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인혁당 사과에서 진정성 느낄 수 없는 이유
[주장] 유신시대와 피해자들의 삶에 대한 공감이 우선
▲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4일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5·16과 유신,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 남소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사과했다. 나는 지난 6월 쓴 글에서 1975년 4월 9일의 '사법살인', 인혁당 사건 8인의 사형에 대한 '그녀의 침묵'을 지적했었다. (관련기사: 수첩공주 박근혜, 그녀의 국가관이 알고 싶다.
"침묵도 길어지면 민폐"라고, 그녀의 침묵이 아버지의 '잘못'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면 정말로 문제라고, '그녀의 침묵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녀가 사과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겠다는 박 후보가 드디어 사과했다. 그럼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
다시 한 번 읽어보아야 할 사과문
이 글을 쓰면서 박근혜 후보의 9월 24일 사과문 전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인터넷에 올라 와 있는 사과문 전문을 한번 찾아서 읽어보실 것을 권한다. 아침 9시, 직장에서 업무를 막 시작하느라 TV 생중계를 보지 못한 분들은 물론이요, TV를 보신 분들도 꼭 한 번 읽어보시라.
사과문에서 호명된 '우리 국민'들 대부분은 TV를 통해 박 후보의 사과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TV라는 매체는 '쿨한' 미디어(cool media)다. TV 앞에서 말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시각과 청각 등 모든 감각을 동원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선하는 것은 '시각'이다. 하긴 텔레비전(television)의 '비전'(vision)은 '본다'라는 뜻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시각'이 우선하면 종종 '논리'를 놓치는 법이다. '착시'란 착각으로 잘못 보는 것을 말한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 박 후보의 사과문을 찬찬히 한 번 읽어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착시 현상' 바로잡기. 박 후보의 사과문 발표 후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9월 27일자 한겨레신문 박창식 논설위원의 칼럼 '박근혜의 사과, 언어의 가면'은 내가 우려하는 '착시' 현상을 바로잡아 줄만한 글이다. 명쾌하다.
박 후보의 사과문을 읽고 난 느낌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과거사와 그 피해자에 대한 공감 부족'이다. '공감'(sympathy)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타인의 사고나 감정을 자기의 내부로 옮겨 넣어, 타인의 체험과 동질의 심리적 과정을 만드는 일"
박창식 논설위원의 말대로 "그의 현대사 발언은 종전에 비해 진일보했다." 그러나 박 후보의 사과문에는 유신시대 수많은 피해자들의 삶이나 감정을 자기의 내부로 옮겨 넣어, 그들의 체험과 최소한 비슷한 심리상태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공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때 여야 유력 정치인들이 여름휴가 때 가지고 간다고 해서 유명해진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공감의 시대>라는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태어난 지 하루이틀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기들도 다른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따라 운다. 아기가 따라 우는 이유는 공감하는 성향이 우리의 생물학적 구조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공감의 확장을 의식하는 것은 생후 18개월에서 2년 반 정도가 지났을 때이다.
