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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의 멋진 언니들과 함께 이 밤을

[서평] 이화경의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

등록|2012.08.17 11:05 수정|2012.08.17 11:05
줄 듯 말 듯한 마음,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태도, 할 듯 안 할 듯 엉거주춤한 고백으로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남자. 사실상 까도남(까칠하고 도도한 남자)들의 원조 격인 매력남 미스터 다아시를 탄생시킨 <오만과 편견>의 저자 제인 오스틴은 첫 사랑에 실패한 후 평생을 혼자 살았다. 그리고 생이라는 캄캄한 숲 속을 헤쳐 나갈 때 필요한 것은 자립의 등불이라고 믿으며 여섯 살 연하남의 청혼을 과감히 거절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는 박인환의 시에 등장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버지니아 울프는 아들들은 명문대학에 보내면서도 딸들은 집에 가둬놓는 가부장적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녀의 꿈은 제 손으로 돈을 벌어 헌책방에서 읽고 싶었던 책을 한 아름 사고, 원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원고지와 잉크를 사는 것이었다.

인생이 힘들고 고달플 때, 외롭고 쓸쓸할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며 울고 싶을 때 사람들은 나보다 더 힘들었거나 더 외로웠거나 더 고통스러웠던 누군가와 얘기 나누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 둘로부터 '나는 이랬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받기를 바란다.

여기 열 명의 언니들이 있다. 인생의 쓴맛, 조직의 쓴맛을 확실히 보고도 기죽지 않는 언니들. 그리고 주체적으로 뜨겁게 인생을 살다 간 멋진 언니들. 제인 오스틴, 조르주 상드, 실비아 플라스, 프랑수아즈 사강, 버지니아 울프, 잉게보르크 바흐만, 로자 룩셈부르크, 수전 손택, 한나 아렌트, 시몬 드 보부아르가 바로 그들이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향해 제대로 한 방씩을 날린 멋진 언니들. 나는 이들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 19세기에서 21세기까지, 급변하는 역사의 한 가운데서 세상을 향해 주저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이들의 삶은 무척이나 극적이면서도 매혹적이다.

소설가이자 광주대 문예창작과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이화경 교수는 젊은 날 힘들고 방황할 때 역사상 가장 지적이고 매혹적인 이 열 명의 여류작가들의 삶에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었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웅진 지식하우스)는 이화경 교수가 이 열 명의 작가들과 교감하고 소통한 기록이다. 외롭고 울적할 때,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절망스러울 때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를 읽다 보면 땅을 차고 뛰어 올라 세상을 좀 더 치열하고 용기 있게 살아가야겠다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혁명의 현장에서 죽기를 소원한 로자 룩셈부르크

▲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 책표지 ⓒ 웅진 지식하우스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에 이름을 올린 열 명의 언니들 모두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와 강한 자존감을 가졌지만 그 중 가장 강한 카리스마와 강렬한 인상으로 내게 다가온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다. 혁명의 상징 체 게바라 못지않은 강한 혁명가로 각인된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섯 살 때 골수 결핵에 걸린 후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갖게 됐지만, 고통과 병마와 고독은 오히려 그녀에게 날카로운 지성과 예민한 감성을 갖게 했다.

이미 중학생 시절에 순진한 문학 소녀에서 펜을 칼처럼 휘두를 정치 행동가로 진로를 바꾸고 '모욕당하고 공격당한 사람들과의 연대는 절대적인 명령이자 실존적인 필연'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사회주의자로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육체적 장애를 딛고 운명과 대결하며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는 각오를 끝까지 고수하는 로자,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조국이며, 자유·평등·박애 앞에서 어떤 국경선도 인정하지 않았던 로자의 모습에선 매혹을 넘어 불온함마저 느껴진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젊어서는 누구나 혁명가로 살고 싶다가도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면 쪼그라든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비해 그녀의 모습은 두렵기조차하다며 저자는 고개를 떨군다.

"한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토로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꿈꾸었던 20대들은 이제 보잘것없는 중년의 삶을 확 바꿔줄 로또 대박을 꿈꾼다. 더러는 한때나마 혁명가였고 왕년의 투사였던 이들은 권력으로 향하는 길로 일찌감치 들어섰다. 더러는 의회 의석에 한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진정한 뚜벅이들을 만나기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힘들어졌다. 혁명이라니, 개혁도 어려운 판에. 내 코가 석자인데 수정이라니, 개량이라니. 그저 현상유지만 해도 감사할 판국에."(본문 198~199쪽)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의 지방 법정에서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게토로 이주시킨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진행됐다. 방청객들은 잔악하기 이를 데 없는 끔찍한 괴물이 아니라 너무도 평범한 남자가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이기면 훈장을 받고 패배하면 교수형에 처해질' 행위들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1995년 7월 18일에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이유로 광주 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 노태우를 불기소처분했다.)"(본문 237쪽)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는 이데올로기적 맹신이나 악독한 동기가 한 인간을 악마로 만들기도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음, 즉 무사유야말로 악마적인 심연에 쉽게 빠져들게 하는 것임을 통찰했다. 아이히만에게 양심이란 명령받은 일을 수행하지 않을 때 느끼는 가책일 뿐이었기에 유대인을 학살했던 죄의식이나 가책은 전혀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재판을 통해 한나 아렌트는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간이라면 목숨 걸고 사유해야 한다는 진실을 담은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저술한다. 그녀는 악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악한 일을 행한 인간이 '평범할 수' 있으며,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존재하며 무사유가 악과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가 전하는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최근 안산 SJM 공장에서 일어난 노조원 폭행사건을 계기로 컨택터스를 비롯한 용역업체들의 용역폭력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특히 용역 아르바이트로 투입됐던 한 대학생의 인터뷰 기사가 떠올랐다.

'비난은 자신들이 아닌 용역업체가 받아야 한다'며, 자신은 다음 학기 등록금을 버는 것이 더 절실하다고 말하던 그 대학생에게서 문득 한나 아렌트의 무사유야말로 악마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존재한다는 말이 무섭도록 섬뜩하게 다가왔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악행을 저지를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저질렀는지를 결코 깨닫지 못한 인간에 불과했다."(본문 24쪽)

내 속에 있는 아이히만이 존재를 나타내지 않도록 깊이 있게 사유하고 고민하며 살라는 한나 아렌트의 일갈을 들리는 듯하다. 열 명의 언니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내 삶을 일깨운다. 열 명의 언니들과의 만남은 뜨뜻미지근하게 살아온 내 삶에 뜨거움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 좋은 계기였던 것 같다.
덧붙이는 글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 (이화경 씀 | 웅진지식하우스 | 2011. | 1만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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