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통일을 이야기하면 신고대상이라니요?

산책길에 발견한 '간첩 및 좌익사범' 유형 안내 표지를 보고

등록|2012.10.11 10:55 수정|2012.10.11 11:51
주말이면 아내와 동네 걷기를 합니다. 제가 사는 경기도 고양시에는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참 많습니다. '고양누리'라는 예쁜 이름답게 아기자기하게 가꿔진 다양한 형태의 길이 아내와의 행복한 주말을 더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이었습니다. 여느때처럼 한가한 일요일 오후 3시가 되어 아내와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산길로 접어드는 누리길을 걷는데 주변 나무 여기 저기에 이상한 흰색 표지가 일정한 간격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요. 처음에는 어느 산악회가 자신들의 산행 소식을 홍보하기 위한 표지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상당한 거리를 걸었음에도 그와 같은 표지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뭐지 싶었던 저는 결국 호기심이 발동하여 부지런히 놀리던 걸음을 멈추고 표지의 '정체'를 확인해 봤습니다. 알고 보니 이것은 산악회의 산행 알림 표지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국방부 제6611부대 명의로 된 이른바 '신고해 주세요' 제하의 '간첩 및 좌익사범' 유형 안내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것은 바로 그 표지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황당했던 그 사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정부 정책을 '무조건' 비판하면 좌익 사범? 황당!

고양누리길에서 만난 간첩 및 좌익사범 신고 안내 표지통일 이야기, 정부 정책 반대는 간첩 및 좌익사범이라는 국방부의 한심한 발상이 적나라게하게 기재된 표지. 고양누리 길을 오염시키는 이 표지를 부착한 해당 부대에 고양시는 과태료를 부과해야 한다. ⓒ 고상만


'군복을 입었으나 행동이 수상한 자'
'북한 말투의 낯선 행색을 갖춘 이방인'
'불안정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사진 촬영 / 정찰하는 자'

신고 안내 표지의 첫 문장을 읽고는 웃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70년대 말의 그것과 어쩌면 하나도 변하지 않은 문장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당시의 간첩 식별법은 이랬습니다.

'새벽에 구겨진 신사복을 입고 산에서 내려오는 자'
'말끔한 새 구두에 진흙이 묻어 있는 자'
'일정한 직업이 없이 고급 담배를 피우는 자'
'불안한 눈빛으로 좌우를 살피는 자'

그런데 그때로부터 무려 30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크게 변하지 않은 간첩 식별법을 보며 '이거 참 재미있네' 싶었던 것입니다. 특히 '북한 말투의 낯선 행색을 갖춘 이방인'이라는 표현은 좀 그랬습니다. 이른바 '새터민'으로 불리는 탈북자 분들은 '이 기준이라면 신고 대상이네' 싶었던 것입니다. 남한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그 분들이 쓰는 말투는 분명 북한 말투이니 말입니다.

여하간 이런 시대 착오적인 사례를 들어 '간첩 및 좌익사범'을 신고하라는 안내 표지가 누리길 곳곳에 걸려 있다니 참으로 한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 가족들과 재미삼아 들른 적이 있는 '근대사 박물관'에서나 있을법한 이런 반공 표지가 아직도 국가 세금으로 만들어 사용되고 있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쓱 보고 가던 길을 재촉하려던 순간이었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글들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제 얼굴에머물던 웃음기가 사라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 내용입니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 음모론을 이야기 하는 자'
예) 북한 소행 아니다? 미국 소행? 자작극?

순간 저는 '어'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천안함 사건에 대해 정부 발표대로 믿지 않고 다른 의심을 하거나 말하면 좌익사범이고 군 부대에 신고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천안함 침몰 1주년이었던 2011년 3월 23일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의 의뢰로 한국리서치가 발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정부 발표와 같이 천안함 침몰이 북한 도발로 인한 것을 믿는 응답자는 모두 80%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20%는 모두 군 부대에 간첩 또는 좌익사범으로 신고 대상이 됩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80%가 정부 발표를 믿는데 이것이 성에 차지 않아 100%가 될 때까지 의심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잡아가겠다는 발상인가요? 도대체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여러 정황에 대해 의혹을 말한다고 좌익사범으로 신고하라는 국방부를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점점 가관이다 싶어서 불쾌감이 치밀어 오르던 순간 제 눈을 의심할 만큼 충격적인 대목은 바로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표지에 하이라이트였습니다.

'통일 이야기, 대한민국 정부 정책을 무조건 비판하는 자'

순간 지금 제가 본 내용이 맞나 싶었습니다. 혹시 우리나라의 국론을 분열시키기 위해 북한이 공작을 하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유를 들어 신고 대상이라며 버젓히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부착을 한 것인지 저는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아직도 제가 민주주의와 인권이 유린된 유신 독재의 광기가 번뜩이는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요. 통일을 이야기하면 간첩이고 정부 정책을 '무조건' 비판하면 좌익 사범으로 신고하라는 이 표지 앞에서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 그것도 간첩?

