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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한 글자 속에서 나만의 무기를 찾다

캘리그래퍼 홍지혜씨

등록|2012.08.29 14:31 수정|2012.08.29 14:31
라면 '꼬꼬면'에는 있지만 '진라면'에는 없다. 드라마 <거침없이 하이킥>에는 있지만 <신사의 품격>에는 없다. 소주 '처음처럼'에는 있지만 맥주 '카스'에는 없다. 무엇일까? 이 글씨들이 어떤 글자체로 쓰여 있는지 떠올린다면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전자는 손으로 쓴 글씨들이다. 후자는 활자체다. 손으로 쓴 글씨를 다른 말로 '캘리그래피(Calligraphy)'라고 한다.

캘리그래피는 2000년대 중반부터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라면·과자·음료수 등 식품 포장에서부터 책 표지나 영화 포스터, 거리 간판에도 자주 등장한다. 글자에 디자인적 요소를 더해, 글자의 본래 목적인 의미 전달뿐만 아니라 정서와 감정, 독특한 느낌까지 함께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캘리그래피의 가장 큰 매력이다.

지난 21일 한 음식점에서 만난 홍지혜(24)씨의 명함에는 '손글씨 쓰는 디자이너'라고 적혀 있다. 글귀 옆에는 '홍감각'이라고 새긴 빨간 도장을 찍었다. 그는 직장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지금은 캘리그래피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집중력 위해 시작한 서예, 캘리그래피로 이어져

캘리그래퍼 홍지혜 씨.직접 쓴 글로 액자와 엽서를 제작했다. ⓒ 심혜진


그는 14년 전인 열 살 때부터 캘리그래피와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기억한다. 부모님은 그가 산만하다며 집중력 기르는 데 좋다는 서예학원에 보냈다. 물론, 강제로.

"당연히 가기 싫었죠. 억지로 시작했는데 다행히 서예가 저한테 맞았는지 차츰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학원에서 붓글씨 쓰는 것이 당연한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서예 경시대회에 나가 크고 작은 상도 받았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학원을 그만 두었고, 서예는 서서히 잊혀졌다. 그의 꿈은 '앙드레 김' 같은 의상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에서는 의상디자인과 시각디자인을 놓고 고민하다 시각디자인을 선택했다. 시각디자인이 조금 더 전망이 밝아보였기 때문이다.

스물 두 살 무렵, 텔레비전 광고에 등장하는 독특한 글자들이 눈에 띄었다. 붓글씨 같은 느낌의 글자들. 그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작업을 뭐라 지칭하는지, 어디서 배울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저런 글자를 뭐라고 하지?" 하고 수소문했다. 어느 날, '이상봉 디자이너가 한글을 의상 디자인에 사용하기 위해 한 서예가에게 글자 쓰는 작업을 맡겼다더라' 하는 소식을 듣게 됐다. 홍씨는 바로 그 서예가 이름을 검색했다. 이름 옆에서 '캘리그래피'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삐뚤빼뚤한 글자 속에서 '나만의 글자체' 찾아야

캘리그래피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을 알아보는 데 두 달이 걸렸다. 학원에서는 붓으로 선 긋는 연습부터 다시 시작했다. '꿈틀꿈틀' '미끌미끌' '느릿느릿'과 같은 단어를 써오는 것이 과제로 주어졌다. 집에 돌아가면 같은 글자를 수도 없이 썼다. 디자인적 요소를 가미하되 단어의 뜻을 살리고, 알아보기도 쉽게 표현하는 것은, 창작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스무 명이 써온 글자는 저마다 독특한 스무 개의 느낌을 뿜어냈다.

그는 그곳에서 '똑같이 쓰기의 달인'으로 통했다.

"캘리그래피 작품을 보면 그것과 비슷하게 쓸 수 있었어요. 선생님들 글자체도 금방 따라하게 되더라고요. 아마 어렸을 때부터 붓글씨를 많이 써서 그런 것 같아요." 

동료들에게 그는 부러운 재능을 가진 이였다. 강사도 그에게 '글자체를 보고 특징을 빨리 잡아낸다'고 칭찬했다.

마지막 수업 날, 강사는 학생 가운데 최우수학생을 선발했다. 다들 기술적으로 뛰어난 그가 당연히 상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도 내심 기대를 했다. 하지만 교사는 그를 지목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가 아직 '자신 만의 글자체'를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충격이었죠. 다른 사람의 글자체를 따라 쓸 수 있다는 것이, 저만의 글자체를 표현하는 데는 방해가 된 것 같아요. 속상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 누구도 따라 쓸 수 없는 자신만의 글자체를 만드는 것은, 캘리그래피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를 벼리는 일이기도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한동안 붓을 잡지 않았다. 자신이 쓰는 모든 글자가 누군가의 것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강사가 자신에게 남긴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선생님이 저에게 '스승을 찾으려하지 말고,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삐뚤빼뚤한 글자 속에서 너만의 글자체를 찾아봐라'라고 하셨어요. 그땐 무슨 말인 줄 몰랐는데, 제가 그동안 너무 특별한 것만 찾으려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편안한 마음으로 글자를 바라 봤다. 자신이 쓴 글자를 인터넷 블로그에 올려 평범한 사람들의 평을 들으려고도 했다. 블로그 이웃 가운데 그의 글자를 알아봐 주는 이들이 생겼다.

"가늘면서 부드러운 글씨체가 제 스타일이라고 하시더군요. 아직은 내 글씨가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 조금 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주민들의 이야기를 캘리그래피에 담아 전시회 열 계획

홍씨는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대표 임승관)에서 진행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동암에서 백운까지 - 예술이 노니는 마을' 참여 작가로 선정돼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참여 작가 일곱 명과 함께 문화를 매개로 지역 주민을 만날 방법을 구상 중이다. 11월엔 개인전도 열 생각이다.

"주민들을 직접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걸 글자로 표현해서 전시하면 어떨까 해요. 주민들의 사연이 글자 그 자체로 표현이 되는 거죠"

지난 24일 아트홀 소풍(십정동 소재)에서 열린 '제주-강정이야기 콘서트'에는 '인천시민에게도 강정의 바다는 소중합니다'라는 문구를 적어 기증했다. 그는 "의미 있는 일에 재능기부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글자 옆에 '홍감각'이라고 새긴 빨간 도장을 찍는다. '감각'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다.

"캘리그래피로 당장 이름을 알리기는 쉽지 않지만, 길게 보고 가려고요. 제 글자를 보고 많은 분들이 행복해 하신다면 좋겠어요"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주)부평신문사(http://bpnews.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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