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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가득한 강둑길, 포장 안 하면 안 되나요?

순천만으로 흘러드는 이사천 따라 걸어보기

등록|2012.09.26 09:01 수정|2012.09.26 15:22

▲ 이사천에 핀 코스모스와 고마리. 꽃이 물과 어울리면 더욱 아름답다. ⓒ 전용호


훌쩍 다가선 가을. 걸을 만한 길이 어디 없을까 고민이다. 지도를 펴놓고 이리저리 고민하다 순천만으로 흐르는 하천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천만으로 흘러드는 하천은 세 개다. 순천 도심을 흐르는 동천, 동천과 나란히 순천만으로 들어오는 해룡천, 그리고 순천만 못 미쳐 동천과 합쳐지는 이사천이다. 걷는 길을 선택할 때 우선되는 것은 걷기에 적당한 거리가 되어야 하고, 나름 의미나 운치가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사천은 지도상으로 봤을 때는 그런 요건을 충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사천(伊沙川)은 순천과 곡성의 경계에 있는 희아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온다. 호남정맥이 흐르는 희아산은 분수령이 되어 섬진강으로 흘러들지만 일부는 이사천의 원류가 되어 머나먼 여정을 시작한다. 물줄기는 승주읍을 지나 상사호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상사호를 벗어나면 하천의 모습을 갖추면서 순천만으로 흘러들어간다.

▲ 수문에서 내려다본 이사천. 물이 살아있다. ⓒ 전용호


이사천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다 걷기는 힘들다. 그래서 출발점을 중간정도인 상사호로 정했다. 상사호에서 순천만까지 16㎞다. 보통 걸음으로 걸으면 4시간 정도. 길 사정은? 잘 만 걸으면 찻길을 만나지 않고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천변을 걸어가면서 가을이 익어가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

숨어있는 상사댐 건설 순직자 위령비

순천에서 60번 시내버스를 타고 상사호로 향한다. 명절을 앞둔 시골분들이 장나들이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물건을 잔뜩 사서 버스에 실었다. 버스 안은 어수선하다. 버스기사는 짜증을 내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분들은 무안한 표정이다. 버스기사 심정도 이해가 되지만 어차피 그렇게 된 거 조금 친절했으면 좋겠다. 나도 무안하다.

상사호 입구에서 버스가 선다. 상사호까지는 5분 정도 걸어야 한다. 상사호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상사호의 정확한 이름은 1991년에 완공된 주암다목적댐이다. 주암다목적댐은 본댐과 조절지댐으로 이루어졌는데, 본댐이 주암호고 조절지댐이 일명 상사호다. 양 댐 사이에는 11.5㎞의 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상사호는 댐 높이가 무려 100m나 되고 수력발전시설까지 갖추었다. 주로 순천과 여수를 비롯해 주변 지역의 상수원으로 이용된다.

가을 햇살을 잔뜩 받고 있는 풍경들이 한가롭다. 호수 주변에는 나이가 조금 있는 연인들이 그늘에 누워 가을을 만끽하고 있다. 여유로운 풍경이다. 휴게소에서 걷다가 먹을 과자 몇 봉지 샀다. 상사호에서 시작한 걷기는 이사천을 왼쪽에 끼고 걸어갈 생각이다. 그러려면 댐을 건너야 하는데 경비아저씨가 제지를 한다. 처음부터 계획 차질이다. 별수 없이 휴게소 옆으로 난 계단 길을 따라 내려선다.

▲ 상사호 아래 숲속에 숨어있는 순직자위령비. 여섯분의 순직자가 적혀있다. ⓒ 전용호


계단은 한참을 내려간다. 주변으로 대나무 숲이 감싸고 있어 풍치는 좋다. 쉬엄쉬엄 내려가니 탑이 서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순직자위령비'다. 뒷면에는 여섯 분의 성함과 주소가 적혀있다. 이 지역 분도 있지만 서울에서 오신 분도 있다. 댐을 만들다가 돌아가신 분들이다. 마음이 아프다. 누군가의 터전을 빼앗아, 누군가를 위해 댐을 만들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은 분들이다.

위령비는 웅장한 댐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하지만 위령비가 있는 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닺지 않는 곳이다. 안타깝게 보인다. 공원으로 조성된 댐 위에 당당하게 서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물 문학관 앞에 조형물로 있었으면 더욱 빛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 돌아가신 분들의 유족들에게 위로도 되고….

힘차게 흐르는 물은 생명의 근원

댐을 내려와서는 별수 없이 도로를 따라 걷는다. 천 주변으로 길이 따로 없다. 하천 주변은 습지로 우거져서 걸을 수가 없다. 도계마을, 용계마을, 장수마을을 지난다. 도로를 따라 걸어서 내려오면 천 건너편으로 수자원공사 관리사무소가 있다.

▲ 수자원공사로 들어가는 장수교에서 내려다본 이사천. 울창한 습지로 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 전용호


다리를 건너서 걸어가려고 했는데 또 다시 제지한다. 못 간단다. 출입이 통제되는 도로란다. 다시 도로를 따라 걷는다. 도로를 걷는 게 꼭 나쁜 게 아니지만 마음에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달리는 차들과 같이 걸어가려면 마음이 불안하다. 수문이 보인다. 취수장이다. 수문위로 길이 있다. 이번에는 건널 수 있겠지?

