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빛과 소금'의 삶을 산 김교신 선생
[서평] 니이호리 구니지의 <김교신의 신앙과 저항>
▲ 책겉그림 〈김교신의 신앙과 저항〉 ⓒ 익두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얼개로 구성돼 있습니다. 일본인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 <성서조선>과 양정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서의 12년 삶,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에 징집된 5천 여 명의 동포들과 함께 한 그의 마지막 삶이 그것입니다. 일제치하 많은 신앙인들이 현실도피적인 내세 지향적 신앙관을 부추기던 그 때에 선생은 오히려 민족주의와 애국계몽 운동을 통한 현실타계형 신앙관을 확립해나가려고 애썼던 것이죠.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입신(立身)을 통해 적국을 쓰러트리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졌다고 하죠. 그것이 어머니와 아내와 장녀를 조선 땅에 남겨 놓은 채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른 이유였다고 합니다. 학문을 닦아 조국의 수치를 설욕코자 하는 비장한 각오가 그에게 작용했던 것입니다.
선생이 품은 입신양명의 꿈은 도쿄 유학 1년 뒤에는 또 다른 입신(入神)의 세계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1920년 4월, 우시고미 야라이마치의 홀리네스 교회에 다닌 게 그것이라고 하죠. 그것은 어릴 적부터 익힌 유교의 세계관보다 기독교의 세계관이 훨씬 심오한 까닭이었다고 합니다. 1920년 6월 16일, 선생의 생일날 시미즈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도 그런 이유였고요.
그런데 교회의 내분사태로 인해 시미즈 목사가 쫓겨나는 사건을 목격한 선생은 1920년 11월에 교회를 떠나고 말죠. 다만 교회를 떠나기 직전인 10월 15일에 선생은 우치무라의 저서인 <구안록(求安錄)>을 독파했고, 교회를 떠난 뒤인 11월 초순에는 우치무라 댁을 방문하여 첫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듬해인 1921년 1월부터 다음해 가을까지, 선생은 우치무라의 로마서 강의를 통해 '순전하고 바른 신앙심'을 다시금 회복했다고 하죠.
"6인의 동지들은 밖으로 일본제국주의와 안으로는 기성 교회, 이렇게 두 세력과 대립되었다. 정의감과 순수한 신앙심에 서서 깃발을 올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가시밭길을 걷는 여행이었다. 그래도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 성결교회의 배선표 목사와 장로교회의 김우현 목사였다. 그 외에도 적으나마 협력자가 있었으나 출발부터 사면초가 상태였다."(47쪽)
1924년부터 우치무라 선생이 이끈 성서모임에 참석한 조선인 6인을 두고서 이야기한 부분입니다. 선생을 비롯한 함석헌․송두용․정상훈․류석동․양인성 등이 그들이죠. 그들은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거나 중도에 차례로 귀국하여 교사가 된 이들이 많았다고 하죠. 그들은 함께 <성서조선>을 발간했고, 자신들끼리 모여서 집회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성 교회에서는, 일본인 우치무라를 스승으로 모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향해 민족정신이 없는 무리들이었다고 비난했다고 하죠.
왜 그들은 조직교회에 발을 딛지 않았던 걸까요? 이미 선생은 일본에 있는 성결교회의 내분사태를 경험한 바가 있고, 또 한국 땅에 와서도 조국교회에 나갔지만 심령이 소생하기보다는 오히려 껍데기가 돼 버린 종교심으로 인해 그의 신앙심이 질식하게 된 이유였겠죠. 선생과 동갑내기였던 함석헌의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라는 술회를 읽어보면 충분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성서조선>의 창간 다음해인 1928년 3월, 선생은 서울의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자리를 옮긴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무려 12년 동안 교편을 잡게 되는데, 특별히 손기정 선수를 배출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하죠. 사실 식민지 지배 하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에 스포츠마한 것보다 더 안성맞춤인 것도 없었을 듯합니다. 1935년 11월 3일의 '메이지신궁대회' 때 마라톤 레이스가 열리던 날, 선생은 택시까지 전세를 내서 손기정 선수를 격려했다고 하죠. 결국 손기정 선수는 그 대회에서 당당히 1위로 테이프를 끊었다고 합니다.
"짐작건대 지난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곳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얼어 죽은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연못 밑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121쪽)
이 책에도 나와 있는, <성서조선> 제158호(1942년 3월)에 실린, 그의 <조와>(弔蛙, 개구리를 애도함)라는 권두언입니다. 선생은 엄동설한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개구리에 빗대어 조선민족의 희망을 바라봤다고 하죠. 문제는 그 일로 인해 <성서조선>이 모조리 압수되고 얼마 뒤 폐간처분 당하고, 곧이어 선생과 함께 한 무교회 동지들과 독자들도 속속들이 검거퇴고 투옥된다고 하죠.
1년 뒤 감옥에서 해방된 선생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결단하게 됩니다. 엘리트 지식계 사람들을 상대해왔던 이전과는 달리, 고통 받는 민중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삶이 그것입니다. 선생이 전남 소록도에 있는 나환자 시실을 방문하여 돌본 것도 그러하며, 함경남도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에 징용돼 있는 5천 여 동포들과 함께 석탄차를 끌며 그들의 육체적 고통 완화와 인권회복에 힘쓴 삶도 그것입니다. 다만, 선생은 그곳에서 감염된 발진티푸스로 인해, 45세를 일기로 그 생을 마감해야 합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이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 말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빛과 소금'은 곧잘 이야기하지만 언행이 일치된 삶이 없기에,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신앙인들의 말을 공허한 메아리처럼 생각하고 말겠죠.
그에 비해 김교신 선생은 무엇이 순전한 신앙인의 삶인지, 그의 말과 삶으로 똑똑하게 보여줬습니다. 그 선생이 살아내셨던 실천적인 신앙의 삶을 들여다보노라면, 오늘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괜히 숙연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세지향적인 신앙관에 길들여져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와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이정표는 무엇이고, 이 땅에 남길 발자취는 또 어떤 것인지, 김교신 선생의 삶을 통해 깊이 돌이켜봤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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