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된 '집단학살', 하나님도 가해자였다?
[서평] 존 도커의 <폭력의 기원>, 피해자가 가해자 되는 악순환 계속 돼
조직폭력, 학교폭력, 용역폭력, 성폭력, 가정폭력 등 요즘 우리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이슈들은 하나같이 폭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왜 인간은 폭력을 사용할까? 인간 본성에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런 폭력의 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948년 국제연합의 '집단 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에서 라파엘 렘킨에 의해 최초로 정의된 제노사이드(Genocide)는 집단학살을 뜻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전멸시키려는 목적으로 자행하였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국제연합은 집단 학살을 국제법에서 규정하는 CPPCG에 동의하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독일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했던 유대인들이 전후에는 학살자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현대 이스라엘과 시온주의는 식민지화와 정복 그리고 제노사이드로 이어지는 오래된 역사를 현대에 와서 그대로 보여주었다. 역사적으로 집단학살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환되는 것은 성경에도 등장하는 낯설지 않은 일들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 인문학 연구센터의 연구전담 교수로 제노사이드를 연구해온 존 도커는 <폭력의 기원>(알마)을 통해 폭력 중에서도 집단 간의 폭력에 주목하고, 폭력의 기원을 탐구하고자 한다. 저자는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는 원인을 되도록 먼 곳에서부터 찾기 위해 '인간 이전'의 역사까지 더듬는다.
성경의 <출애굽기><여호수아서><사사기>와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타키투스의 저작들과 셰익스피어와 흄, 리오타르, 들뢰즈의 저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전들과 영장류동물학, 진화론, 세계 역사를 두루 살펴 제노사이드와 정치철학 등을 분석한다.
그리고 저자는 인류의 역사가 유일신교와 다신교를 막론하고 신이 허락한 정복, 식민화, 제국 건설, 민주주의와 제국의 치명적 결합 그리고 혁명, 대학살, 고문, 신체 절단, 잔학 행위 등이 자행되어 온 전쟁과 제노사이드로 물든 폭력의 역사라고 말한다.
저자는 재난과 재앙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탐구하고, 그래서 치열하고 명확한 인식에 도달할 때에만 폭력에 대한 대안이 떠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폭력이 난무하고 폭력적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폭력에 대한 대안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침팬지 사회-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발견된 '제노사이드'
그렇다면 폭력을 행하는 건 인간만이 가진 특성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지금까지 연구에 의한 일반적인 통념은 정교한 지성을 갖춘 인간만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희생자의 고통을 극대화시켜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기거나 거기에 무관심할 수 있기 때문에 잔학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침팬지 연구를 진행해온 제인 구달에 따르면 폭력에 있어서 인간과 다른 영장류의 차이를 확신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 이유는 침팬지 역시 잔학 행위를 저지르고, 어느 정도는 욕망과 감정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동정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줄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랜 종단연구(장기간의 시간 흐름에 따른 변화를 관찰하는 연구)를 통해 구달은 침팬지 공동체가 두 집단으로 나눠지면서 침팬지들이 '폭력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는 장면을 목격했다. 구달에 따르면 침팬지들이 특정한 상황에 닥치면 같은 종족을 죽이거나 심지어 잡아먹기도 한다는 충격적인 행동특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구달의 분석은 제노사이드란 한 집단의 필수적인 생존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도하는 다양한 행위의 통합 계획을 의미한다는 라파엘 렘킨의 논의와 일치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제노사이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가해자들이 폭력을 즐길 뿐 아니라 극단적인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폭력에 끌린다는 점이다.
