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마을 부자'된 이유, 이겁니다
[골목탐험⑦] 1970년대 초가없애기 운동, '슬레이트 부자' 만들기도
골목은 기억박물관이다. 발전이 더딘 탓에, 사람들 관심에서 벗어난 탓에 오래된 풍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간혹 골목을 거닐다 1960~7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낡았다' '고쳐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이 많지만 몇 백년 전 집과 길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럽이나 미국의 유서 깊은 도시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을 보면 완전히 수긍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좀더 애정을 갖고 바라보고 가꾸면 골목은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오랫동안 골목을 탐험하면서 발견한 보물들을 여기에 소개한다. - 기자말
어린 시절 지붕 타기 놀이, 슬레이트 무너져 혼이 나기도
어린 시절 지붕은 보물창고였다. 주로 골목에서 공놀이나 제기차기, 원반던지기 등을 하던 시절, 지붕엔 그런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쌓여갔다.
물론 처음엔 지붕이 보물창고란 걸 알 리가 없었다. 땅에선 지붕이 보이지 않았고, 꼬맹이들이 '껑충' 뛰기를 해본다 한들 지붕 끝이라도 보일 리가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2층 옥상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고, 옥상에 올라가서 비로소 다른 집 지붕을 볼 수 있었다. 세상에! 다른 집 지붕엔 별 게 별 게 다 있었다. 지난달 골목에서 야구를 하다 쳐올린 테니스공과 물렁고무공, 야구공 대신 던지다 홈런 스윙 앞에 크게 날아간 배드민턴공, 새 것에 가까운 지우개, 메텔과 철이를 태우고 달리는 은하철도999 장난감까지.
지붕의 그런 풍경을 보고 눈이 뒤집히지 않을 아이는 없었다. 우리는 특공대를 짜서 누가 지붕으로 가서 저 귀하디귀한 것들을 가져올지 의논해야 했다. 선뜻 나서는 아이는 없었다.
지붕에서 물건을 가져오는 작전은 꽤 신중해야 했다. 우선 특공대를 짜서 역할을 나눴다. 물건을 가져오는 A, 물건을 받는 B, 망보는 C였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역시 A였다. 몸이 날래고 재빨라야 했다. 몸이 무거워서도 안 된다. 자칫하면 지붕이 무너질 수 있었다. 담을 탈 줄 알아야 하고, 소리없이 지붕을 타야 했다. 몸무게 배분을 잘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꽤 지붕을 잘 탔다. A 역할을 많이 맡았다는 뜻이다. 몸이 날래진 않았지만 어딜 밟아야 할지를 알았다. 그 당시 지붕 재질은 슬레이트가 많았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잘못 밟으면 '와지직'하며 부서지기 좋았다. 슬레이트는 가볍고 설치하기 좋았지만 그만큼 무게를 견딜 힘은 없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기 위해 먼저 나무로 틀을 짠다. 슬레이트 지붕은 나무틀 위에 얹는다. 발을 디뎌야 할 곳은 나무틀이었다. 그 구조만 알면 슬레이트 지붕을 밟는 것은 쉬웠으나 조심성 없이 내딛는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런 아이들이 A 역할을 맡으면 슬레이트는 어김없이 '뿌지직' 거렸고, 집 안에선 '거 누구야'하는 소리가 벼락같이 들렸다. 그 때가 되면 B와 C는 '빨리 도망쳐'라고 큰소리 치고는 제 살길 찾아 달아나기 바빴다. 그 상태에서 A는 대부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우는 상으로 지붕에 매달리게 된다. 작전이 한 번 실패로 돌아가면 꽤 오랜 시간은 지붕 접근 금지가 되니 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슬레이트 지붕에 비해 기와 지붕은 무척 쉬웠다. 훨씬 튼튼했기 때문이다. 슬레이트 지붕처럼 가장자리만 밟는 게 아니라 전체 어디든지 밟아도 됐다. 즉 무너져 내릴 염려는 없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가끔씩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생긴 틈이었다. 잘못 밟으면 크게 '달그락' 소리가 난다는 점이 문제였다. 여기에서도 힘 조절이 중요했다. 슬레이트 지붕에 비해 기와 지붕 침투가 쉬운 건 맞았지만 아무한테나 시킬 순 없었다. 이래저래 A는 한 번 성공한 사람이 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거의 역할이 굳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 슬레이트 지붕은 주재료인 석면이 암을 일으킨다 해서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석면이 뭔지, 몸에 나쁜지도 모르던 시절 너도나도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지만 지금은 여력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슬레이트를 걷어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간혹 슬레이트 지붕을 보게 된다. 그 때마다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르면서 석면 공포는 저멀리 사라진다. 추억의 힘이란, 상상의 힘이란.
