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나를 매국노로 만들고 있어요"
[인터뷰] 일본 매각절차 밟는 제주평화박물관 이영근 관장
▲ 제주평화박물관에는 <조선통보> 등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희귀자료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통보>를 들어보이는 이영근 관장. ⓒ 이주빈
통화 한번 하고, 긴 한숨 한번 내뱉고… 9일 제주평화박물관 이영근 관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제주시내에서 다시 만났지만 짬을 내기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쉬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 때문이었다.
이 관장이 "다른 곳도 아닌 일제 침략역사를 복원·보존하고 있는 평화박물관을 일본에 매각한다는 뉴스를 보고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는 마음에 전화주시는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다시 긴 한숨을 내뱉었다. "죽고 싶은 심정"이라며 이 관장이 말문을 열었다.
그는 평화박물관을 일본에 매각하기 위한 각서를 체결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된 결정적 이유는 "정부의 무관심과 시간 끌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문화재청에서 제주도청이 요청한대로 평화박물관을 매수해주겠다는 말만 믿고 지난 3월부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다릴 만큼 기다렸지만 정부는, 즉 문화재청은 아무런 협의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연락 한 번이 없어서 제가 먼저 문화재청으로 찾아갔더니 '왜 왔냐'고 할 때는 기가 막혔습니다.
은행에서 최고장이 온 사실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문화재청 관계자는 미래에셋 회장의 고택이 경매로 나와 사들인다는 말만 반복하더군요. '평화박물관이 재정난을 감당 못하고 경매로 나오면 사들이겠다는 뜻인가'하고 절로 의심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매입을 하겠다는 약속을 안 했으면 저도 여기까지 오지 않고 진작 다른 방안을 모색했을 겁니다. 정부가, 문화재청이 시간만 끌며 사실상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지난 6개월 동안 빚은 배로 늘었고, 위아래 윗몸은 다 헐어버렸습니다."
평화박물관이 일본으로 매각되는 절차를 밟고 있다는 뉴스에 '왜 하필 일본이냐'고 따지는 댓글도 많이 있다고 그에게 전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선조들이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일제에 고통을 당했던 현장입니다. 그 치욕스럽고 아픈 고통의 현장을 전 재산을 털고 빚까지 내어 복원했던 나인데 이곳을 일본에 팔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관심을 보이는 분이 없었습니다. 또 간혹 문의하는 사람들은 투자 대비 수익만 따지더군요.
갈수록 상황은 안 좋아져 가고… 나 혼자만 죽으면 괜찮은데 도움 준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되고 심지어 가정파탄까지 시킬 수 있다는 지경에 이르니까 저렇게 간절히 원하는 일본 사람에게라도 매각을 해야겠다고 검토를 한 것입니다. 정부의 무관심과 시간 끌기가 나를 매국노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사는 내가 원망스럽습니다. 도쿄에서 죽는 심정으로 각서에 서명했어요. 각서 찍고 일어나 한동안 걷질 못했습니다. 이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면 각서 취소할 수 있어"
▲ 이영근 제주평화박물관 관장이 일본 측과 체결한 각서를 내보이며 "정부의 무관심이 나를 매국노로 만들고 있다"고 통탄했다. ⓒ 이주빈
평화박물관 측과 일본 측이 서명한 각서를 보면 일본으로의 매각절차가 시작된 건 맞다. 하지만 매각절차가 아예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각서는 올해 12월 1일부터 유효하다고 서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하루가 지날수록 이자에 빚만 늘어나는데 이 관장은 왜 당장 매각하지 않았을까.
"효력발생 시점을 12월 1일로 한 것은 그때까지 어떻게든 각서를 취소할 수 있는 여건이 한국에서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강제징용 당한 아버지와 선조대의 한을 풀겠다고 재산 다 털고 빚내가며 해온 일입니다. 이 평생의 업을 다 포기하고 일본에 매각하려 하는 제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든 한국에서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정부가 정상적으로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문서로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면 각서를 취소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올해 예산이 없어서 한꺼번에 못하겠다면 올해 버틸 수 있는 예산만 지원을 하고 내년 예산에 반영하는 식으로 순차적으로 해도 제가 피해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원래 정부가 매입하겠다고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그나마 이런 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조차도 할 의향이 없다면 각서의 내용대로 일본에 파는 수밖에 길이 없습니다."
이 관장은 "선진국은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큰 나라이고 선진국에선 묻힌 것까지 발굴해가며 자기의 역사를 만들어가는데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이 제돈 들여 발굴하고 복원한 것조차 나 몰라라 한다"고 비판했다.
"나의 모든 것을 털어 발굴하고 보존하고 있는 문화재를 정부가 문화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를 밟아 죽이는 것입니다. 사실 그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자신들이 등록문화재로 지정해놓고도 무시하는데 일본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겠다고 하니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한편, 이영근 관장은 가마오름 일본군 진지 발굴과 복원, 평화박물관 건립과 운영을 위해 모두 75억 원을 쏟아부었다.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308호로 지정된 가마오름 일본군 진지의 발굴과 복원을 위해서만 개인재산과 은행빚 등 모두 25억원을 들였다.
이 관장이 국가 대신 개인돈으로 발굴하고 복원한 가마오름 일본군 진지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는 가마오름 일본군 진지의 역사문화교육가치가 약 250억원에 달한다고 평가했다. 물론 이 평가에는 토지평가와 시설투자, 수목 등은 모두 제외된 평가다. 문화재청은 이 가마오름 일본진지 매입금액으로 2억4700만 원을 검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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