댄 스톤의 논문 '관습 위반으로서의 제노사이드'에 따르면 캄보디아와 르완다 사태, 난징의 강간, 밀라이 학살의 경우처럼 현대의 제노사이드와 대량 학살은 인류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관습을 위반한 폭력이었다. 살인 혹은 살인에 대한 기대 심리를 포함한 폭력의 향유이자 잔혹극 그 자체로서, 가해자는 난교 파티가 연상될 정도로 폭력 행위를 즐긴다. (본문 53쪽)
이에 대해 발터 벤야민은 역사의 문명인과 야만인은 영원히 공존한다고 했으며, 저자는 결국 평범한 일반인들도 제노사이드와 대량 학살을 저지를 수 있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전범 아이히만을 보며 아렌트는 악한 일을 행한 인간은 평범할 수 있으나 악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고 말한다.
흔히 제노사이드와 같은 잔학 행위는 힘으로 다른 나라 혹은 집단을 제압하는 제국주의 국가에서나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아테네처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는 제노사이드와 같은 잔학 행위에 가담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착각이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이러한 일반적인 믿음을 가차 없이 깨뜨려버린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식민지를 개척하는 제국이나 초대국을 건설하는 민주주의 민족국가가 그런 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특히 더 높다고 이야기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을 꽃피웠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 페리클레스가 숭배한 것은 근대에 들어 '지배민족'이나 '인종민주주의'로 인식했던 것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투키디데스는 특정 집단이 우월하다는 개념에 기반을 둔 권위주의적 체제는 필연적으로 정치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지적했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아이러니한 역사의 악순환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주말의 명화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 <십계>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여호와의 명으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을 찾아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사람들은 히브리인에 감정이입되어 그들이 박해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 무사히 안착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가 그들의 피해자학이나 제노사이드적 측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고대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서 저지르는 제노사이드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멸망한 트로이를 탈출한 트로이인들이 로마를 정복하며 행하는 파괴행위는 전형적인 피해자학의 서사를 보여준다.
피해자학의 서사란 자신들이 과거에 당한 구속, 박해, 고통의 경험으로 그들이 나중에 저지르게 되는 폭력, 정복, 파괴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는 제노사이드를 저지른 인간과 함께 신 또한 제노사이드에 대해 결코 무죄일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호수아서>를 읽으면 오로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욕구와 야망에만 관심을 보이는 신의 도덕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신은 자신이 파괴한 민족이나 파괴 행위를 도운 민족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고, 자신을 유일신으로 섬기겠다고 판단한 사람들에게서 파괴를 통해 충성심을 확보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여호수아서>에 등장한 신은 가장 강력한 모습으로, 그렇기에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제노사이드 가해자의 한 명으로 그려진다. 렘킨의 개요를 참고하면, <여호수아서>에서 신, 여호수아, 히브리인은 모든 죄목에서 제노사이드에 대해 유죄다. (본문 186~187쪽)
저자는 이러한 피해자학의 서사를 담은 텍스트가 서양 역사에서 작용하고 수용하고 마침내 복잡하게 얽히면서 윤리적 참사의 전형이 되었다고 말한다. 도덕적 자각의 측면에서 보면, 이집트에서 억압과 박해를 받았던 히브리인이나 그리스에 의해 고통받았던 트로이인은 그들의 고통과 박해에서 아무런 교훈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고통 받았으면서도 다른 도시, 다른 민족, 다른 땅을 침략하고 파괴하고 불태우고 복속시키고 노예로 삼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기본적인 자각조차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현대의 시온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시온주의자들은 홀로코스트를 겪었으면서도 여러 민족들이 우호적으로 살면서 정치적 조직을 공유하고 서로의 좋은 점을 배우며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시각을 지녀야겠다는 단 하나의 역사적 교훈조차 얻지 못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 법원은 지난 8월 28일, 2003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시위를 벌이다 이스라엘군 불도저에 압사당한 미국 활동가 레이첼 코리 사건에 대해 "이스라엘군과 사법시스템은 정당하다"며 레이첼 코리의 가족이 제기한 소송을 기각했다.
