 가야읍(군청 소재지가 함안면이 아닌가 싶지만 사실은 북쪽에 있는 가야읍)에서 1011번 도로를 따라 제법 너른 들판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길은 강을 만나게 된다. 악양 마을을 지나 제방으로 막힌 길을 에둘러 함안천을 건너면 법수면에서 대산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애절한 사연 담긴 노래가 눈에 밟히는 이곳
악양교를 건너자마자 길 오른쪽에 처녀뱃사공 노래비가 보인다. 원래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이곳에 나루가 있었단다. 법수면 윤외리 악양 마을과 대산면 서촌리를 이어주는 나루였다. 이곳은 대중가요 <처녀뱃사공>의 배경이 된 곳으로 2000년 10월 2일 노래비가 세워졌다.
이곳에 노래비가 세워진 연유는 이렇다. 1953년 9월 유랑극단 단장이었던 고(故) 윤부길(그는 남매가수 윤항기·윤복희의 아버지)씨가 읍내 가야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장으로 가던 중 이곳에 머무르게 됐다.
당시 이곳 나루터에는 군에 입대한 후 소식이 끊긴 오빠(박기준)를 대신해 두 처녀가 노를 저어 길손들을 건네주고 있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군대에 가서 소식이 끊긴 오빠를 기다리는 여동생의 애절한 사연을 담아 윤부길 씨가 노랫말을 짓고 한복남 씨가 작곡한 것이 1959년에 발표된 <처녀뱃사공>이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에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노래비 주위는 공사로 어수선했다. 콧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노래비 주위를 돌아보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노래비의 처녀상이 관능적이다. 아니 요염하기까지 하다. 오빠를 그리하며 갖은 고생을 했을 처녀 뱃사공의 역경을 어디서도 읽을 수가 없었다. 강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빛도 간절하지 않다. 조각을 한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몇 번이고 들여다보아도 알 도리가 없었다.
노래비에서 잠시 멈췄던 발길을 돌려 악양루에 올랐다. 대산면 소재지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크게 휘어지는 곳에 입구가 있어 초행자들은 놓치기 십상이다. 강변에 있는 식당에 차를 세웠더니 강아지 두 마리가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졌다. 식당 안을 들여다보니 손님은 없었다. 이번에는 강아지가 혀를 내밀어 장딴지를 훑기 시작했다. 귀여운 마음에 한동안 놀아줬더니 이번에는 땅에 뒹굴어 재롱을 피운다. 한참을 놀다 겨우 강아지를 떼놓고 강변길에 접어들었다.
더위도 한 풀 꺾였는지 강변에 선 대추나무에는 가지마다 대추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너럭바위가 있어 이곳이 입구인가 하고 다가갔더니 아래로 낭떠러지였다. 함안천이 유유히 남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도도한 풍경이었다.
너럭바위 오른쪽으로 석문이 있었다. 거대한 바위가 갈라져 생긴 석문은 악양루가는 길을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석문을 지나니 길은 벼랑으로 이어졌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날 수 있는 오솔길. 개구리가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개구리가 많은 걸 보니 혹시 뱀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돼 아이를 조심시키며 나아갔다.
강을 따라 호젓한 길이 이어지더니 갑자기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다행히 나무 층계가 있어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층계를 오르니 제법 너른 바위가 나타났고 풍광 역시 탁 트여 숨을 크게 쉬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악양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오솔길이 적잖게 긴장감을 줬다. 예전에는 정자가 속한 대산면의 산길이 불편해 법수면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단출한 악양루... 참 대단합니다
악양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로 의외로 단출했다. 악양 마을 북쪽의 기암절벽에 자리한 이 정자는 조선 철종 8년(1857)에 처음 세워 한국전쟁 이후에 복원하고 1963년에 고쳐 지은 것이라 한다. 서북산에서 발원한 함안천과 남강이 합류한 곳에 위치한 이 정자는 아래로는 남강이 흐르고 '큰들'이라고 불리는 넓은 들판과 법수면의 제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악양루라는 이름은 이곳의 풍광이 중국의 명승지인 악양에 비길 만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겠다. 사실 중국의 악양루(웨양러우)는 삼국시대 동오의 명장 노숙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누각이다. 이곳에 서니 촉나라의 유비와 형주를 다투며 동정호에서 수군을 훈련시키는 노숙이 떠올려진다.
강남 사대명루의 하나로 꼽혔던 중국의 웨양러우 북쪽에 장강이 있었다면 이곳에는 낙동강이 있고, 동정호 대신 남강이 앞을 흐르고 있다. 군산이 웨양러우 앞을 버티고 있었다면 이곳에는 방어산과 여항산이 있으니 옛 선비의 안목이 과장되지 만은 않았음을 정자에 오르니 알겠다.