7년 동안 사라진 초가 240만채, 대부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어
슬레이트. Slate. 지붕을 덮는 데 쓰는 천연 점판암의 얇은 석판 또는 시멘트와 석면을 물로 개어 센 압력으로 눌러서 만든 얇은 판.
197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 집은 대부분이 초가였다. 상황이 바뀐 건 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국 규모로 벌어지면서 집 뚜껑이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싹' 바뀌었다.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뀐 집은 240만채. '슬레이트 특수'에 따라 슬레이트 부자가 곳곳에서 생겼다.
"지붕개량사업으로 창원군에서는 3만9261채의 초가집 중 170채만을 남기고 3만9091채가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었다. 함안군에서는 초가 4만898채 중 95%가 지붕개량을 했다는 통계숫자이고 보면 '슬레이트부자'의 등장설은 사실성이 짙은 이야기.…고씨는 슬레이트 지붕공사로 돈을 좀 모으자 비공식대리점을 차려 슬레이트판매도 겸했는데 7년 만에 자기마을에서 2번째 가는 부농이 되었다.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장정식(27)씨는 원래 농사를 짓다가 지붕개량사업이 시작되자 바로 도시로 나가 기술을 습득, 일대 각 부락의 일을 도맡아 했다. 그래서 3년 동안에 논 3마지기를 사들여 어엿한 자낙농이 되기도 했다." - <경향신문>(1978년 5월 27일)
슬레이트 대리점을 차린 사람들이 큰 돈을 만지면서 부자대열에 올랐지만 가장 크게 이익을 본 사람들은 역시 슬레이트를 생산하는 기업들이었다.
슬레이트를 만드는 몇몇 기업들은 거의 독점공급하며 돈을 거머쥐었다. 돈 냄새에 민감한 증권가가 그 사실을 놓칠 리 없었다. 1972년 국내 상장기업 가운데 제일 높은 이익배당을 실현한 기업은 한국스레트로 연 28%를 투자자들에게 지급했다. 다음해에는 배당금이 36.61%로 더욱 높아지면서 성장속도를 더욱 높였다.
한국스레트와 함께 슬레이트 생산을 양분하던 업체는 금강스레트. 두 기업은 이후 벽산(2011년 매출 2528억 원)과 KCC그룹(2010년 매출 4조5000억 원)으로 이어진다.
"전기(28%)보다 2%가 인상된 30%의 배당을 실시한 바 있는 한국스레트는 지난 2년간 무려 5배의 영업신장을 보였다." - <매일경제>(1974년 7월 22일)
불과 10여 년 만에 초가지붕이 사라지는 대신 우리나라 지붕은 죄다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기업 두 곳이 급성장한다. 한국의 지붕을 바꾸는 데 10년이면 충분했고, 불과 얼마 전까지 대부분 집이 초가였다는 사실은 기억 밖으로 사라진다.
