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끊이지 않는 '빨갱이 타령', 통일은 멀어진다

[2013 남한에 바란다 ④] 겨레의 꿈, 이젠 이뤄내야 합니다

등록|2012.10.19 14:33 수정|2012.10.19 14:33
저는 모국의 분단·전쟁·대결에 깊이 관여해 온 미국에서 40여 년을 산 재미동포 정형외과 의사입니다. 1992년 처음 재미한인의사회 학술교류 차 북을 방문한 데 이어 조국의 남북을 드나들며 서로 아파하며 통일을 열망하는 동포들의 모습을 봐왔습니다. 의료계에 계속 종사하는 한편, 조국통일을 열망하며 분단 체제와 분단의 해소에 대해서도 함께 공부했습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제3자적 입장에서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 기자말

해방 15주년을 맞은 1960년, 북은 처음으로 남에 '평화협정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뒤 20년 동안 계속 남북평화협정을 제안했습니다. 1974년 남이 처음으로 불가침협정을 제안하자 북은 '군사통수권도 없는 남이 어떻게 협정을 보장하느냐'며 군사실권을 행사하는 미국과 평화협정 하자고 미국의회에 제안했습니다.

그 뒤 20년 동안 북미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무시·불응해 오던 미국이 북의 핵무기 개발을 견제하기 위해 1994년 북미기본합의를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이 합의는 2002년 말, 미국이 파기했습니다. 그 뒤 미국과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북은 2011년 핵보유국임을 헌법 전문에 명시했습니다.

북미평화가 선행됐더라면 북핵은 없었을 것입니다. 북에 핵무기가 없던 40년, 핵의혹만 있던 15년에도 평화협정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던 것이었을까요. 미국은 그럴 필요도, 의향도 없어서였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미국에 이익이 됐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국(남북)은 핵보유국인 중국·러시아·미국과 핵무장을 당장에라도 할 수 있다는 일본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니 '핵을 가지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북은 한반도에서 비핵화를 주장해 왔습니다. 미국의 핵우산을 쓰고 있는 남이 북에게 선핵 폐기를 이야기한 들 무엇이 이뤄지겠습니까. 지난 3월, 북 외무성 리용호 부상이 미국에 왔을 때 '미국과 동맹을 하면 북은 핵을 폐기한다'고 했습니다. 남북은 연합방을 먼저 구성하고 조국의 한편에 있는 핵무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겨레의 만년 대계'와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합니다.

남북평화협정, 이젠 남측이 제안하자

▲ '통일보다 나은 분단은 없다'는 사실, '민족보다 나은 동맹은 없다'는 진리, '동맹은 한때고 민족은 영원하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길 때다. 사진은 지난 2007년 7월 27일 경남진보연합의 정전협정 54년 기자회견 당시 ⓒ 오마이뉴스 윤성효


하나 더 제안합니다. 북미평화를 기다리지 말고 이번에는 1960년에 화답하지 못했던 '남북평화협정'을 남에서 먼저 제안해야 합니다. 남이 미군을 업고 북을 위협하듯 북이 중국군을 안고 남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남은 남북평화를 선도하거나 화답해야 합니다. 남북은 각기의 가치관에 따라 분단 뒤 전쟁을 치르고 반목과 대결, 경쟁과 발전을 거듭하며 살아왔습니다. 또, 6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흡수통일도 적화통일도 해서는 안 되고, 또 할 수도 없음을 터득했습니다.

그동안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당한 참담한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굶어 죽어가는 북녘 동포의 기본 생명권마저 외면한 남녘은 설익은 북한 인권 타령일랑 접어두고 남북주민의 진정한 인권을 위해서라도 연합방을 이뤄주시기 바랍니다. 통일은 북미평화가 시켜주는 것이 아니고 남북평화가 해내는 것입니다. 남북통일을 주변국의 도움으로 하게 되면 일시적이 됩니다. 분단의 당사자인 남북이 해내야 영구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통일은 자신 있는 쪽이 선도하면 됩니다.

