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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치지 않아도 '신의 말없음'을 안다

김응교 선생의 문학에세이 〈그늘〉

등록|2012.10.03 19:32 수정|2012.10.03 19:32

책겉그림 〈그늘〉 ⓒ 새물결플러스

태양이 높이 뜨면 그것만큼 그늘도 넓게 생기는 법이죠. 달빛이 환하면 환한 만큼 어둠도 더 많이 자리하는 법이고요. 신자본주의의 구조 안에 살고 있는 우리도 그 달콤함에 비해 쓴맛도 많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 맛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 그 돈이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에게 총알과 미사일이 되어 날아간다는 걸 알면서도 우린 그들의 머그잔을 핥고 있죠.

우리 내부라고 다른 게 아닙니다. 소녀시대에 이어 싸이의 한류열풍이 전 세계를 강타고 있는 동안, 그것에 모두 열광하는 동안, 쌍용과 한진의 그늘진 모습은 설 자리를 더욱 잃고 있죠. 그 포악스런 유신의 발길질을 성과 스포츠와 스크린이라는 환상의 유토피아로 모두 넘기려 했던 것처럼 말이죠.

이런 때에 진정으로 희망을 주는 이들이 있을까요? 시대가 수상하던 시절에 장준하 선생 같은 분들이 사상계를 통해 그 고귀한 희망을 꺽지 말도록 격려했던 것처럼,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기필코 봄은 온다고 읊조렸던 이상화 시인의 그 시구처럼, 문학도들이 그런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 왔죠. 

김응교 선생의 문학에세이 〈그늘〉은 텍스트에 숨겨진 '숨은 신' 곧 '신의 세계'를 만나도록 이끌어 줍니다. 문학작품 속에서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봤는지, 그 깊은 세계를 이해하게 해 주죠. 정지용의 시를 들여다보며 '영원을 찾는 신앙시'로 이해한 것도, 디아스포라였다던 윤동주의 시어인 '봄'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성취'로 생각한 것도 그렇죠. 박두진 선생을 '시로써 기도하는 구도자'로 바라본 것도 그렇고요.

"기독교가 들어 온 지 100여 년에 지나지 않은 우리 문학사에도 꼭 읽어야 할 고전이 있다. 윤동주, 박두진, 박목월, 김현승, 고정희 등의 시집은 꼭 읽어야 할 작품집니다. 소설로는 〈라하트 하헤렙〉,〈태백산맥〉,〈손님〉등에서 '숨은 신'을 만날 수 있다."(36쪽)

과연 그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숨은 신', 다시 말해 '신의 세계'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땅에 공의와 정의가 살아 숨쉬며, 사랑과 긍휼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역사를 일컫는 것입니다. 물론 건물이나 조직에 갇힌 채 교회의 본래 위상을 잃고 있는 현대판 한국교회를 향한 것입니다.

"근디 〈태백산맥〉을 읽어보니 아모스랑 미가 같은 예언자들이 몽땅 빨치산허구 비슷허구먼유."(234쪽)

오래 전 남양만 활빈교회에서 〈태백산맥〉을 읽은 교인이 그곳 목사에게 던진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그 교회에서는 집사 임직을 받는 분들에게 그 책을 읽도록 했다고 하죠. 참 재밌는 목사였지 싶습니다. 그만큼 한국의 근현대사에 '숨어 있는 하나님'을 발견토록 하려고 했던 걸까요?

그런데 기형도 시인이 쓴 〈우리 동네 목사님〉에는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형편없는 교인들이 등장한다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형식화된 교회와 편협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 말이죠.

그 동네 목사님은 자기 아들이 폐렴으로 죽었을 때 그저 바라만 봤다고 하죠. 그리고 교인들에게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하죠.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그 목사를 병도 못 고치는 무능한 목사로 생각했고,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말을 성경을 읽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여, 결국은 그 목사를 내쫓았다고 하죠.

"성경 문자만 쉽게 인용하는 이들을, 기형도 시인처럼 나 또한 경계한다. 예수를 비난했던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달달 암기하며, 잘도 잘도 아주 잘 나열했었다. 성경 말씀이 타 종교에 대한 폭력이라서 되도록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가끔 구약을 인용했던 예수께서도 주요한 말은 꽃이며 새며 하루 일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생활로 얘기했고, 바리새인들은 경전으로 장식했다. 경전의 말씀 대신, 소소하고 귀한 체험으로 남긴 법정 스님에게 기독교인들이 배워야 한다."(157쪽)

김응교 선생은 오강남 교수의 책을 인용하여, 기형도의 시에 등장하는 그곳 교인들을 표층종교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교인들의 어긋난 모습이라고 지적합니다. 그야말로 종교의 자유나 깊이보다는 그 문자에 갇힌 문자주의 종교인들 말이죠. 그런데 과연 그들만 그럴까요? 

그렇다면 성경에는 '숨은 신'이 어떤 형태로 그려졌을까요? 김응교 시인은 창세기(17:1-5)에도 절대자가 보여준 13년간의 침묵이 나와 있고, 욥기(40:1-9)에도, 신구약 중간 시대인 400년 동안에도,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마26:39, 마27:46)에서도, 그리고 바울의 기도(고후12:8~9)에도 나타난다고 밝혀주죠. 그야말로 인간의 간청에 침묵으로 말씀하신다는 것 말이죠.

그와 같은 신의 '말없음'에 관해 김응교 시인은 그 유명한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순교자가 선이고, 배교자가 악이라는 무조건적인 도식은 정녕 일그러진 공식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런 이율배반적인 도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신념이죠. 가히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 판단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게 그것입니다.

"기독교는 침묵의 역사다. 자기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갈 때에도 절대자는 침묵하셨다. 지금도 그 침묵은 일본이나 이라크나 북한의 텅 빈 허공을 울리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 침묵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순교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으며, 바로 그 결단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390쪽)

어떤 이름으로 포장됐든 간에 자본시장이 전 세계를 집어 삼키고 있는 때입니다. 그것은 현대판 교회들도 다르지 않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기보다 자본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교회들이 많죠. 메가처치와 또 다른 세습 유형들이 그걸 부추기고 있습니다. 고통당하며 신음하는 이들을 교회들이 점점 외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때에 과연 신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약육강식이 판을 치고 있고, 불의와 거짓이 맘몬과 손을 맞잡고 있고, 대형화와 성공신화에 꿈꾸는 교회와 교우들을 향해, 하나님은 과연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싱겁게도 신의 응답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권모술수에 능한 자들을 벌하기는커녕 교묘한 방법으로 더 큰 파이를 키울 수 있도록 그저 허용하는 듯 보이죠. 합리적인 과학의 공간 속에서 신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 침묵하는 것 같습니다. 그 그늘 속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이 또 얼마나 많은데 말이죠. 그래도 그 속에 숨은 신의 뜻이 있음을, 이 책은 분명하게 짚어줍니다.

아무쪼록 문자주의에 갇힌 현대판 크리스천들이 이 책을 통해 심층종교인으로 좀더 거듭났으면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응답이 없어도, 소리 지르며 기도하지 않아도, 그 마음 상태를 깊이 있게 헤아리고 있는 '신의 말없음'을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심층적으로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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