연구에 따르면, 아기는 두 살 정도가 되면 다른 아이가 고통을 받고 있는 광경을 보았을 때 덩달아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가 장난감을 건네거나 안아 주거나 자기 엄마에게 데리고 가서 달래주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인간의 능력 가운데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상태"를 말하는 '공감적 고통'(empathic distress)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성향이고, 그와 같은 공감적 고통은 자신과 남을 구분하기 시작하는 두 살 정도의 나이에 '공감의 확장'(empathetic extension)을 경험하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의 사과, 과거사에 대한 공감 부족
박 후보는 사과문에서 "저도 대통령을 아버지로 두었기에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 없었"으며, "아버지, 어머니가 총탄에 돌아가시고, 개인적으로 바닥까지 간 바 있다"라고 하고 있다. 읽기에 따라서는 박근혜 후보 자신도 불행한 가족사를 경험하였으므로 인혁당 유족들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퍼스트 레이디로 활동한 5년 여의 기간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정계에 '복귀'할 때까지의 18년 동안의 삶이 과연 '고난의 길'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손석춘은 2011년에 낸 <박근혜의 거울>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박근혜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18년 동안 고난을 겪었다는 말도 진실이 아니다. 그 이미지는 언론이 만들어놓은 착시 현상으로 사실과 다르다. 1980년대 전두환 독재에 맞서 민주시민들이 희생을 감수하며 줄기차게 싸우고 있을 때, 박근혜는 박정희, 육영수가 남겨놓은 영남대 재단, 육영재단, 정수장학회의 이사, 이사장으로 살아왔다. '권력 핵심 18년'은 물론, 박근혜의 잃어버린 18년조차 서민의 삶과는 정반대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박근혜 후보, 유신시대와 그 피해자들의 삶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박근혜 후보의 사과 발표 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박 후보의 과거사 사과에 '공감한다'는 입장과 '공감할 수 없다'는 입장이 팽팽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를 지지하는 각 유권자 그룹별로 입장이 나뉘기는 하지만 '공감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박근혜 후보가 5·16과 유신시대의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공감의 마음을 보여주지 않은 점을 제대로 짚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근혜 후보는 사과문에서 "100% 대한민국은 1970년대 인권침해로 고통받았고, 현재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분들이 저와 함께해 주실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하고 있다. 나는 박근혜 후보가 이와 같은 제안을 하기에 앞서 유신시대 피해자들의 삶과 고통에 대해 좀 더 공부할 것을 권한다.
어디부터 시작하여야 하느냐고? 어렵지 않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옛날 신문 기사의 원문을 인터넷에서 바로 읽을 수 있다. 박근혜 후보 스스로 아버지와 자신에 대한 기사를 찾아 읽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예를 들어 1975년 1월 14일 기사를 보자. 유신시대에는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이라는 것이 있었다. 같은 날 <동아일보> 1면은 "현행 헌법 고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소신"이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그날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 기사를 싣고 있다. 그날 KBS, MBC, TBC 3사는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을 재방송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 7면은 "인혁당 관계 우홍선 피고인의 부인 강순희(42)씨가 13일 밤 10시경 4명의 경찰관에 의해 연행됐다. 이날 오후 4시경 경찰관이라는 4명이 우씨 집에 들어와 "끌어내도 안 가겠느냐?", "당신이 출두해야 모든 것이 해결된다"며 연행을 거부하며 울부짖는 강부인을 강제로 차에 태워 갔다"는 기사와 함께, "같은 인혁당 관계 전창일 피고인의 부인 임인영씨(40)는 11일 연행된 후 14일 오전까지 귀가치 않고 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를 잠재우기 위해 1975년 2월 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당시 유권자 대비 찬성률로 치면 58.3%로 유신에 대한 지지율이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투표 3일 후인 1975년 2월 15일, 민청학련 구속자들이 대거 석방되지만, 인혁당 관련 피고인 8명은 석방되지 않았다.
▲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된 고 여정남 ⓒ 인혁당사건 열사 추모사업회
1975년 2월 15일 <동아일보> 7면은 김지하의 석방기사 바로 밑에, 석방에서 제외된 인혁당 사건 전창일 피고인의 부인 임인영씨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사진과 '인혁당 사건 피고인 가족, 어린 4남매 울음바다'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사건의 8명 피고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공감의 능력은 공감할 대상인 사건과 그 피해자들의 삶에 대한 지식을 기본으로 한다. 유신시대 발생했던 심각한 인권침해 사건과 그 수많은 피해자들의 삶과 고통에 대해 제대로 된 공부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진정한 공감은 불가능하다.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피해자들의 유족을 만나기에 앞서 우선해야 할 것은 바로 과거사에 대한 제대로 된 공부, 바로 그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좌세준 변호사는 대전충남인권연대의 뉴스레터 필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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