'통일보다 나은 분단은 없다'는 사실, '민족보다 나은 동맹은 없다'는 진리, '동맹은 한때고 민족은 영원하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길 때입니다. 남북 모두 원론으로 돌아가 통일의 당위성을 더 이야기해야 합니다. 통일의 열매가 얼마나 달콤하고 맛있는지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과도한 통합 비용이라고 잘못 알려진 허상을 바로 잡고, 분단 비용의 실상과 연합방이 가져올 이득에 대한 진실을 접할 수 있는 기회와 토론의 마당을 넓혀야 합니다.

공평과 공정의 정의가 흐르는 연합방기에 협력 교류를 다지며 신뢰를 쌓고, 연방기에는 분단 시대 양측의 과오를 민족대사면헌장(정치불보복)으로 청산하고 법적통일(de jure unification)인 고리공화국(Corea Republic)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5·24 조치해제, 개성·금강산관광 재개, 개성공단 확대,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축, 10·4 선언에서 합의한 45개 사항을 어서 시행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 이상을 해야 합니다. 한 재외동포의 진언을 '한낱 실현성 없는 순진한 이상' 혹은 '감성적 발언'이라고 치부하지 마십시오. 인류의 모든 대업은 철학과 신념을 갖춘 지도자의 원대한 이상에서 이뤄졌습니다. 과감하게 제안하고, 감성적으로 소통하십시오. 남녘의 국민이 공감할 것이며 북 또한 화답할 것입니다.

조국이 강대국인데 아직도 '주변 강대국' 타령?

저도 재외동포의 몫을 하렵니다. 21세기에 철 지난 '빨갱이 타령'하는 나라는 오직 조국의 반쪽 남녘입니다. 분단 조국 남녘의 지도자들이 분단의 종식과 통일에 대해 쌓아온 철학을 소신껏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북색깔론 따위에 짓눌린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겨레의 통합과 나라의 통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국이 주변국의 눈치를 보며 살던 때는 이제 지났습니다. '주변 강대국'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조국이 강대국입니다. 연합방을 구성하게 되면 일류국이 됩니다. 북은 어려움 속에서도 세계 어느 나라에게 굽혀본 적이 없는 정치 강국입니다. 또, 남은 경제발전 이뤄내고 세계 첨단전자지식산업을 이끌고 있는 과학기술강국입니다.

이 겨레, 이 반쪽짜리 두 나라를 어찌할까요. 남북이 손잡고 연합방의 길로 나갈 것인가요 아니면 멍청한 분단 짓을 계속할 것인가요. 결정의 때가 왔습니다. 세상 모든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신뢰로 이뤄집니다. 남북 최고지도자는 어서 서로 만나자고 제안해야 합니다. 만나자고 화답하는 것은 남북 주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의 시작과 같습니다. 만나서 머리 맞대고 연합방을 합의하십시오. 그리고 남북은 통일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면 됩니다. 세계 누가 이 겨레의 길을 막을 수 있습니까. 민족사의 새 장정을 시작해주십시오.

남북연합방 구성, 시기 놓치면 시련은 계속됩니다

▲ 2013년 초부터 새 정부를 꾸려나갈 남녘 지도자는 북의 김정은 제1비서와 대화·소통·합의를 거쳐 빠른 시일 내에 남북연합방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사진은 지난 2003년 8월 30일 오후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대구유니버시아드 여자축구 결승전 북한과 일본의 경기 당시. 북한 응원단이 한반도기를 들고 응원하고 있다. ⓒ 권우성