사실 이곳의 정자가 대개 무슨, 무슨 정으로 불리는 데 비해 유독 악양루만 '정'이 아닌 '누(루)'로 불리고 있다. '누(樓)'와 '정(亭)'은 엄연히 구분되는데, 대개 그 용도와 규모에 따라 달리 붙여진다.
예전에 '기두헌'이라는 현판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처음 이 정자가 생겼을 때부터 '누'로 불린 것은 아닌 듯하다. 지금은 안씨 문중의 소유로 관리되고 있단다. 어찌해서 '누(루)'라고 붙였는지 그 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 규모로 보나 용도로 보아 '악양루'가 아니라 '악양정'으로 불리는 게 합당한 듯하다.
다소 비좁은 터에 자리한 정자에 오르니 풍광은 가히 일품이다. 기둥 사이로 보이는 강변 풍경을 그대로 액자에 넣어 표구를 한 듯하다. 청남 오재봉이 썼다는 '악양루(岳陽樓)' 현판의 글씨가 시원하다. 다만 일몰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이곳에 오늘은 해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춰 아쉬웠다.
정자에서 내려와 벼랑길을 더듬어 다시 강을 건넜다. '둑방'에 들어섰다. 함안면 '둑방'은 전국에서 가장 긴 강변 제방으로 알려져 있다. 둑방이 서기 전에는 큰비가 오면 이고 지고 피난을 갔다는 아픈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둑방이 들어서고 토지가 비옥하게 됐다.
정자를 감상하는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지금은 솟대가 세워지고 풍차와 꽃길이 조성돼 관광객들이 찾는 등 둑방의 운명이 바뀌었다. 둑방이 함안의 수호신이자 사랑방이 된 셈이다. 이제 둑방은 수해를 피하는 목적뿐만 아니라 길손들이 드나드는 길이 됐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혹은 마라톤을 한다.
여행자가 둑방을 찾은 데에는 사실 다른 이유가 있다. 악양루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다. 무릇 정자를 보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그 하나는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것이요, 다음은 정자가 자리한 곳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정자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알아야 정자를 제대로 보고 느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행자는 늘 성가시더라도 정자를 찾으면 먼저 정자에 올라 그 풍경을 감상하고 정자의 생김새와 현판 등을 세밀히 들여다보고 마지막으로 정자를 멀리서 바라보곤 한다.
강 건너에서 올려다보는 악양루 풍경이 근사했다.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기암절벽에 기댄 정자가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이름난 문인들이 찾지는 않더라도 지역의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을 듯하다. 다만 주위의 풍광에 비해 왜소한 정자가 내내 마음에 걸린다. 정자에 올랐을 때는 천장이 낮아 주위 자연을 감상하는데 답답함을 주더니 강 건너에서 바라보니 다시 그 '조금'의 차이가 느껴진다. 주위 자연을 짓누를 정도로 크게 짓는 것도 문제지만, 자연에 건물을 들일 때 '조금'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안목 또한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변 수풀에는 낚시꾼들이 더러 보인다. 이곳에는 메기·붕어·잉어·눈치 등 어종이 풍부해 예로부터 낚시터로 꽤나 유명했단다. 특히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강 언저리에 배 한 척이 보였다. 그 옛날 처녀 뱃사공이 젓던 삿대는 없어지고 모터가 달린 배가 이제 고기잡이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습지가 많은 데다 비가 오면 피해가 심했던 함안 가야읍을 두고 한 말이다. 함안은 방어산, 여항산, 서북산 등이 있는 남쪽이 높고 강과 습지가 있는 북쪽이 낮은 '남고 북저'의 땅이라 예로부터 '물이 거꾸로 흐르는 땅'이라는 불렸다. 이로 인해 왕조시대에는 역수의 땅이라 하여 홀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오히려 역모는 없었고 충신이 배출된 땅이기도 하다.
▲ 함안천 풍경 ⓒ 김종길
함안은 강을 마주하고 있는 의령과 인근의 김해, 창원과 더불어 저수지와 습지가 많다. 특히 법수면 일대는 대송리 대평늪이 천연기념물 제346호로 지정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면적당 습지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함안의 물이 모이는 서북쪽의 남강은 곳곳에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었다. 의령과의 경계가 되는 남강가는 예부터 와룡정, 악양루, 합강정, 반구정 등 아름다운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기연당과 무진정 같은 전통 정원도 있어 풍류객들의 발길을 끈다.
