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김춘추는 처음부터 국왕감으로 찍혔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드라마 <대왕의 꿈>, 두 번째 이야기
▲ <대왕의 꿈>. ⓒ KBS
고구려·백제·신라의 항쟁이 뜨거웠던 서기 7세기를 다루는 TV 사극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신라 김춘추가 상당히 젊어서부터 차기 국왕으로 거론된 것처럼 스토리를 전개한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2009년에 방영된 MBC <선덕여왕>에서도 나타났다. 이 드라마에서는 선덕여왕이 어린 조카인 김춘추에게 대권을 넘겨주려 했지만, 애인인 비담이 김춘추를 싫어했기 때문에 여왕이 둘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고 했다. 참고로, 선덕여왕과 비담이 애인 관계였다는 것은 드라마 속의 설정에 불과하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KBS <대왕의 꿈>에서도 김춘추(604~661년)는 아주 어린 나이에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드라마 초반부에서 그는 제26대 진평왕 집권기간(579~632년)에 일찌감치 태자로 거론됐다가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보수파의 거두인 알천이 김춘추를 추천했지만 반대파의 공세로 주춤했다는 것이 드라마 속 이야기다. 이 드라마대로라면, 김춘추는 경우에 따라 선덕여왕(진평왕의 딸)보다 먼저 왕위에 올랐을 수도 있다. 잘만 했으면, 어린 나이에 소년 왕이 됐을 수도 있는 것이다.
<대왕의 꿈>에서 김춘추가 차기 임금으로 거론된 시기는 <선덕여왕>의 경우보다 훨씬 더 빨랐다. <선덕여왕>에서는 제27대 선덕여왕 말년부터 김춘추가 논의의 중심에 들어갔다고 한 데 비해, 이 드라마에서는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 때부터 그런 일이 있었다고 했다.
사극들이 이처럼 김춘추를 대권 무대에 조기 등판시키려고 하는 것은 이미 진평왕 사망 무렵부터 왕실에 성골 남자가 없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유능한 진골 남자인 김춘추가 아주 어려서부터 차기 주자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 김춘추(최수종 분). ⓒ KBS
진평왕 시대에는 진평왕의 아버지이자 제24대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태자의 혈통이 성골 왕족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왕족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혈통으로 간주됐고, 이들 중에서만 왕위계승자가 나와야 한다는 관념이 출현했다.
김춘추는 진흥왕의 차남인 제25대 진지왕의 손자다. 참고로, 신라 왕통은 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으로 이어졌다. 동륜태자가 죽은 뒤 동생인 진지왕이 진흥왕을 계승했지만, 진지왕이 3년 만에 죽자 진지왕의 아들들이 있었는데도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이 뒤를 이었다.
이후 신라에서는 동륜태자와 진평왕의 직계후손들이 자기들만의 배타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여기에 끼지 못한 김춘추 같은 왕족들은 진골 신분을 갖고 왕위계승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진평왕 말년부터 차기를 계승할 성골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김춘추가 일찌감치 후보로 부상했다는 것이 <대왕의 꿈>의 이야기다. 이렇게 되면, 김춘추는 적어도 20대 때부터 차기 국왕 감으로 관심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춘추는 왕족인 데다가 천재였으므로 그럴 만도 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더라도, 진평왕 때 김춘추가 대권주자로 부각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를 봐도 마찬가지다. 이에 따르면, 김춘추는 진평왕 말년인 626~629년에 20대 초반의 나이로 화랑 대표인 풍월주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드라마 <선덕여왕>의 설정처럼 적어도 선덕여왕 시대에는 김춘추가 후계자로 거론됐을까? 성골 남자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선덕여왕이 자녀를 낳지 못했으므로, 진골 왕족인 김춘추가 주목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비담의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에 선덕여왕이 사망했고 여왕의 사촌인 제28대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다. 신라본기의 분위기를 보면, 진덕은 선덕보다도 훨씬 더 안정적인 조건에서 왕좌를 차지했다.
▲ 선덕여왕(박주미 분). ⓒ KBS
그렇다면 적어도 진덕여왕 때는 김춘추가 주목을 받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진덕이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사망한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주목을 받은 인물은 알천이었다. 물론 그가 새로운 국왕으로 거론된 것은 아니었다. 신라본기에 따르면, 귀족들은 그에게 왕을 대신할 섭정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김춘추가 왕좌의 주인으로 추천된 것은 그 직후였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알천은 섭정 직을 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늙었습니다. (이제까지) 이렇다 할 덕행을 쌓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로는 김춘추 공 같은 이가 없습니다. 세상을 다스릴 영웅호걸이라 할 만합니다."
이때가 서기 654년. 김춘추가 쉰한 살 때였다. 사극들에서는 김춘추가 아주 어려서부터 왕위계승자로 주목을 받은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처럼 실제의 김춘추는 오십이 넘은 뒤에야 비로소 그런 위치에 올라섰다.
김춘추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김유신과 더불어 국정 운영의 투톱을 형성했다. 김유신은 군사 방면에서, 김춘추는 외교 방면에서 왕조의 축을 이루었다. 한민족 역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신라 역사를 통틀어서 김춘추만큼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과감하게 외교무대에 나선 인물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족이 이처럼 실력까지 겸비했으니, 김춘추는 드라마에서처럼 일찍부터 차기 주자로 거론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지천명의 나이를 넘긴 뒤에야 비로소 그런 상태에 도달했다. 그런데도 사극들에서 그가 어린 나이에 그런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묘사되는 것은 우리가 신라를 지나치게 남성 중심의 사회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의 저변에는 진평왕이 죽은 뒤로 성골 남자가 없었으니 유능한 진골인 김춘추가 주목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았겠느냐는 관념이 깔려 있다. 성골 남자가 전혀 없었으면, 성골 여자가 몇 명 있든지 간에, 진골 남자 중에서 후계자를 찾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인 것이다.
▲ 신라 왕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 김종성
이것은 신라를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리더십이 상당히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평왕이 죽은 직후에 신라 귀족들이 선덕여왕을 추대한 것은 그런 문화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은 안 된다"며 선덕여왕에게 반기를 든 비담의 구호도 신라인들의 보편적 호응을 얻지 못했다. 쿠데타 와중에 선덕이 사망하자, 진덕여왕은 별다른 사회적 저항을 받지 않고 자연스레 왕위를 이었다. 이는 비담의 구호가 신라인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여성의 리더십을 경험한 신라인들은 '왕위는 가급적 남자가 계승해야 하지만, 비상시에는 여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고 판단해야 한다. 이렇게 판단하지 않으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자연스레 왕위에 오른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신라인들은 '성골 남자가 없으면 진골 남자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인식한 게 아니라 '성골 남자가 없으면 성골 여자가 하면 된다'고 인식했다고 판단해야 한다. 이렇게 판단하지 않으면 김춘추가 선덕·진덕을 제치고 왕이 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성골 남자가 없었으므로, 진골인 김춘추가 성골 여자들을 대신해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을 것'이라는 관념은 신라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선입견이 드라마 속의 오류를 조장한 것이다.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 때의 신라인들은 단지 성골 남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들의 시대를 위기의 시대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골 여자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춘추가 사극에서처럼 어린 나이에 대권주자로 부각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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