12년 전, 김대중-김정일 두 지도자가 두 손 맞잡아 높이 들고 역사적인 6·15 선언을 했을 때 남북 주민들의 감격과 환호를 기억하십니까. 어느 누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위대한 지도자는 원대한 꿈을 실현합니다. 하여 2013년 초부터 새 정부를 꾸려나갈 남녘 지도자는 북의 김정은 제1비서와 대화·소통·합의를 거쳐 빠른 시일 내에 남북연합방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연합방의 경제는 서민 대중의 가정에게는 '저녁이 있는 삶의 여유', 기업가에게는 '거대한 새 사업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받아들여 겨레의 창창한 앞날이 눈앞에 보이는 Corea연합방의 길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도 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겨레는 다시 60년 동안 더 시련을 겪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남북의 선대 지도자가 이미 성공적인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 터전 위에서 남북은 통일의 길로 걸어가겠다고 만방에 고하십시오. 우리 모두 꿈을 안고 삽니다. 남북주민들은 '남 인공위성 북 은하로켓으로 올리자'는 꿈을, 저 역시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을 찾아오는 소박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겨레의 꿈을 이뤄냅시다!  남·북·재외 8천만 겨레의 꿈을.

[수필] 정 이월 다 가고
희망찬, 하지만 무거운 얘기를 했습니다. 마음 진정시켜 드릴 수필 한 편 첨부합니다. 2013년 '정 이월 다 가고' 3월이 오면 남북연합방의 새싹을 키워갈 남북지도자께서 수필 속의 날이 어서 오도록 힘써 주십시오. - 기자말

"정 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따앙에도..."

이 얼마 만에 듣는 노래인가. 관객들이 가득히 들어찬 축구장 넓은 잔디 위, 한복을 입은 한 중년 사내가 달랑 북 하나의 장단에 맞춰 노래하고 있었다.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벌어진 남북통일 축구경기 TV중계 화면이다. 옛날부터 귀에 익었던 노래였다. 소리 빛깔과 가락은 낯설었지만 가슴 속 깊이 묻혀있던 한(恨)을 토해내듯 부르는 소리에 나는 그만, 깊숙이 빠져들고 말았다. 그는 모국의 소리꾼 장사익이었다. 어렸을 때 동네 여자애들이 고무줄놀이하며 부르던 이 노래를 왜 이제야 다시 듣게 됐는가. 일제 강점시절, 김형원의 시 <그리운 강남>에 1928년 미국 유학서 돌아온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안기영이 작곡한 노래다.

그렇다. 이 노래는 그냥 철없는 아이들만의 노래가 아니다. 매몰찬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의 봄을 그리워하던 우리 겨레의 한과 소망이 담긴 노래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총독부에 의해 금지됐던 또 하나의 울 밑에 선 <봉선화> 같은 노래였고. 해방 후 남북의 음악 교과서에도 실려 마을마다 골목마다 메아리쳤던 노래였다.

작곡가이며 성악가였던 안기영은 우리 민담설화 <콩쥐팥쥐> <견우직녀> 같은 향토가극(오페라)도 작곡하고 공연했다. 그 시절 창가 수준의 창작계를 한 차원 높여 우리나라 가곡의 효시라고도 평가받는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의 길을 모색하고 있던 때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어 조선독립의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가 무관학교를 다니다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만나 상해 대학에 진학했다.

4년 뒤 서울로 돌아와 이화여전 음악조교를 하던 그는 1925년, 미국 오레곤 주 엘리슨화이트 음대로 유학길에 오른다. 3년 뒤 귀국해서 이화여전 음악교수로 재직하던 중 지금의 교가도 작곡했다. 1945년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에서 암살 당한 여운형 선생의 추도곡을 작곡하고 장례식에서 그 곡을 지휘하기도 했다. 좌우이념의 대립 속에 그는 좌익으로 인식돼 이승만 정부에서 음악활동마저 중지당하자 6·25전쟁 중에 월북을 택한다. 그의 음악은 그 후 남녘에서 사라졌다. 북녘에서 평양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1980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작품들은 남녘에 민주화 바람이 불어온 1988년 말에야 해금 됐다.