함안의 군청 소재지 가야읍(군청 소재지가 함안면이 아닌가 싶지만 사실은 북쪽에 있는 가야읍)에서 1011번 도로를 따라 제법 너른 들판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길은 강을 만나게 된다. 악양 마을을 지나 제방으로 막힌 길을 에둘러 함안천을 건너면 법수면에서 대산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애절한 사연 담긴 노래가 눈에 밟히는 이곳
▲ 처녀뱃사공 노래비 ⓒ 김종길
악양교를 건너자마자 길 오른쪽에 처녀뱃사공 노래비가 보인다. 원래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이곳에 나루가 있었단다. 법수면 윤외리 악양 마을과 대산면 서촌리를 이어주는 나루였다. 이곳은 대중가요 <처녀뱃사공>의 배경이 된 곳으로 2000년 10월 2일 노래비가 세워졌다.
이곳에 노래비가 세워진 연유는 이렇다. 1953년 9월 유랑극단 단장이었던 고(故) 윤부길(그는 남매가수 윤항기·윤복희의 아버지)씨가 읍내 가야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장으로 가던 중 이곳에 머무르게 됐다.
당시 이곳 나루터에는 군에 입대한 후 소식이 끊긴 오빠(박기준)를 대신해 두 처녀가 노를 저어 길손들을 건네주고 있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군대에 가서 소식이 끊긴 오빠를 기다리는 여동생의 애절한 사연을 담아 윤부길 씨가 노랫말을 짓고 한복남 씨가 작곡한 것이 1959년에 발표된 <처녀뱃사공>이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에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노래비 주위는 공사로 어수선했다. 콧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노래비 주위를 돌아보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노래비의 처녀상이 관능적이다. 아니 요염하기까지 하다. 오빠를 그리하며 갖은 고생을 했을 처녀 뱃사공의 역경을 어디서도 읽을 수가 없었다. 강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빛도 간절하지 않다. 조각을 한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몇 번이고 들여다보아도 알 도리가 없었다.
▲ 용감한 녀석들 ⓒ 김종길
노래비에서 잠시 멈췄던 발길을 돌려 악양루에 올랐다. 대산면 소재지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크게 휘어지는 곳에 입구가 있어 초행자들은 놓치기 십상이다. 강변에 있는 식당에 차를 세웠더니 강아지 두 마리가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졌다. 식당 안을 들여다보니 손님은 없었다. 이번에는 강아지가 혀를 내밀어 장딴지를 훑기 시작했다. 귀여운 마음에 한동안 놀아줬더니 이번에는 땅에 뒹굴어 재롱을 피운다. 한참을 놀다 겨우 강아지를 떼놓고 강변길에 접어들었다.
더위도 한 풀 꺾였는지 강변에 선 대추나무에는 가지마다 대추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너럭바위가 있어 이곳이 입구인가 하고 다가갔더니 아래로 낭떠러지였다. 함안천이 유유히 남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도도한 풍경이었다.
▲ 입구에 석문이 있어 정자로 가는 길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 김종길
너럭바위 오른쪽으로 석문이 있었다. 거대한 바위가 갈라져 생긴 석문은 악양루가는 길을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석문을 지나니 길은 벼랑으로 이어졌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날 수 있는 오솔길. 개구리가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개구리가 많은 걸 보니 혹시 뱀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돼 아이를 조심시키며 나아갔다.
강을 따라 호젓한 길이 이어지더니 갑자기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다행히 나무 층계가 있어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층계를 오르니 제법 너른 바위가 나타났고 풍광 역시 탁 트여 숨을 크게 쉬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악양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오솔길이 적잖게 긴장감을 줬다. 예전에는 정자가 속한 대산면의 산길이 불편해 법수면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단출한 악양루... 참 대단합니다
▲ 악양루가는 길은 강변 벼랑길이다. ⓒ 김종길
▲ 벼랑을 올라서야 정자에 이를 수 있다. ⓒ 김종길
악양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로 의외로 단출했다. 악양 마을 북쪽의 기암절벽에 자리한 이 정자는 조선 철종 8년(1857)에 처음 세워 한국전쟁 이후에 복원하고 1963년에 고쳐 지은 것이라 한다. 서북산에서 발원한 함안천과 남강이 합류한 곳에 위치한 이 정자는 아래로는 남강이 흐르고 '큰들'이라고 불리는 넓은 들판과 법수면의 제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 이곳의 일몰이 아름답다고 했는데 오늘은 볼 수 없었다. ⓒ 김종길
▲ 악양루는 조선 철종 8년(1857)에 처음 세웠다고 한다. ⓒ 김종길
악양루라는 이름은 이곳의 풍광이 중국의 명승지인 악양에 비길 만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겠다. 사실 중국의 악양루(웨양러우)는 삼국시대 동오의 명장 노숙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누각이다. 이곳에 서니 촉나라의 유비와 형주를 다투며 동정호에서 수군을 훈련시키는 노숙이 떠올려진다.
