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불산 피해, 종이 몇장으로 막을 수 있었다
[주장] 물질안전보건자료 확인은 필수... '전문가 풀' 꾸리는 것도 시급해
실제 유해화학물을 취급하고 제조하는 회사에 근무하면서 겪었던 사례를 중심으로 화학사고 초동 대처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기자 말
[사례①] "비누 원료라던데 운전자 얼굴에 화상이..."
2009년 가을쯤이었다. 내 휴대전화에 '0XX-XXX-0119'라는 발신번호가 떴다. 받고 보니 관내 소방서 관제직원의 다급한 전화였다. 그는 고속도로 상에서 탱크로리가 전복돼 비누원료로 추정되는 약품이 누출됐다며 어떻게 방제해야 하는지 급하게 물었다. 단 몇 마디만 나눴을 뿐인데 나는 그 액체가 유독물임을 직감했다.
"운전자 말로는 비누원료라고만 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네요. 운전자 얼굴에 화상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도로 옆 냇가에는 작은 고기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니, 급하니까 이리로 빨리 좀 와주세요!"
"비누 원료요? 그렇다면 혹시 '수산화나트륨'이나 '가성소다'라 불리는 유독물은 아닌지 살펴봐 주세요. 아마 차량 탱크에 약품명이 표시돼 있거나 유독물 운반카드가 있을 겁니다. 혹시라도 맞다면 그건 유독물입니다"
"그래요? 그럼 선생님께서 취급하시는 방제약품이나 적절한 중화조치는 없을까요?"
"유출약품이 알칼리성이니 중화조치는 염산 등 약산성 약품이 해당되겠지만, 잘못 사용하면 2차 오염이나 환경피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 섣불리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일단 누출량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하니 건조된 흙이나 모래 등으로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절대 작업자들의 피부에 직접 닿지 않도록 당부해주세요!"
사고 내용은 이랬다. 예상대로 실제 탱크로리에 실렸던 약품은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NaOH·비중 약1.52·pH14)라 불리는 강알칼리성 유독물 원액이었다. 이날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탱크로리차는 급커브를 지나다 운전 미숙으로 전복되고 말았다.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 않은 운전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탱크로리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약품을 막기 위해 홀로 수습하려 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출동한 소방관의 질문에 운전자는 문책이 두려워 '비누원료'라고 얼버무린 것이었다.
전복된 유독물 탱크로리 운전자, 문책 두려워 "비누원료"
유독물의 위험성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경찰과 소방관들이었지만, 운전자의 피부에 거무스름할 정도의 화상 흔적이 보이기 시작하자 뭔가 심상치 않은 약품임을 직감했다. 급기야 고속도로 바로 옆 하천에는 극히 일부만 유입됐는데도 치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방제팀은 부랴부랴 해당 지자체에 환경 관련 업체를 수소문한 후 나를 찾은 것이었다.
당시 운전자는 자신이 운반하는 유독물의 특성이나 응급방제 요령도 제대로 모르는 채 탱크로리를 몰고 있었고 최소한의 방제장비도 갖추지 않았다. 또 운전자는 사고 시 현장에 출동한 방제팀에게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는 유독물 운반카드(운반 중인 유독물의 특성과 방제요령을 적은 카드)조차 비치하지 않았다. 방제팀은 운전자의 진술에만 의존했던 것.
이미 하천에 유입된 곳을 차단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다행히 흘러들어간 양이 미미해 더 이상의 오염사고로는 확산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당시 흘러들어 간 약품의 양이 많았거나 약품이 불산(불화수소산) 같은 강산성이었더라면 피해규모는 엄청났을 것이다. 이번 불산 누출로 인한 피해가 급속도로 퍼진 가장 큰 원인도 누출 약품의 특성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 아니었던가.
[사례②] 염산 누출사고 발생... "탱크로리 보내주세요"
지난해 3월, 염산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OO화학공단 내 한 공장에서 '탱크로리 차량을 급히 수소문할 수 없겠냐'는 연락이 왔다. 공장 내 염산 저장탱크(50m³) 하부의 드레인밸브(Drain Valve·이토변)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염산이 누출되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염산의 부식성으로 인한 단순한 균열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압력이 걸리면서 점점 균열이 커지고 말았단다. 결국 누출이 심해져 저장탱크 내 모든 약품을 빼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다행히 약품을 수거할 차량은 바로 준비됐다. 염산 저장탱크 방호벽(약품누출 차단시설) 내에 누출된 양은 아직 미미했지만 탱크로리에 옮기는 시간만 2시간 정도 걸리는 게 걸림돌이었다. 특히 염산의 농도는 35%의 고농도. 강산성인 염산은 피부 특히 눈에 직접 닿을시 심한 손상을 일으켜 심하면 실명할 수도 있으며 흡입 시 기관지폐렴이나 폐부종으로 사망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독극물이다.