그리고 또 다른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이란 핵 시설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중동 지역에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에서 "폭력의 실천은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변화시키지만, 더 폭력적인 세계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가장 크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이 인간을 학살하고, 살아갈 근거와 문화를 파괴하는 행위는 이제 종식되어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불천노 불이과(不遷怒 不二過)' 즉 '자신의 분노를 남에게 옮기지 말고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말라' 하였다. 이 세상이 남의 허물과 잘못을 '눈에는 눈'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1948년 국제연합의 '집단 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에서 라파엘 렘킨에 의해 최초로 정의된 제노사이드(Genocide)는 집단학살을 뜻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전멸시키려는 목적으로 자행하였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국제연합은 집단 학살을 국제법에서 규정하는 CPPCG에 동의하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독일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했던 유대인들이 전후에는 학살자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현대 이스라엘과 시온주의는 식민지화와 정복 그리고 제노사이드로 이어지는 오래된 역사를 현대에 와서 그대로 보여주었다. 역사적으로 집단학살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환되는 것은 성경에도 등장하는 낯설지 않은 일들이었다.
▲ <폭력의 기원> 겉표지 ⓒ 알마
성경의 <출애굽기><여호수아서><사사기>와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타키투스의 저작들과 셰익스피어와 흄, 리오타르, 들뢰즈의 저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전들과 영장류동물학, 진화론, 세계 역사를 두루 살펴 제노사이드와 정치철학 등을 분석한다.
그리고 저자는 인류의 역사가 유일신교와 다신교를 막론하고 신이 허락한 정복, 식민화, 제국 건설, 민주주의와 제국의 치명적 결합 그리고 혁명, 대학살, 고문, 신체 절단, 잔학 행위 등이 자행되어 온 전쟁과 제노사이드로 물든 폭력의 역사라고 말한다.
저자는 재난과 재앙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탐구하고, 그래서 치열하고 명확한 인식에 도달할 때에만 폭력에 대한 대안이 떠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폭력이 난무하고 폭력적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폭력에 대한 대안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침팬지 사회-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발견된 '제노사이드'
그렇다면 폭력을 행하는 건 인간만이 가진 특성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지금까지 연구에 의한 일반적인 통념은 정교한 지성을 갖춘 인간만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희생자의 고통을 극대화시켜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기거나 거기에 무관심할 수 있기 때문에 잔학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침팬지 연구를 진행해온 제인 구달에 따르면 폭력에 있어서 인간과 다른 영장류의 차이를 확신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 이유는 침팬지 역시 잔학 행위를 저지르고, 어느 정도는 욕망과 감정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동정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줄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랜 종단연구(장기간의 시간 흐름에 따른 변화를 관찰하는 연구)를 통해 구달은 침팬지 공동체가 두 집단으로 나눠지면서 침팬지들이 '폭력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는 장면을 목격했다. 구달에 따르면 침팬지들이 특정한 상황에 닥치면 같은 종족을 죽이거나 심지어 잡아먹기도 한다는 충격적인 행동특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구달의 분석은 제노사이드란 한 집단의 필수적인 생존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도하는 다양한 행위의 통합 계획을 의미한다는 라파엘 렘킨의 논의와 일치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제노사이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가해자들이 폭력을 즐길 뿐 아니라 극단적인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폭력에 끌린다는 점이다.
댄 스톤의 논문 '관습 위반으로서의 제노사이드'에 따르면 캄보디아와 르완다 사태, 난징의 강간, 밀라이 학살의 경우처럼 현대의 제노사이드와 대량 학살은 인류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관습을 위반한 폭력이었다. 살인 혹은 살인에 대한 기대 심리를 포함한 폭력의 향유이자 잔혹극 그 자체로서, 가해자는 난교 파티가 연상될 정도로 폭력 행위를 즐긴다. (본문 53쪽)
이에 대해 발터 벤야민은 역사의 문명인과 야만인은 영원히 공존한다고 했으며, 저자는 결국 평범한 일반인들도 제노사이드와 대량 학살을 저지를 수 있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전범 아이히만을 보며 아렌트는 악한 일을 행한 인간은 평범할 수 있으나 악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고 말한다.