시대를 앞섰던 그의 기여가 뒤늦게나마 남녘에서 조명됐다. 그리고 죽은 듯 땅속에 묻혔던 안기영 음악의 뿌리가 장사익에 의해 되살아나 우리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지난 2008년, 로스앤젤레스 챈들러음악당 장사익 소리판 공연에서 열광하는 3000명 관중들과 나는 함께했다. 1부 공연에서는 <희망 한 단> <찔레꽃> 등 국악에 바탕을 둔 풋풋한 황톳빛 노래들을, 2부에서는 친근한 가요 <봄날은 간다> <동백아가씨> <님은 먼 곳에> 등을 탁하지만 가슴 시린 서정을 담아 온 몸으로 절규하는 듯 불렀다. 북과 장구의 국악기와 기타와 피아노가 어우러진 반주는 감동의 깊이를 더했고, 구슬픈 듯 아득한 해금의 음색도 가슴을 파고들었다. 우리 겨레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한과 끈끈한 정이 묻어나는 노래들을 그만의 독특한 소리판으로 이어갔다.

한 판 한 판 더해 가며 무대와 청중은 하나가 됐다. 마지막 판을 마친 그는 "용의 눈에 점을 찍은 이 공연에 와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미주순회 마지막 공연에 성황을 이뤄준 것에 대한 인사였다. 감동에 벅찬 관중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며 모두 일어섰다. 기어이 "한. 번. 더! 한. 곡. 더!" 등 열화와 같은 앙코르 요청을 보냈다. 그가 안기영의 곡을 엮은 <강남 아리랑>을 선창하자 객석에서 <아리랑>이 흘러나오더니 곧 무대 위 출연자들과 관객이 모두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또 다아시 보오옴이 오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 <아리랑>을 들으며 문득 한 일화가 생각났다. 분단 36년, 남녘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1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통일을 열망하는 재미동포 인문학 교수와 기독학자들이 처음으로 북녘 사람들과 만났다. 무서운 결의에 찬, 그러나 떨리는 만남이었다. 축배를 들고난 뒤에도 어색하고 긴장이 안 풀려 서로들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좌중의 한 부인이 조용히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입이 열려 따라 부르다가 합창이 되고 끝내 모두는 눈물을 머금으며 서로를 껴안았단다. 아리랑 음률에 남과 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아리랑 노랫말을 되뇌다 보면 우리의 목은 메인다. 만감으로 가득 찬 나의 가슴도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날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속으론 조용히 노래의 끝 소절을 '조국의 통일을 어서 이루세'로 바꿔 불러봤다.

이 소박하고 더 없이 고운 <그리운 강남>을 읊은 김형원은 일제 강점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다. 신경향파문학의 선구자로 활동하며 저항적 참여시도 많이 썼다. 허나 일제강점말기에 그는 조선총독부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해방 후 이승만 남녘 단독정부 수립 때에는 공보처 차장이 됐다. 뒤에 나온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도 올랐다. 그가 6·25 전쟁 때 납북된 것으로 짐작되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일제강점과 해방,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청춘을 산 우리 선대들의 삶이 파란만장하지 않았던 분이 몇이나 될까. 아직도 반목과 대결을 계속하고 있는 이 분단 조국의 어리석음과 허망함. 남북의 동포가 똑같이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 <아리랑> 가락이 어찌 그리 아픈 굴곡의 역사를 겪어야 했나. 우리 겨레의 영혼에 들어와 어린 아이들마저 즐겨 부르던 노래를 왜 끊었다 이었다가, 버렸다 주었다 해야만 했는지! 겨레의 애틋한 소망을 담은 이 한 노래의 역사마저 우리의 가슴을 에인다. 떠난 자와 남은 자, 남았으면서도 갈라져 사는 가족의 아픈 사연과 수난들... 분단 조국의 슬픔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사계절이 분명치 않은 이곳 남가주지만, 매해 3월이면 공기 맑은 해안도시 산후안 카피스트라노에서 제비축제가 열린다. 우리 겨레에게도 평화와 통일의 감람나무 잎새를 물고 올 제비가 기다려진다. 그 언제 남과 북의 동포들이 한 자리에 앉아 손 맞잡고 "정 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를 함께 다시 부를 날이 올까.(한국산문 2008년 6월호 게재)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오인동씨는 재미동포 정형외과 의사입니다. 저서로는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2010) <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이다>(2010) <꼬레아, 코리아>(2008) 등이 있습니다. 이 글에 언급된 여러 화두에 관련한 글은 www.615west.org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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