MSDS 통한 침착한 대처... 노출가스 최소화로 피해 막아
우선 나는 현장담당자에게 방제요령을 유선상으로 침착하게 설명했다. '절대 현장관리자의 자의적인 판단과 처치는 금물'이며 '조치 처음부터 끝까지 물질안전보건자료(Material Safety Data Sheet·MSDS)를 통한 정확한 방제'를 주문했다.
또 '스크러버(유해가스 정화 및 대기 배출설비)를 최대한 활용하고 작업자에게는 내산성 보호구와 보호복을 착용하라'고 당부했다. '염산이 신체에 닿았을 경우 특정한 해독제가 없으니 작업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흐르는 물로 계속 살수해 가스 발생을 감소시키라'고도 주문했다.
이날 사고 현장에서는 일사불란한 대처가 이뤄졌고, 천만다행으로 누출 직후 정확한 방제조치가 취해졌다. 누출 가스를 최소화해 인명피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보호마스크를 착용했다고는 하지만 워낙 강한 유독성 가스라 현장 작업자들이 약간의 현기증 증세를 보인 것 말고는 큰 문제는 없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내 안경 렌즈의 코팅이 녹아버려 쓸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단시간의 유독물 가스 누출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경북 구미 국가산업단지 내 화학물질 제조업체에서 탱크로리의 불산이 일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5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 명이 크게 다쳤다. 이후 불산 가스가 주변으로 퍼지면서 2차 피해가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병원 치료를 받은 주민이 3000여 명을 넘어섰고, 농작물 피해 규모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불산 가스 누출사고에 대한 부실 대응으로 질타를 받고 있는 정부는 화학물질 관리를 강화한다며 조급하게 이것저것 추진하고 있다. 전수조사에 의해 취급 품목과 업체의 사고 발생을 구분해 매뉴얼을 작성, 상황별로 대처한다고 밝혔다. 또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이른바 '화평법' 시행 안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화학약품 누출사고가 한두 해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지만 사건이 발행할 때마다 커다란 사회적 파장이 이는 것도 유사하다.
누출 사고 대처할 때는 해당 약품 MSDS 확인부터
하지만 대응방법의 변화 없이는 '도로아미타불'이다. 매번 그러했듯, 또다시 방재시스템을 재정비한다는 명목 아래 장비구입으로 거액의 예산만 투입하고 누출사고 관련자 몇 사람을 시범케이스로 사법처리하는 척하다가 흐지부지될지 모를 일이다.
전국의 모든 유독물 사용업체를 폐쇄하고, 모든 소방대원에게 다른 업무 제쳐놓고 수천 종의 유해물질 방제법을 달달 외우게 하고, 모든 탱크로리차는 고속도로 진·출입 시 톨게이트에서 허가를 받고 운행해야 한다면 모를까.
제2, 제3의 불산 사태가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또다시 '소방인력과 예산 부족' '미온대처가 화 불렀다' '알고 보니, 절차 무시' 등 이런저런 '소설' 써가며 갑론을박할 것인가.
만약 이번처럼 바로 내 눈앞에서 유독 약품과 가스가 누출됐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앞에서 눈도 못 뜨고 숨 막히는 유독가스가 퍼져 나온다면? 그야말로 정신을 놔 버리고 말 것이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수습절차 무시나 미온 대처의 문제라기보다 무엇이 유출됐는지, 어떤 성질을 가진 화학물질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단 물부터 뿌린 대처였다고 생각한다.
출동한 소방당국은 부식성이 강한 불산을 제독시키기 위해 알칼리약품인 소석회를 뿌리고 물을 뿌려 중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했지만, 불산이 보다 빠르게 증발돼 이로 인한 2차 피해를 더 키우고 말았다. 독성가스 유출사고에 따른 취급상 주의사항이나 응급방제요령 등에 관한 MSDS만 살펴봤더라도 이 같은 사태까지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각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화학제품에 대해 ▲ 성분과 위해성 여부 ▲ 취급 및 저장방법 ▲ 사고 시 대처 요령 ▲ 누출 및 화재 시 대응법 등을 적은 MSDS를 사업장 내 비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도 거의 대부분의 화학제품 제조업체에서는 판매와 유통과정에서 해당 약품의 시험성적서와 MSDS를 함께 제공하고 있다.