흔히 제노사이드와 같은 잔학 행위는 힘으로 다른 나라 혹은 집단을 제압하는 제국주의 국가에서나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아테네처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는 제노사이드와 같은 잔학 행위에 가담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착각이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이러한 일반적인 믿음을 가차 없이 깨뜨려버린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식민지를 개척하는 제국이나 초대국을 건설하는 민주주의 민족국가가 그런 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특히 더 높다고 이야기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을 꽃피웠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 페리클레스가 숭배한 것은 근대에 들어 '지배민족'이나 '인종민주주의'로 인식했던 것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투키디데스는 특정 집단이 우월하다는 개념에 기반을 둔 권위주의적 체제는 필연적으로 정치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지적했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아이러니한 역사의 악순환
▲ 유대인들과 포로들이 나치에 의해 강제로 수감돼 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감방과 그 둘레로 처진 고압 철책선들 ⓒ 자료사진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주말의 명화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 <십계>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여호와의 명으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을 찾아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사람들은 히브리인에 감정이입되어 그들이 박해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 무사히 안착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가 그들의 피해자학이나 제노사이드적 측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고대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서 저지르는 제노사이드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멸망한 트로이를 탈출한 트로이인들이 로마를 정복하며 행하는 파괴행위는 전형적인 피해자학의 서사를 보여준다.
피해자학의 서사란 자신들이 과거에 당한 구속, 박해, 고통의 경험으로 그들이 나중에 저지르게 되는 폭력, 정복, 파괴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는 제노사이드를 저지른 인간과 함께 신 또한 제노사이드에 대해 결코 무죄일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호수아서>를 읽으면 오로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욕구와 야망에만 관심을 보이는 신의 도덕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신은 자신이 파괴한 민족이나 파괴 행위를 도운 민족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고, 자신을 유일신으로 섬기겠다고 판단한 사람들에게서 파괴를 통해 충성심을 확보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여호수아서>에 등장한 신은 가장 강력한 모습으로, 그렇기에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제노사이드 가해자의 한 명으로 그려진다. 렘킨의 개요를 참고하면, <여호수아서>에서 신, 여호수아, 히브리인은 모든 죄목에서 제노사이드에 대해 유죄다. (본문 186~187쪽)
저자는 이러한 피해자학의 서사를 담은 텍스트가 서양 역사에서 작용하고 수용하고 마침내 복잡하게 얽히면서 윤리적 참사의 전형이 되었다고 말한다. 도덕적 자각의 측면에서 보면, 이집트에서 억압과 박해를 받았던 히브리인이나 그리스에 의해 고통받았던 트로이인은 그들의 고통과 박해에서 아무런 교훈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고통 받았으면서도 다른 도시, 다른 민족, 다른 땅을 침략하고 파괴하고 불태우고 복속시키고 노예로 삼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기본적인 자각조차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현대의 시온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시온주의자들은 홀로코스트를 겪었으면서도 여러 민족들이 우호적으로 살면서 정치적 조직을 공유하고 서로의 좋은 점을 배우며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시각을 지녀야겠다는 단 하나의 역사적 교훈조차 얻지 못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 법원은 지난 8월 28일, 2003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시위를 벌이다 이스라엘군 불도저에 압사당한 미국 활동가 레이첼 코리 사건에 대해 "이스라엘군과 사법시스템은 정당하다"며 레이첼 코리의 가족이 제기한 소송을 기각했다.
그리고 또 다른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이란 핵 시설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중동 지역에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에서 "폭력의 실천은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변화시키지만, 더 폭력적인 세계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가장 크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이 인간을 학살하고, 살아갈 근거와 문화를 파괴하는 행위는 이제 종식되어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불천노 불이과(不遷怒 不二過)' 즉 '자신의 분노를 남에게 옮기지 말고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말라' 하였다. 이 세상이 남의 허물과 잘못을 '눈에는 눈'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폭력의 기원>, 존 도커 지음, 신예정 옮김, 알마 펴냄, 2012년 8월, 1만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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