새마을운동의 상징으로 외신까지 탄 슬레이트 지붕이지만 그 역사가 오래가진 못했다. 1980년대부터 석면이 폐암을 일으킨다는 보도가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물론 정부와 언론에서는 석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길 꺼려했다. 슬레이트 지붕만큼 싸고 시공이 간단한 재료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석면 피해를 입은 사람들 사례가 보고되기 시작했고, 몇몇 개혁언론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석면 사용 규제대책을 세우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1990년대 주머니 사정이 두둑해진 사람들은 건강 문제에 관해 예전보다 민감했다. 환경문제가 본격 제기된 시대였다. 싼 맛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사람들은 여유가 생기자 슬레이트 지붕을 걷어버렸다. 1970년대 초가가 빠르게 사라진 것처럼 1990년대 슬레이트 지붕이 빠르게 사라진다.
이제 도시에서 슬레이트 지붕은 보기 힘들어졌다. 대부분 집들이 아파트로 바뀌었고, 거리는 눈에 띄게 환해졌다. 사람들은 옛날 풍경을 전시한 박물관에 가서 슬레이트 지붕을 보곤 "옛날엔 우리집도 저랬었지"라면서 추억에 잠겼다.
나 또한 그랬다. 골목을 누비고, 옥상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는 여행을 하기 전까진 말이다. 크게 몰아친 파도가 돌아간 뒤 백사장에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1970년대 거세게 몰아친 슬레이트 광풍은 골목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겼다. 모두들 다 철수할 때 미처 따라가지 못한 게 골목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골목은 근대사 박물관이라 부를 만하고, 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대로변이나 신도시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느리게 시대를 사는 셈이다.
명품골목이 되는 길은 좋은 재료와 애정... 앞으로는 가능할까
명품이란 좋은 재료를 써서 만든 물건을 꾸준히 관심을 두고 가꿀 때 만들어진다. 아무리 좋은 재료라도 애정과 관심을 쏟지 않으면 단지 값비싼 유행품일 뿐이다. 애정과 관심을 쏟더라도 나쁜 재료라면 오랫동안 쓰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슬레이트 지붕은 태생부터 한계가 있었다. 돈이 없는 서민들이 빨리 빨리 집을 짓기 위해서 가장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재료였다. 부서지기 쉬운 재료였다. 운이 좋아 애써 살아남은 지붕들도 '석면 공포' 때문에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 골목이 명품골목이 되지 못한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안타깝게도 슬레이트지붕이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오래된 유럽 골목들이 명품골목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슬레이트처럼 오래 쓸 수 없는 재료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과 나무를 이용해서 집을 쌓고 길을 닦았다. 한 곳이 망가지더라도 그 곳만 고치면 됐다. 손때와 비바람이 닿은 부분엔 세월의 무게가 쌓였다.
아름다운 골목으로 유명한 그리스 산토리니 사람들이 집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노력은 이따금 벽에 페인트를 칠하는 것뿐이다.
우리나라 지형을 고려하면 1960~1970년대 지나치게 빨리 과거와 단절한 건 아쉬운 일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골목 곡선이 매우 아름답고 개성있게 만들어진다. 최근 아름다운 골목마을로 주목받는 부산 감천동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60~1970년대 빨리빨리 과거와 단절하기 위해 손쉬운 재료를 쓴 덕에 우리는 다시 60~70년대와 빠르게 작별하는 중이다. 이 흐름대로 간다면 우리는 과거는 없고 현재만 있는 도시에 살게 될 것이다.
과거가 없다는 건 매우 슬픈 일이다. 뿌리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건강 문제 때문에 석면이 가득한 슬레이트를 없애는 건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때 새도시의 기수로 각광을 받던 슬레이트가 불과 20~30년만에 헌도시를 상징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건 슬픈 일이다. 슬레이트의 운명에서 그 집에 살던 사람들과 그 도시에 살던 사람들의 운명이 겹쳐져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골목에서 슬레이트 지붕을 만나면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된다. 과연 앞으로 우리는 60~70년대 풍경에서 벗어나 오래오래 집을 가꾸며 살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지붕 타기 놀이, 슬레이트 무너져 혼이 나기도
▲ 골목에서 놀던 시절 공이나 각종 장난감이 지붕에 자주 올라갔다. 그 때마다 아이들은 편을 나눠 지붕을 탔다. 몸이 무겁거나 요령이 없어 잘못 디디는 슬레이트 지붕은 금세 망가졌다. 사진은 서울 홍제동. ⓒ 김대홍
어린 시절 지붕은 보물창고였다. 주로 골목에서 공놀이나 제기차기, 원반던지기 등을 하던 시절, 지붕엔 그런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쌓여갔다.