유독물 운반카드가 없다면? 차량외부 부착표시 활용하라
특히 3~4장으로 돼 있는 이 문서는 해당 약품의 화학적 물성과 위험성, 그에 누출되는 상한 기준선까지 모두 정해놨고, 운송 시 누출사고나 화재 발생 시 대처 방법도 모두 기록돼 있다. 결국 MSDS를 통해 얻은 단 1분의 방제요령만 습득해도 사고 발생 시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는 확률은 수십 배로 높아진다. 혹시라도 현장에 MSDS가 비치돼 있지 않다면? 인터넷을 사용해 산업안전공단이나 관련 업체 누리집에서도 쉽게 내려받을 수 있다(이 기사 하단에서 불산 MSDS를 내려받을 수 있다).
또, 현재 일정 수준 이상의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은 화학 사고가 발생했을 때 즉각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인 '자체방제계획'이라는 제도로 관리되고 있다. 예를 들어 염산의 경우, 보관 및 저장 수량이 20톤 이상일 경우에는 자체방제계획 수립대상이다.
여기에는 ▲ 취급유독물의 유해성 자료 ▲ 사고 시 응급조치방안 ▲ 사고 시 주민의 대피요령 등이 반드시 기재돼 있어야 한다. 하지만 기준량 이하의 소규모 사업장은 사고 자체방제계획서 적용에서 제외돼 있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은 화물자동차운송업자가 유해화학물질(환경부 장관이 고시함)을 5000kg 이상 운반 시 운반계획을 숙지하고 운반사고에 대비해 유독물 운반카드와 일정한 방제장비를 갖추도록 하고 있다.
이 운반카드에는 적재 물질의 이름·성분·유독성과 누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취해야 할 초동조치 요령과 신고 관서 전화번호 등이 기재돼 있다.
혹여 유독물 운반카드를 소지하고 있지 않다면? 차량 외부에 부착된 적재물 표시에 기재된 약품명을 검색해 MSDS를 찾아보고 이를 통해 적절한 방제조치를 취해야 한다.
사고 발생 때 가장 먼저 소방관들이 출동하지만 이들의 주 임무는 화재진압이나 인명구조다. 하지만 화학물질이나 독성가스 누출사고에 대비한 장비는 물론이고 상세한 매뉴얼도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 사고처럼 현장에서 중화제 대신 물을 뿌려 가스 확산을 초래하는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이는 화학 사고 발생 시 현장에 직접 투입이 가능한 '전문가 풀(Pool)'을 만들어 바로 연계한다면 충분히 대처 가능하다.
전문가 풀 도입... 화학사고 대응 시스템화 절실
화학사고 대처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방제조치 등을 실제적으로 지원하게 될 전문가 풀을 학계·화학회사·연구소·보건환경단체·환경화학기술 전문인력 등으로 구성해야 한다.
각 소방서와 지자체 환경정책부서는 1서 1담당자를 의무적으로 지정해 긴급상황 발생 시 전문가에 의한 정확한 정보파악을 통해 정확한 방제요령을 지령하는 화학물질 사고대응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방당국은 언제까지 화학분석차량과 물질별 매뉴얼 등 특성에 맞는 장비와 정보가 부족하다고 한탄만 할 것인가.
불산 가스 누출사고 이후 생긴 두려움의 체감 위력은 이미 방사선 공포 이상이다. 10일 구미 피해지역의 대기·수질·토양 및 지하수 등에서 불산이 '불검출' 또는 '기준치 이내'로 검출돼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정부 발표는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불산이 아닌 또 다른 유독물질 누출 사고가 일어난다면 이제는 완벽히 위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말이다.
[사례①] "비누 원료라던데 운전자 얼굴에 화상이..."
