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먹고 살기 힘든데 웬 동물타령인가?
인권운동의 시야를 동물권으로 까지 넓혀야 한다
대학교 시절에 '또롱이'라는 한 유기견을 애지중지 키운 적이 있다. 그러나 해외 유학 때문에 나는 또롱이와 이별을 해야 했다. 유학 시절 내내 또롱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논문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또롱이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지도 교수의 허락을 얻어 한국에 돌아왔으나 또롱이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몇 달 후에 나는 박사 논문을 완성했고 감사의 글에 "나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고 있는 또롱이를 위해"라고 썼다.
논문 발표가 있던 날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들이 그 감사의 글을 읽고는 또롱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키우던 강아지인데 지금은 천국에 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후 논문의 내용과는 별개로 심사위원들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 내용은 과연 동물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몇몇 심사위원들은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동물에게 '천국의 자리'는 없다는 것이었다.
천국에 갈 수 없는 동물
동물이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은 사건에서 나는 매우 중요한 생각거리를 발견했다. "왜 동물은 천국에서 배제되었는가?" 사실 이러한 생각은 서양 사상 속에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재로 동물보다 더 높은 영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이후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도 동물이 인간보다 열등한 것이라는 사고는 지속되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자극에 반응하기만 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생각했으며 심지어는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동물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깨지게 된 데에는 다윈의 이론이 크게 기여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다윈은 인간이 동물과 많은 면에서 동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진화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19세기 말 이후 인간 역시 동물이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동물도 인간처럼 의식을 가진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사실 동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동물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를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의식적으로 거부해왔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동물이 자신들보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동물들에게 터무니없는 폭력을 행사해온 것이다. 지나친 인간 중심의 사고는 동물을 먹거나 실험 대상으로 삼는 행위들을 정당화한다. 나를 위해 죽는 존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미안함을 인간 중심의 사고로서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타자-약자에 대한 폭력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에 폭력을 가하는 이러한 인간 중심의 사고는 동물뿐 아니라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 대항해의 시대(사실은 대학살의 시대가 더 정확하다)에 이스파뇰라섬에 도착했던 에스파냐인들의 행태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칼로 찌르거나 팔다리를 자른 정도에 그치지 않고 마치 도살장에서 양을 잡는 것처럼 갈가리 찢었다. 그들은 한 칼에 사람을 벨 수 있는가, 머리를 단번에 잘라낼 수 있는가, 혹은 칼이나 창을 한번 휘둘러서 내장을 쏟아낼 수 있는가에 대해 서로 내기를 걸었다. 어머니의 품안에 있는 아이를 낚아채 바위에 집어던져 머리를 부딪치게 하든가 강물에 집어던지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악마의 자식들아, 그곳에서 펄펄 끓어라."
이러한 태도의 바탕에는 원주민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원주민들이 자신들보다 지적으로 열등하며, 신체적으로도 다르다는 판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사람들은 에스파냐인들이 행했던 잔혹함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사고가 바로 여기에서 멈추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 중심의 사고가 가진 큰 한계인 것이다. 다시 동물로 돌아가 보자. 이처럼 잔인한 대우를 받는 동물들이 우리 주위에 혹시 있지는 않은가?
쥐들이 수면 부족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33일간 잠을 재우지 않고, 태어난 지 10일된 고양이의 눈을 꿰매 뜨지 못하게 한 후 시력 상실이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는 실험을 하는 것이 바로 현재의 우리 인간이다. 놀이 삼아 햄스터를 믹서에 갈고, 공장형 사육 시설을 가동하면서 닭의 부리를 자르고, 샥스핀과 푸아그라 같은 요리를 위해 동물에 위해를 가하는 것도 바로 우리 인간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에스파냐인들의 만행에 치를 떤다면 마찬가지로 인간 중심의,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인간을 위해 자행되는 이러한 폭력에 더 이상 눈감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동물권 주장에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는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사람도 먹고 살기 힘든데 웬 동물 타령이냐"라는 것이 있다. 사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 속에서 내 안에 숨어 있는 어떤 폭력성을 느낀다. 혹시 약자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죽이고 강자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이 말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이성, 지능, 외모 중심의 어떤 기준을 정해 놓고 이에 도달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배제시키고 그러한 폭력을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몇 년 전에 모란 시장에 가본 적이 있다. 많은 개고기가 팔리고 있었다. 손님이 어떤 개를 지목하면 주인은 바로 뒤뜰로 가서 죽인 후에 고기를 가져왔다(죽는 소리가 들려서 사실 무척 섬뜩했다). 그런데 나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이 있었다. 그 개고기 정육점 주인이 상점 구석에서 한 애완견을 정성스럽게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인에게 나는 너무 궁금해서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이 애완견과 저 식용개는 다른 것인가요?" 주인은 짧게 대답했다. "아주 다르지요." 나는 그 차이의 기준을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떤 자의적인 기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의적 기준은 아마도 현재 우리의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나를 채식주의자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현재 모든 고기를 먹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동물에 대한 가혹한 행위가 사회의 약자에 대한 가혹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지나친 인간 중심의 사고가 매우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권 운동을 오직 인간의 권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큰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한 나라의 위대함과 그 도덕적 진보는 동물에 대한 처우를 통해 판단" 가능한 것이다. 이와 함께 인디언들이 사냥하기 전 "너를 죽여야만 하는 나를 용서해달라"라는 기도를 올리는 그 생명 존중의 태도 역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버릴 필요가 있다.
