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왜 팔달문을 끊었을까?
[화성 겉돌기⑩] 아직도 끊어진 화성, 마음 아파
▲ 끊어진 화성팔달문 양편인 남수문과 팔달산으로 오르는 부분이 끊어진 채로 남아있다 ⓒ 하주성
10월 11일 오후에 돌아본 화성의 미복원 구간. 남수문에서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는 남치까지 돌아봤다. 아직 미 복원인 이 구간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남수문에서 팔달문 사이 남공심돈, 남암문, 포를 쏠수 있는 적대, 팔달문을 지나서 팔달산으로 올라가는 곳에 있던 적대가 없어졌다. 총 4구간이 끊어진 것이다.
▲ 미복원 구간과 남공심돈아직 복원되지 않은 구간(좌측 붉은 선안)과 1907년에 촬영된 남공심돈 ⓒ 하주성
일제는 왜 팔달문 일대를 파괴했을까?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 중인 헤르만 산더가 1907년에 찍은 사진에는, 남수문에서 팔달문으로 가는 성곽의 돌출된 치성 위에 축조한 남공심돈이 보인다. 그리고 팔달문 양편에는 적대가 있었다. 적대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성 양편에 있었던 치성위에 축조한 구조물이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 버린 남암문도, 팔달문 동쪽 약 95미터 되는 곳에 있었다. 암문은 후미진 곳에 설치해 비상시에 적의 후미를 공격하는 병사들이 출입을 하거나, 식량 등을 나르는 비상문이었다. 암문은 성벽에다 돌로 무지개 문을 설치하였는데, 제도는 정문과 같으나 약간 작게 하였다고 한다.
남암문은 완성된 것이 을묘년인 1795년 2월 23일인데, 화성의 다섯 개의 암문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졌다. 문의 너비도 다섯 암문 중에서 가장 넓었는데, 옛 어른들의 증언에 의하면 남암문은 시신을 내보내는 '시구문(屍柩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상여가 통과할 만큼의 너비와 크기를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남안문과 남송심돈, 그리고 팔달문 양편의 적대가 사라진 것이다.
▲ 여장팔달산으로 오르는 성벽에는 여장의 틈이 없다 ⓒ 하주성
언제인가 화성을 탐방하다가 팔달문 인근에 오래 사셨다는 어르신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팔달문 양편의 성곽 일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동문으로 광교산의 지기가 흘러들어, 성곽을 타고 팔달문을 거쳐 팔달산으로 지기가 오르면 수원에서 큰 인물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국 명산에 쇠말뚝을 박은 것처럼 팔달문 양편의 성곽을 허물어, 수원에 큰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한 소리이긴 하지만, 유독 이 곳만 성벽을 허물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끊어진 성곽, 마음이 아파
화성은 이 구간만 빼고는 거의 복원을 마쳤다. 올해 남수문을 복원하면서 서남각루 아래서 끊어졌던 성곽이 남수문을 지나 연결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팔달문은 양편 성곽을 잃어버려, 팔달문만 덩그마니 외롭게 서 있는 것처럼 쓸쓸해 보인다. 서편으로도 잘라진 성벽이 미처 이어지지 못한 채 팔달산으로 오르는 성벽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10월 11일 오후에 돌아본 공사중인 팔달문은 마치 양팔이 잘려나간 듯한 모습이다. 사라진 남공심돈, 남암문, 팔달문 양편의 적대. 그 모든 것이 언제나 제대로 연결이 되어, 완전한 화성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인지. 돌아보면서도 내내 마음이 아프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아직 치유되지 못한 아픔이다.
▲ 남치팔달문에서 팔달산으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화성의 구조물인 남치 ⓒ 하주성
팔달문은 지금 한창 보수 공사 중이다. 팔달문을 바라보고 길을 건넌다. 그리고 팔달산 쪽으로 다가선다. 그곳에서 미처 연결을 하지 못한 성곽이 잔뜩 움츠리고 있다. 언제나 저 팔달문과 맞닿을 수 있으려는지. 성벽을 따라 천천히 팔달산을 오른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남치를 지나 팔달산으로 솟구쳐 오르는 성벽을 바라본다.
언젠가 미복원구간이 완성이 되면, 광교산의 지기가 성벽을 타고 다시 팔달산으로 모여들 수 있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수원에 큰 인물이 난다고 하니, 그때까지 아픈 가슴을 쓸어가며 화성을 보아야 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e 수원뉴스와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