▲ 유독물을 운반하는 한 탱크로리 차량의 외부에 기재된 적재량 표시. ⓒ 김학용
2009년 가을쯤이었다. 내 휴대전화에 '0XX-XXX-0119'라는 발신번호가 떴다. 받고 보니 관내 소방서 관제직원의 다급한 전화였다. 그는 고속도로 상에서 탱크로리가 전복돼 비누원료로 추정되는 약품이 누출됐다며 어떻게 방제해야 하는지 급하게 물었다. 단 몇 마디만 나눴을 뿐인데 나는 그 액체가 유독물임을 직감했다.
"운전자 말로는 비누원료라고만 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네요. 운전자 얼굴에 화상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도로 옆 냇가에는 작은 고기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니, 급하니까 이리로 빨리 좀 와주세요!"
"비누 원료요? 그렇다면 혹시 '수산화나트륨'이나 '가성소다'라 불리는 유독물은 아닌지 살펴봐 주세요. 아마 차량 탱크에 약품명이 표시돼 있거나 유독물 운반카드가 있을 겁니다. 혹시라도 맞다면 그건 유독물입니다"
"그래요? 그럼 선생님께서 취급하시는 방제약품이나 적절한 중화조치는 없을까요?"
"유출약품이 알칼리성이니 중화조치는 염산 등 약산성 약품이 해당되겠지만, 잘못 사용하면 2차 오염이나 환경피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 섣불리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일단 누출량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하니 건조된 흙이나 모래 등으로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절대 작업자들의 피부에 직접 닿지 않도록 당부해주세요!"
사고 내용은 이랬다. 예상대로 실제 탱크로리에 실렸던 약품은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NaOH·비중 약1.52·pH14)라 불리는 강알칼리성 유독물 원액이었다. 이날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탱크로리차는 급커브를 지나다 운전 미숙으로 전복되고 말았다.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 않은 운전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탱크로리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약품을 막기 위해 홀로 수습하려 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출동한 소방관의 질문에 운전자는 문책이 두려워 '비누원료'라고 얼버무린 것이었다.
전복된 유독물 탱크로리 운전자, 문책 두려워 "비누원료"
유독물의 위험성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경찰과 소방관들이었지만, 운전자의 피부에 거무스름할 정도의 화상 흔적이 보이기 시작하자 뭔가 심상치 않은 약품임을 직감했다. 급기야 고속도로 바로 옆 하천에는 극히 일부만 유입됐는데도 치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방제팀은 부랴부랴 해당 지자체에 환경 관련 업체를 수소문한 후 나를 찾은 것이었다.
당시 운전자는 자신이 운반하는 유독물의 특성이나 응급방제 요령도 제대로 모르는 채 탱크로리를 몰고 있었고 최소한의 방제장비도 갖추지 않았다. 또 운전자는 사고 시 현장에 출동한 방제팀에게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는 유독물 운반카드(운반 중인 유독물의 특성과 방제요령을 적은 카드)조차 비치하지 않았다. 방제팀은 운전자의 진술에만 의존했던 것.
이미 하천에 유입된 곳을 차단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다행히 흘러들어간 양이 미미해 더 이상의 오염사고로는 확산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당시 흘러들어 간 약품의 양이 많았거나 약품이 불산(불화수소산) 같은 강산성이었더라면 피해규모는 엄청났을 것이다. 이번 불산 누출로 인한 피해가 급속도로 퍼진 가장 큰 원인도 누출 약품의 특성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 아니었던가.
[사례②] 염산 누출사고 발생... "탱크로리 보내주세요"
▲ 일정 수준 이상의 사고대비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은 화학사고 발생 시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인 ‘자체방제계획’이라는 제도로 관리되고 있다. 사진은 자체방제계획서 내용중 일부. ⓒ 김학용
지난해 3월, 염산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OO화학공단 내 한 공장에서 '탱크로리 차량을 급히 수소문할 수 없겠냐'는 연락이 왔다. 공장 내 염산 저장탱크(50m³) 하부의 드레인밸브(Drain Valve·이토변)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염산이 누출되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염산의 부식성으로 인한 단순한 균열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압력이 걸리면서 점점 균열이 커지고 말았단다. 결국 누출이 심해져 저장탱크 내 모든 약품을 빼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다행히 약품을 수거할 차량은 바로 준비됐다. 염산 저장탱크 방호벽(약품누출 차단시설) 내에 누출된 양은 아직 미미했지만 탱크로리에 옮기는 시간만 2시간 정도 걸리는 게 걸림돌이었다. 특히 염산의 농도는 35%의 고농도. 강산성인 염산은 피부 특히 눈에 직접 닿을시 심한 손상을 일으켜 심하면 실명할 수도 있으며 흡입 시 기관지폐렴이나 폐부종으로 사망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독극물이다.