미국의 작가 앨리스 워커의 말로 끝을 맺는다.
"이 세상의 동물은 각자의 존재 이유가 있다. 흑인이 백인을 위해, 여성이 남성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듯,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논문 발표가 있던 날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들이 그 감사의 글을 읽고는 또롱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키우던 강아지인데 지금은 천국에 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후 논문의 내용과는 별개로 심사위원들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 내용은 과연 동물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몇몇 심사위원들은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동물에게 '천국의 자리'는 없다는 것이었다.
천국에 갈 수 없는 동물
동물이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은 사건에서 나는 매우 중요한 생각거리를 발견했다. "왜 동물은 천국에서 배제되었는가?" 사실 이러한 생각은 서양 사상 속에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재로 동물보다 더 높은 영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이후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도 동물이 인간보다 열등한 것이라는 사고는 지속되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자극에 반응하기만 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생각했으며 심지어는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동물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깨지게 된 데에는 다윈의 이론이 크게 기여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다윈은 인간이 동물과 많은 면에서 동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진화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19세기 말 이후 인간 역시 동물이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동물도 인간처럼 의식을 가진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사실 동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동물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를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의식적으로 거부해왔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동물이 자신들보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동물들에게 터무니없는 폭력을 행사해온 것이다. 지나친 인간 중심의 사고는 동물을 먹거나 실험 대상으로 삼는 행위들을 정당화한다. 나를 위해 죽는 존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미안함을 인간 중심의 사고로서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 유기견을 입양해서 키운 개 '순덕이' ⓒ 대전충남인권연대
인간의 타자-약자에 대한 폭력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에 폭력을 가하는 이러한 인간 중심의 사고는 동물뿐 아니라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 대항해의 시대(사실은 대학살의 시대가 더 정확하다)에 이스파뇰라섬에 도착했던 에스파냐인들의 행태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칼로 찌르거나 팔다리를 자른 정도에 그치지 않고 마치 도살장에서 양을 잡는 것처럼 갈가리 찢었다. 그들은 한 칼에 사람을 벨 수 있는가, 머리를 단번에 잘라낼 수 있는가, 혹은 칼이나 창을 한번 휘둘러서 내장을 쏟아낼 수 있는가에 대해 서로 내기를 걸었다. 어머니의 품안에 있는 아이를 낚아채 바위에 집어던져 머리를 부딪치게 하든가 강물에 집어던지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악마의 자식들아, 그곳에서 펄펄 끓어라."
이러한 태도의 바탕에는 원주민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원주민들이 자신들보다 지적으로 열등하며, 신체적으로도 다르다는 판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사람들은 에스파냐인들이 행했던 잔혹함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사고가 바로 여기에서 멈추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 중심의 사고가 가진 큰 한계인 것이다. 다시 동물로 돌아가 보자. 이처럼 잔인한 대우를 받는 동물들이 우리 주위에 혹시 있지는 않은가?
쥐들이 수면 부족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33일간 잠을 재우지 않고, 태어난 지 10일된 고양이의 눈을 꿰매 뜨지 못하게 한 후 시력 상실이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는 실험을 하는 것이 바로 현재의 우리 인간이다. 놀이 삼아 햄스터를 믹서에 갈고, 공장형 사육 시설을 가동하면서 닭의 부리를 자르고, 샥스핀과 푸아그라 같은 요리를 위해 동물에 위해를 가하는 것도 바로 우리 인간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에스파냐인들의 만행에 치를 떤다면 마찬가지로 인간 중심의,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인간을 위해 자행되는 이러한 폭력에 더 이상 눈감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동물권 주장에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는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사람도 먹고 살기 힘든데 웬 동물 타령이냐"라는 것이 있다. 사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 속에서 내 안에 숨어 있는 어떤 폭력성을 느낀다. 혹시 약자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죽이고 강자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이 말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이성, 지능, 외모 중심의 어떤 기준을 정해 놓고 이에 도달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배제시키고 그러한 폭력을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몇 년 전에 모란 시장에 가본 적이 있다. 많은 개고기가 팔리고 있었다. 손님이 어떤 개를 지목하면 주인은 바로 뒤뜰로 가서 죽인 후에 고기를 가져왔다(죽는 소리가 들려서 사실 무척 섬뜩했다). 그런데 나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이 있었다. 그 개고기 정육점 주인이 상점 구석에서 한 애완견을 정성스럽게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인에게 나는 너무 궁금해서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이 애완견과 저 식용개는 다른 것인가요?" 주인은 짧게 대답했다. "아주 다르지요." 나는 그 차이의 기준을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떤 자의적인 기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의적 기준은 아마도 현재 우리의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나를 채식주의자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현재 모든 고기를 먹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동물에 대한 가혹한 행위가 사회의 약자에 대한 가혹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지나친 인간 중심의 사고가 매우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권 운동을 오직 인간의 권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큰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한 나라의 위대함과 그 도덕적 진보는 동물에 대한 처우를 통해 판단" 가능한 것이다. 이와 함께 인디언들이 사냥하기 전 "너를 죽여야만 하는 나를 용서해달라"라는 기도를 올리는 그 생명 존중의 태도 역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버릴 필요가 있다.
미국의 작가 앨리스 워커의 말로 끝을 맺는다.
"이 세상의 동물은 각자의 존재 이유가 있다. 흑인이 백인을 위해, 여성이 남성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듯,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