강남 사대명루의 하나로 꼽혔던 중국의 웨양러우 북쪽에 장강이 있었다면 이곳에는 낙동강이 있고, 동정호 대신 남강이 앞을 흐르고 있다. 군산이 웨양러우 앞을 버티고 있었다면 이곳에는 방어산과 여항산이 있으니 옛 선비의 안목이 과장되지 만은 않았음을 정자에 오르니 알겠다.
사실 이곳의 정자가 대개 무슨, 무슨 정으로 불리는 데 비해 유독 악양루만 '정'이 아닌 '누(루)'로 불리고 있다. '누(樓)'와 '정(亭)'은 엄연히 구분되는데, 대개 그 용도와 규모에 따라 달리 붙여진다.
예전에 '기두헌'이라는 현판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처음 이 정자가 생겼을 때부터 '누'로 불린 것은 아닌 듯하다. 지금은 안씨 문중의 소유로 관리되고 있단다. 어찌해서 '누(루)'라고 붙였는지 그 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 규모로 보나 용도로 보아 '악양루'가 아니라 '악양정'으로 불리는 게 합당한 듯하다.
▲ 청남 오재봉이 썼다는 악양루 현판 ⓒ 김종길
▲ 남강과 함안천이 만나는 기암절벽에 악양루가 있다. ⓒ 김종길
▲ 정자 안으로 들어온 풍경 ⓒ 김종길
다소 비좁은 터에 자리한 정자에 오르니 풍광은 가히 일품이다. 기둥 사이로 보이는 강변 풍경을 그대로 액자에 넣어 표구를 한 듯하다. 청남 오재봉이 썼다는 '악양루(岳陽樓)' 현판의 글씨가 시원하다. 다만 일몰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이곳에 오늘은 해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춰 아쉬웠다.
정자에서 내려와 벼랑길을 더듬어 다시 강을 건넜다. '둑방'에 들어섰다. 함안면 '둑방'은 전국에서 가장 긴 강변 제방으로 알려져 있다. 둑방이 서기 전에는 큰비가 오면 이고 지고 피난을 갔다는 아픈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둑방이 들어서고 토지가 비옥하게 됐다.
정자를 감상하는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 남강과 함안천이 이곳에서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 간다. ⓒ 김종길
▲ 수해를 막던 둑방에 풍차가 생기고 솟대가 세워지면서 함안의 명소가 되었다. ⓒ 김종길
지금은 솟대가 세워지고 풍차와 꽃길이 조성돼 관광객들이 찾는 등 둑방의 운명이 바뀌었다. 둑방이 함안의 수호신이자 사랑방이 된 셈이다. 이제 둑방은 수해를 피하는 목적뿐만 아니라 길손들이 드나드는 길이 됐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혹은 마라톤을 한다.
여행자가 둑방을 찾은 데에는 사실 다른 이유가 있다. 악양루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다. 무릇 정자를 보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그 하나는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것이요, 다음은 정자가 자리한 곳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정자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알아야 정자를 제대로 보고 느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행자는 늘 성가시더라도 정자를 찾으면 먼저 정자에 올라 그 풍경을 감상하고 정자의 생김새와 현판 등을 세밀히 들여다보고 마지막으로 정자를 멀리서 바라보곤 한다.
▲ 강 건너에서 본 악양루 ⓒ 김종길
강 건너에서 올려다보는 악양루 풍경이 근사했다.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기암절벽에 기댄 정자가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이름난 문인들이 찾지는 않더라도 지역의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을 듯하다. 다만 주위의 풍광에 비해 왜소한 정자가 내내 마음에 걸린다. 정자에 올랐을 때는 천장이 낮아 주위 자연을 감상하는데 답답함을 주더니 강 건너에서 바라보니 다시 그 '조금'의 차이가 느껴진다. 주위 자연을 짓누를 정도로 크게 짓는 것도 문제지만, 자연에 건물을 들일 때 '조금'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안목 또한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변 수풀에는 낚시꾼들이 더러 보인다. 이곳에는 메기·붕어·잉어·눈치 등 어종이 풍부해 예로부터 낚시터로 꽤나 유명했단다. 특히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강 언저리에 배 한 척이 보였다. 그 옛날 처녀 뱃사공이 젓던 삿대는 없어지고 모터가 달린 배가 이제 고기잡이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 삿대로 가던 나룻배는 없어지고 모터가 달린 배가 고기잡이를 한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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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 송고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