MSDS 통한 침착한 대처... 노출가스 최소화로 피해 막아
▲ 이번에 문제가 된 불산의 화학적 물성과 위험성, 노출 상한 기준선을 비롯, 운송 시 누출사고나 화재발생시 대처 방법이 기록된 MSDS의 첫 페이지.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구할 수 있다. ⓒ 산업안전공단
우선 나는 현장담당자에게 방제요령을 유선상으로 침착하게 설명했다. '절대 현장관리자의 자의적인 판단과 처치는 금물'이며 '조치 처음부터 끝까지 물질안전보건자료(Material Safety Data Sheet·MSDS)를 통한 정확한 방제'를 주문했다.
또 '스크러버(유해가스 정화 및 대기 배출설비)를 최대한 활용하고 작업자에게는 내산성 보호구와 보호복을 착용하라'고 당부했다. '염산이 신체에 닿았을 경우 특정한 해독제가 없으니 작업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흐르는 물로 계속 살수해 가스 발생을 감소시키라'고도 주문했다.
이날 사고 현장에서는 일사불란한 대처가 이뤄졌고, 천만다행으로 누출 직후 정확한 방제조치가 취해졌다. 누출 가스를 최소화해 인명피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보호마스크를 착용했다고는 하지만 워낙 강한 유독성 가스라 현장 작업자들이 약간의 현기증 증세를 보인 것 말고는 큰 문제는 없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내 안경 렌즈의 코팅이 녹아버려 쓸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단시간의 유독물 가스 누출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경북 구미 국가산업단지 내 화학물질 제조업체에서 탱크로리의 불산이 일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5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 명이 크게 다쳤다. 이후 불산 가스가 주변으로 퍼지면서 2차 피해가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병원 치료를 받은 주민이 3000여 명을 넘어섰고, 농작물 피해 규모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불산 가스 누출사고에 대한 부실 대응으로 질타를 받고 있는 정부는 화학물질 관리를 강화한다며 조급하게 이것저것 추진하고 있다. 전수조사에 의해 취급 품목과 업체의 사고 발생을 구분해 매뉴얼을 작성, 상황별로 대처한다고 밝혔다. 또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이른바 '화평법' 시행 안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화학약품 누출사고가 한두 해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지만 사건이 발행할 때마다 커다란 사회적 파장이 이는 것도 유사하다.
누출 사고 대처할 때는 해당 약품 MSDS 확인부터
▲ 불산 MSDS에 기록된 누출 시 대처방법과 위험성. MSDS만 잠깐 살펴봤더라도 이 같은 사태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 산업안전공단
하지만 대응방법의 변화 없이는 '도로아미타불'이다. 매번 그러했듯, 또다시 방재시스템을 재정비한다는 명목 아래 장비구입으로 거액의 예산만 투입하고 누출사고 관련자 몇 사람을 시범케이스로 사법처리하는 척하다가 흐지부지될지 모를 일이다.
전국의 모든 유독물 사용업체를 폐쇄하고, 모든 소방대원에게 다른 업무 제쳐놓고 수천 종의 유해물질 방제법을 달달 외우게 하고, 모든 탱크로리차는 고속도로 진·출입 시 톨게이트에서 허가를 받고 운행해야 한다면 모를까.
제2, 제3의 불산 사태가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또다시 '소방인력과 예산 부족' '미온대처가 화 불렀다' '알고 보니, 절차 무시' 등 이런저런 '소설' 써가며 갑론을박할 것인가.
만약 이번처럼 바로 내 눈앞에서 유독 약품과 가스가 누출됐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앞에서 눈도 못 뜨고 숨 막히는 유독가스가 퍼져 나온다면? 그야말로 정신을 놔 버리고 말 것이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수습절차 무시나 미온 대처의 문제라기보다 무엇이 유출됐는지, 어떤 성질을 가진 화학물질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단 물부터 뿌린 대처였다고 생각한다.