물론 처음엔 지붕이 보물창고란 걸 알 리가 없었다. 땅에선 지붕이 보이지 않았고, 꼬맹이들이 '껑충' 뛰기를 해본다 한들 지붕 끝이라도 보일 리가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2층 옥상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고, 옥상에 올라가서 비로소 다른 집 지붕을 볼 수 있었다. 세상에! 다른 집 지붕엔 별 게 별 게 다 있었다. 지난달 골목에서 야구를 하다 쳐올린 테니스공과 물렁고무공, 야구공 대신 던지다 홈런 스윙 앞에 크게 날아간 배드민턴공, 새 것에 가까운 지우개, 메텔과 철이를 태우고 달리는 은하철도999 장난감까지.
지붕의 그런 풍경을 보고 눈이 뒤집히지 않을 아이는 없었다. 우리는 특공대를 짜서 누가 지붕으로 가서 저 귀하디귀한 것들을 가져올지 의논해야 했다. 선뜻 나서는 아이는 없었다.
▲ 슬레이트는 값이 싸고 시공하기가 좋았다. 빠르게 집을 짓거나 고칠 때 가장 쓰기 좋은 재료였다. 그만큼 망가지기 좋았다. 사진은 경남 밀양. ⓒ 김대홍
나는 꽤 지붕을 잘 탔다. A 역할을 많이 맡았다는 뜻이다. 몸이 날래진 않았지만 어딜 밟아야 할지를 알았다. 그 당시 지붕 재질은 슬레이트가 많았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잘못 밟으면 '와지직'하며 부서지기 좋았다. 슬레이트는 가볍고 설치하기 좋았지만 그만큼 무게를 견딜 힘은 없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기 위해 먼저 나무로 틀을 짠다. 슬레이트 지붕은 나무틀 위에 얹는다. 발을 디뎌야 할 곳은 나무틀이었다. 그 구조만 알면 슬레이트 지붕을 밟는 것은 쉬웠으나 조심성 없이 내딛는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런 아이들이 A 역할을 맡으면 슬레이트는 어김없이 '뿌지직' 거렸고, 집 안에선 '거 누구야'하는 소리가 벼락같이 들렸다. 그 때가 되면 B와 C는 '빨리 도망쳐'라고 큰소리 치고는 제 살길 찾아 달아나기 바빴다. 그 상태에서 A는 대부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우는 상으로 지붕에 매달리게 된다. 작전이 한 번 실패로 돌아가면 꽤 오랜 시간은 지붕 접근 금지가 되니 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슬레이트 지붕에 비해 기와 지붕은 무척 쉬웠다. 훨씬 튼튼했기 때문이다. 슬레이트 지붕처럼 가장자리만 밟는 게 아니라 전체 어디든지 밟아도 됐다. 즉 무너져 내릴 염려는 없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가끔씩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생긴 틈이었다. 잘못 밟으면 크게 '달그락' 소리가 난다는 점이 문제였다. 여기에서도 힘 조절이 중요했다. 슬레이트 지붕에 비해 기와 지붕 침투가 쉬운 건 맞았지만 아무한테나 시킬 순 없었다. 이래저래 A는 한 번 성공한 사람이 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거의 역할이 굳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 슬레이트 지붕은 주재료인 석면이 암을 일으킨다 해서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석면이 뭔지, 몸에 나쁜지도 모르던 시절 너도나도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지만 지금은 여력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슬레이트를 걷어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간혹 슬레이트 지붕을 보게 된다. 그 때마다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르면서 석면 공포는 저멀리 사라진다. 추억의 힘이란, 상상의 힘이란.