취수장 수문을 건너면서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벗어났다. 마음이 넉넉해진다. 비록 시멘트포장 길이지만 주변풍광들이 눈에 들어온다. 논에 곡식이 익어가는 풍경을 만나고, 작은 밭이지만 정성들인 채소밭도 본다. 가장 좋은 건 천변을 걸어갈 수 있어 좋고, 시원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천변 습지에 수수하게 피어있는 꽃들이 정겹게 보인다. 군락을 이루며 피어있는 고마리와 물봉선은 붉은 색으로 하천을 활기차게 만들어 준다. 반짝거리는 연보랏빛 억새는 가을처럼 하늘거린다. 군데군데 물가에 사색에 잠긴 버드나무는 잠시 쉬었다 가라고 유혹한다.

물길은 보를 만난다. 물은 보를 넘어서 흘러간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힘차게 흘러가는 물은 생명의 힘을 느끼게 한다. 물은 흘러야 살아있지. 보 주변에는 백로와 왜가리가 오랜 경험을 확인하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흐름과 기다림.

▲ 이사천에서 만나는 정겨운 보. 자연스러워서 보기에 좋다. ⓒ 전용호


▲ 이사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예전에 만들었던 세월교와 새로 만든 다리가 나란히 건너간다. 다리 위에는 아이가 낚시를 즐기고 있다. ⓒ 전용호


다리가 나오면 반갑다. 건너지 않아도 언제든지 저 편으로 건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다리가 있음으로 인해 물이 친하게 느껴진다. 물만 흐르고 다리가 없다면 답답하겠지? 물가로 내려가서 잠시 쉬었다 간다. 수초들이 자라는 물가에 앉아 있으니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고기 잡는 도구가 없어도 피라미를 잘 잡았다. 수초들 사이로 두 손을 모아서 더듬으면 피라미가 묵직하게 잡히고 했다. 손맛? 그 손맛이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지금은 그렇게 안 되겠지?

이사천은 동천과 만나고 순천만으로 흘러간다

이사천은 상사천과 합류되어 더 큰 물길을 만든다. 천이 합류되는 곳에 마을이 숨겨져 있다. 야흥동(也興洞) 부흥마을이다. 이름이 절묘하다. 한자 뜻은 다르지만 언뜻 밤에 흥하는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낮이라 너무 조용한가? 부흥마을을 지나갈 때는 마치 숲속을 걸어가는 기분이다. 산골 같은 강촌마을 풍경이다.

▲ 천변을 걷다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숲길도 만난다. 밤이 떨어져 있어 몇개 주워 본다. ⓒ 전용호


▲ 이사천에서 만난 색다른 보. 물이 흐르기 쉽게 만들었다. ⓒ 전용호


▲ 천변에 많이 자라는 족제비싸리. 철교는 옛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 전용호


마을을 벗어나면 하천은 더욱 넓어진다. 그렇다고 흐르는 물이 넓어진 게 아니다. 주변 하천부지가 넓어지고, 그곳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가끔 보인다. 이제부터 하천은 생산의 장소로 변한다. 가는 길에 기차도 만난다. 운이 좋은 건지. 옛 생각이 나서 철교 위에 올라서본다. 어렸을 때 어떻게 저 좁은 침목 사이로 들어갔는지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놀거리가 없던 시절, 침목사이로 들어가 교각 위에서 낚시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기억도 있다.

순천 시내가 보이더니 점점 멀어진다. 이제부터는 둑길을 걸어간다. 둑길을 걸어가는 기분은 정말 좋다. 보통 강둑은 논밭보다 위에 있어 주변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걸어가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아스라이 보이는 길 끝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그러나 길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시멘트 포장길이라 예전의 아름다웠던 강둑길을 느낄 수 없어서 아쉽다. 예전에 포장이 되지 않았던 강둑길은 차나 수레가 다녀서 가운데만 풀이 자란다. 가끔 소들이 다녀서 소똥이 군데군데 있던 길을 이리저리 피해서 걸어 다니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 옛 추억이 살아나는 강둑길. 시멘트포장길만 아니라면 더욱 좋을 텐데. ⓒ 전용호


그렇게 쉬다 걷다 하니 이사천은 새로운 천을 만난다. 이제는 이사천이라는 이름을 버릴 때가 되었다. 순천 시내를 가로질러서 흘러온 동천은 이사천 물과 합류하였다. 동천과 만남으로 인해 이사천은 그 역할을 다하고 동천이라는 이름으로 흘러간다. 그럼 걷기도 끝내야 하나? 그래도 바다는 만나야지.

동천과 만나면서 주변 풍경이 달라진다. 억새보다는 갈대가 천변을 덮었다. 아기자기하던 천변은 거대한 갈대군락지로 변했다. 우거진 갈대숲이 무섭게 느껴진다. 가까이 다가가면 나를 빨아들일 것 같은 기분이다. 멀리 무진교가 보인다.

4시간 이상을 걸었더니 발바닥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힘들다. 그냥 포장이 안 된 오솔길이었으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상사호에서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아스팔트와 시멘트 포장길이다. 걸으면서 느낀 것은 천변 둑길이라도 포장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주민들의 편리를 위해서는 포장을 안 할 수도 없겠지만, 굳이 포장을 한다면 천변으로 오솔길이라도 만들어 주면 좋겠다. 하천은 추억의 공간이다. 가끔은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 상사호에서 순천만까지 걸어간 길 ⓒ 순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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