출동한 소방당국은 부식성이 강한 불산을 제독시키기 위해 알칼리약품인 소석회를 뿌리고 물을 뿌려 중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했지만, 불산이 보다 빠르게 증발돼 이로 인한 2차 피해를 더 키우고 말았다. 독성가스 유출사고에 따른 취급상 주의사항이나 응급방제요령 등에 관한 MSDS만 살펴봤더라도 이 같은 사태까지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각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화학제품에 대해 ▲ 성분과 위해성 여부 ▲ 취급 및 저장방법 ▲ 사고 시 대처 요령 ▲ 누출 및 화재 시 대응법 등을 적은 MSDS를 사업장 내 비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도 거의 대부분의 화학제품 제조업체에서는 판매와 유통과정에서 해당 약품의 시험성적서와 MSDS를 함께 제공하고 있다.
유독물 운반카드가 없다면? 차량외부 부착표시 활용하라
특히 3~4장으로 돼 있는 이 문서는 해당 약품의 화학적 물성과 위험성, 그에 누출되는 상한 기준선까지 모두 정해놨고, 운송 시 누출사고나 화재 발생 시 대처 방법도 모두 기록돼 있다. 결국 MSDS를 통해 얻은 단 1분의 방제요령만 습득해도 사고 발생 시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는 확률은 수십 배로 높아진다. 혹시라도 현장에 MSDS가 비치돼 있지 않다면? 인터넷을 사용해 산업안전공단이나 관련 업체 누리집에서도 쉽게 내려받을 수 있다(이 기사 하단에서 불산 MSDS를 내려받을 수 있다).
또, 현재 일정 수준 이상의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은 화학 사고가 발생했을 때 즉각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인 '자체방제계획'이라는 제도로 관리되고 있다. 예를 들어 염산의 경우, 보관 및 저장 수량이 20톤 이상일 경우에는 자체방제계획 수립대상이다.
여기에는 ▲ 취급유독물의 유해성 자료 ▲ 사고 시 응급조치방안 ▲ 사고 시 주민의 대피요령 등이 반드시 기재돼 있어야 한다. 하지만 기준량 이하의 소규모 사업장은 사고 자체방제계획서 적용에서 제외돼 있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 유해화학약품을 5,000kg이상 운반 시는 운반계획을 숙지하고 운반사고에 대비해 유독물 운반카드를 소지하도록 하고 있다. ⓒ 김학용
이 운반카드에는 적재 물질의 이름·성분·유독성과 누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취해야 할 초동조치 요령과 신고 관서 전화번호 등이 기재돼 있다.
혹여 유독물 운반카드를 소지하고 있지 않다면? 차량 외부에 부착된 적재물 표시에 기재된 약품명을 검색해 MSDS를 찾아보고 이를 통해 적절한 방제조치를 취해야 한다.
사고 발생 때 가장 먼저 소방관들이 출동하지만 이들의 주 임무는 화재진압이나 인명구조다. 하지만 화학물질이나 독성가스 누출사고에 대비한 장비는 물론이고 상세한 매뉴얼도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 사고처럼 현장에서 중화제 대신 물을 뿌려 가스 확산을 초래하는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이는 화학 사고 발생 시 현장에 직접 투입이 가능한 '전문가 풀(Pool)'을 만들어 바로 연계한다면 충분히 대처 가능하다.
전문가 풀 도입... 화학사고 대응 시스템화 절실
▲ 지난달 27일 구미 국가산단 4단지의 휴브글로벌 공장에서 작업중 불산가스 유출 되고 있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 경북경찰청 제공
화학사고 대처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방제조치 등을 실제적으로 지원하게 될 전문가 풀을 학계·화학회사·연구소·보건환경단체·환경화학기술 전문인력 등으로 구성해야 한다.
각 소방서와 지자체 환경정책부서는 1서 1담당자를 의무적으로 지정해 긴급상황 발생 시 전문가에 의한 정확한 정보파악을 통해 정확한 방제요령을 지령하는 화학물질 사고대응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방당국은 언제까지 화학분석차량과 물질별 매뉴얼 등 특성에 맞는 장비와 정보가 부족하다고 한탄만 할 것인가.
불산 가스 누출사고 이후 생긴 두려움의 체감 위력은 이미 방사선 공포 이상이다. 10일 구미 피해지역의 대기·수질·토양 및 지하수 등에서 불산이 '불검출' 또는 '기준치 이내'로 검출돼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정부 발표는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불산이 아닌 또 다른 유독물질 누출 사고가 일어난다면 이제는 완벽히 위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말이다.
덧붙이는 글
김학용 시민기자는 환경공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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