7년 동안 사라진 초가 240만채, 대부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어
슬레이트. Slate. 지붕을 덮는 데 쓰는 천연 점판암의 얇은 석판 또는 시멘트와 석면을 물로 개어 센 압력으로 눌러서 만든 얇은 판.
▲ 7년 동안 초가 240만 채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새마을운동이 가져온 변화의 바람은 엄청났다. 사진은 충남 서산. ⓒ 김대홍
197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 집은 대부분이 초가였다. 상황이 바뀐 건 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국 규모로 벌어지면서 집 뚜껑이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싹' 바뀌었다.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뀐 집은 240만채. '슬레이트 특수'에 따라 슬레이트 부자가 곳곳에서 생겼다.
"지붕개량사업으로 창원군에서는 3만9261채의 초가집 중 170채만을 남기고 3만9091채가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었다. 함안군에서는 초가 4만898채 중 95%가 지붕개량을 했다는 통계숫자이고 보면 '슬레이트부자'의 등장설은 사실성이 짙은 이야기.…고씨는 슬레이트 지붕공사로 돈을 좀 모으자 비공식대리점을 차려 슬레이트판매도 겸했는데 7년 만에 자기마을에서 2번째 가는 부농이 되었다.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장정식(27)씨는 원래 농사를 짓다가 지붕개량사업이 시작되자 바로 도시로 나가 기술을 습득, 일대 각 부락의 일을 도맡아 했다. 그래서 3년 동안에 논 3마지기를 사들여 어엿한 자낙농이 되기도 했다." - <경향신문>(1978년 5월 27일)
슬레이트 대리점을 차린 사람들이 큰 돈을 만지면서 부자대열에 올랐지만 가장 크게 이익을 본 사람들은 역시 슬레이트를 생산하는 기업들이었다.
슬레이트를 만드는 몇몇 기업들은 거의 독점공급하며 돈을 거머쥐었다. 돈 냄새에 민감한 증권가가 그 사실을 놓칠 리 없었다. 1972년 국내 상장기업 가운데 제일 높은 이익배당을 실현한 기업은 한국스레트로 연 28%를 투자자들에게 지급했다. 다음해에는 배당금이 36.61%로 더욱 높아지면서 성장속도를 더욱 높였다.
한국스레트와 함께 슬레이트 생산을 양분하던 업체는 금강스레트. 두 기업은 이후 벽산(2011년 매출 2528억 원)과 KCC그룹(2010년 매출 4조5000억 원)으로 이어진다.
"전기(28%)보다 2%가 인상된 30%의 배당을 실시한 바 있는 한국스레트는 지난 2년간 무려 5배의 영업신장을 보였다." - <매일경제>(1974년 7월 22일)
▲ 높은 건물 옥상에서 바라보면 아직까지 적지 않게 슬레이트 지붕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서울 숭인동. ⓒ 김대홍
▲ 서울 문래동. ⓒ 김대홍
불과 10여 년 만에 초가지붕이 사라지는 대신 우리나라 지붕은 죄다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기업 두 곳이 급성장한다. 한국의 지붕을 바꾸는 데 10년이면 충분했고, 불과 얼마 전까지 대부분 집이 초가였다는 사실은 기억 밖으로 사라진다.
새마을운동의 상징으로 외신까지 탄 슬레이트 지붕이지만 그 역사가 오래가진 못했다. 1980년대부터 석면이 폐암을 일으킨다는 보도가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물론 정부와 언론에서는 석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길 꺼려했다. 슬레이트 지붕만큼 싸고 시공이 간단한 재료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 밥 세 끼를 해결하게 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은 건강에 관심을 갖게 된다. 슬레이트 지붕 재료인 석면이 암을 일으킨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사진은 서울 홍은동. ⓒ 김대홍
1980년대 후반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석면 피해를 입은 사람들 사례가 보고되기 시작했고, 몇몇 개혁언론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석면 사용 규제대책을 세우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1990년대 주머니 사정이 두둑해진 사람들은 건강 문제에 관해 예전보다 민감했다. 환경문제가 본격 제기된 시대였다. 싼 맛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사람들은 여유가 생기자 슬레이트 지붕을 걷어버렸다. 1970년대 초가가 빠르게 사라진 것처럼 1990년대 슬레이트 지붕이 빠르게 사라진다.