파주 헤이리 근대사 박물관에서 만난 반공시대 유물과거의 추억이 아니다. 박물관에나 있을법한 황당한 발상이 다시 거리로 나와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진짜 간첩은 못 막는 국방부가 엄한 국민만 잡는 세상인 것이다. ⓒ 고상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오라.'

초등학교때 참 많이 불렀던 동요입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닌 유신 말기에도 학교 음악시간에 가르쳐주고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런데 역시나 국방부의 신고 기준으로 보면 선생님과 학생들이 조직사건으로 얽혀 몽땅 잡혀갈 상황입니다. 통일을 이야기하면 잡혀갈지 모른다며 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인가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 외에 달리 선택할 길이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기본권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 민주주의가 이러한 기본권을 부정하고도 민주주의 국가임을 내세울 수 있을까요. 보수 세력들은 당과 수령을 비판할 수 없는 북한은 민주주의가 없는 독재 국가라고 비난하면서 정작 국방부는 그런 북한이 부러운가 봅니다. 그들처럼 우리나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나라라고 생각하는지 정말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그제야 이해가 갔습니다. 누리길 곳곳에 지나치게 많다 싶도록 '신고 안내 표지'가 부착되어 있었는데 그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표지의 용도가 신고를 안내할 목적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습니다. 즉, 천안함 사건을 의심하고 연평도에 대해 어쩌구 하는 행위, 그리고 통일을 말하고 현 정부를 비판하는 행위를 하면 잡혀갈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경고용이 진짜 목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상식 이하의 발상과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요. 이러고도 대한민국이 정녕 '민주주의 인권 국가'라고 자신할 수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우리나라가 왜 이 지경이 되었나요. 아내와 즐겁게 걷던 누리길 위에서 끝내 분통이 터졌습니다.

한편, 그동안 국방부가 보여준 행태를 돌아보니 사실 놀랄 일도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반 유신, 반 독재 민주화 투쟁도 '종북세력'이고 합법적인 교원단체인 '전교조'에 대해서도 종북단체라며 규정했던 국방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생각이 다른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한 일이 아니라 그냥 '적'이며 이는 잡아가둬야 할 대상인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자신들이 지켜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목표를 잃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켜야할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닌 이 소중한 가치를 유린하는 반대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자신들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도 모르는 국방부가 이제는 박정희 유신 독재와 전두환 군사 독재 시대처럼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체력이 이렇게 허약한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때 저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이 후퇴하지 않겠냐며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누가 집권을 하더라도 이미 우리가 누려온 이만큼의 민주주의와 인권은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발전하는 속도가 더디거나 멈출수는 있겠지만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상황에서 아무리 그들이 뭐라해도 다시 과거 군사독재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큰 문제가 없다고 나는 본다."

반성합니다. 진심으로 반성합니다. 그리고 저는 말합니다. 잘못된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할 자유도 없는 나라는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다시 행동해야할 때임을 생각합니다.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서는 안돼

그래서 저는 제안합니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장받는 나라가 되도록 다시 뛰자고 말입니다. 장준하 선생이 유신 헌법을 개정하자는 서명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군사법정에 세운 후 무려 15년형을 때려버리는 그런 시절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아무 죄도 없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인을 필요에 의해 죽여버리는 그런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서도 안됩니다.

또한 정권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쓰지도 않은 유서를 대신 써줬다며 강기훈을 잡아간 그런 정부도 안되며, 먹고 살고자 생존권 싸움을 하던 철거민을 농성 하루만에 경찰 특공대를 투입하여 서울 한복판에서 참혹하게 죽게하는 정부 역시 우리가 선택할 정부가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저는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이런 말도 못 하는 나라라면 이제 저를 잡아가십시오.

총을 가지고 있으면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은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국방부는 자신들이 가진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더 이상 이런 황당한 신고 안내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내와 함께 도란 도란 대화를 나누며 걷던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한민국 국방부에 요구합니다. 저는 아내와 통일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가 가진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폭력적인 방법만 제외하고 누구와라도 어떤 주제이든 마음껏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국민이 가진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 누구도 제약해서는 안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처럼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제2조처럼 국민은 억압의 대상이 아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조만간 '민주주의 만세'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외쳤다는 이유로 좌익사범일지 모르니 신고하라는 또 다른 국방부의 전단을 보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웃을까요. 19세기적 발상 속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방부를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규탄'합니다. 더 이상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지만.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