이제 도시에서 슬레이트 지붕은 보기 힘들어졌다. 대부분 집들이 아파트로 바뀌었고, 거리는 눈에 띄게 환해졌다. 사람들은 옛날 풍경을 전시한 박물관에 가서 슬레이트 지붕을 보곤 "옛날엔 우리집도 저랬었지"라면서 추억에 잠겼다.
나 또한 그랬다. 골목을 누비고, 옥상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는 여행을 하기 전까진 말이다. 크게 몰아친 파도가 돌아간 뒤 백사장에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1970년대 거세게 몰아친 슬레이트 광풍은 골목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겼다. 모두들 다 철수할 때 미처 따라가지 못한 게 골목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골목은 근대사 박물관이라 부를 만하고, 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대로변이나 신도시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느리게 시대를 사는 셈이다.
명품골목이 되는 길은 좋은 재료와 애정... 앞으로는 가능할까
▲ 최근 골목탐방객들이 몰리고 있는 부산 감천동 문화마을. 명품이 되기 위해선 오래 쓰는 재료여야 하고, 꾸준히 관리를 해줘야 한다. 마을도 마찬가지다. ⓒ 김대홍
명품이란 좋은 재료를 써서 만든 물건을 꾸준히 관심을 두고 가꿀 때 만들어진다. 아무리 좋은 재료라도 애정과 관심을 쏟지 않으면 단지 값비싼 유행품일 뿐이다. 애정과 관심을 쏟더라도 나쁜 재료라면 오랫동안 쓰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슬레이트 지붕은 태생부터 한계가 있었다. 돈이 없는 서민들이 빨리 빨리 집을 짓기 위해서 가장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재료였다. 부서지기 쉬운 재료였다. 운이 좋아 애써 살아남은 지붕들도 '석면 공포' 때문에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 골목이 명품골목이 되지 못한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안타깝게도 슬레이트지붕이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오래된 유럽 골목들이 명품골목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슬레이트처럼 오래 쓸 수 없는 재료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과 나무를 이용해서 집을 쌓고 길을 닦았다. 한 곳이 망가지더라도 그 곳만 고치면 됐다. 손때와 비바람이 닿은 부분엔 세월의 무게가 쌓였다.
아름다운 골목으로 유명한 그리스 산토리니 사람들이 집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노력은 이따금 벽에 페인트를 칠하는 것뿐이다.
우리나라 지형을 고려하면 1960~1970년대 지나치게 빨리 과거와 단절한 건 아쉬운 일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골목 곡선이 매우 아름답고 개성있게 만들어진다. 최근 아름다운 골목마을로 주목받는 부산 감천동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 오래 쓸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서 정성껏 가꾸면 제품에선 빛이 난다. 전주 교동은 명품 한옥마을로 관광객들 발길이 잦다. ⓒ 김대홍
1960~1970년대 빨리빨리 과거와 단절하기 위해 손쉬운 재료를 쓴 덕에 우리는 다시 60~70년대와 빠르게 작별하는 중이다. 이 흐름대로 간다면 우리는 과거는 없고 현재만 있는 도시에 살게 될 것이다.
과거가 없다는 건 매우 슬픈 일이다. 뿌리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건강 문제 때문에 석면이 가득한 슬레이트를 없애는 건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때 새도시의 기수로 각광을 받던 슬레이트가 불과 20~30년만에 헌도시를 상징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건 슬픈 일이다. 슬레이트의 운명에서 그 집에 살던 사람들과 그 도시에 살던 사람들의 운명이 겹쳐져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골목에서 슬레이트 지붕을 만나면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된다. 과연 앞으로 우리는 60~70년대 풍경에서 벗어나 오래오래 집을 가꾸며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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