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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선물한 '굴욕'... 그리고 박정희의 결심

'유신 40년' 박정희는 왜 쿠데타를 일으켰나③

등록|2012.10.17 10:52 수정|2012.10.17 10:52
197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박정희 정권은 '정권 차원'의 위기에 직면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직면한 때는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박정권은 1965년 굴욕적 한일협정 당시 강력한 국민적 반대와 저항에 부딪힌 바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초의 위기는 어떤 특정 사안에 의해서가 아닌, 박 정권에 대한 총체적이고 광범위한 사회적 반발 기류가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1970년대 초는 1960년대 박 정권의 경제개발 방식이 내포하고 있던 문제점이 하나씩 곪아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이무렵 산업화와 함께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됐고 농촌의 인구는 꾸역꾸역 도시로, 서울로 몰려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울의 인구는 포화상태였고 이는 주거문제, 교통문제 따위 심각한 도시문제를 양산했다.

여기에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결과로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겹쳐지면서 도시 빈민층이 늘어났고, 특히 농촌에서 유입된 도시인구는 대개 달동네 빈민층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고달픈 삶과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정권에 대한 불만이 강했다. 이는 뒤에 이른바 '여촌야도'의 선거 결과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박 정권으로선 지지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조짐이었고, 특히 농촌인구의 도시유입이 지속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정권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시는 주택난 해결을 위해 시민아파트 건설에 나섰으나 무리한 속도전의 결과 1970년 5월 와우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다. 1972년 9월 12일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수도 서울의 인구분산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서울의 인구가 600만 선을 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한 바 있는데 이러한 정책 기조 속에서 추진된 도시 빈민 외곽 이주 정책은 격렬하고도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71년 8월의 광주 대단지 폭동 사건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전략은 기본적으로 불균등 발전 전략이었다. 그것은 사회를 도시와 농촌,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영남과 호남, 재벌과 하층민 등 이분법적 대상으로 나눈 다음, 한 쪽에 특혜를 몰아주어 국가적 차원에서 성장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성장의 결실이 사회계층 일부에 집중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런 속에서 성장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불만과 박탈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동안 경제성장 과정에서 혜택은커녕, 오히려 희생만을 요구받아온 노동계층의 불만이 극에 이르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13일에 일어난 전태일 분신사건은 한국 현대 노동운동의 서막이었다. 그의 요구는 일요일에는 쉬게 해달라는 것, 근로기준법을 준수해달라는 것 등 매우 소박한 것이었지만, 그동안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받던 노동계층의 의식을 크게 일깨웠다. 국가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했지만, 이제 그 개인은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 자신을 자각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다시 말해 불균등한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결과, 사회는 급격하게 분화되어 각기 다양한 목소리와 불만이 표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 민주화 요구도 급증했다. 1971년에 일어난 주요 사건만 나열해보더라도 이점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1971년 4월부터학원가를 중심으로 교련철폐 투쟁이 지속되었고, 6월에는 국립의료원 및 국립대학교 부속병원 수련의들이 처우개선과 신분보장을 요구하는 파업에 돌입했다.

7월에는 정권의 사법부 독립성 훼손에 항의해 사법파동이 일어났고 8월에는 광주 대단지 사건과 함께 대학교수들의 대학 자주화 선언이 나왔다. 9월에는 베트남에 파견됐던 한진상사 노동자들이 밀린 임금 지불을 요구하며 KAR빌딩을 습격, 방화한 사건이 일어났고 10월에는 교련반대투쟁을 지속해오던 대학생들이 부정부패 규탄시위를 벌이면서 군인들과 정면으로 충돌한 결과 10월 15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1971년에는 거의 한 달 간격으로 큰 사건들이 연이어졌던 셈인데, 학생, 노동자, 교수, 의사, 판사 등 광범하고도 다양한 계층이 그 주체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했다. 또 1971년 한 해에만 노사분규 발생건수가 1656건이었는데, 이는 그 전해의 10배에 육박하는 수치였다.

결국 1971년 12월 박정희가 국가보위법을 날치기 통과시키면서 "집회 및 시위의 규제, 국론을 분열시킬 수 있는 문제에 관한 언론 및 출판의 규제,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의 규제 등을 할 수 있는 비상대권"을 틀어쥔 것은 역으로 대중들의 집회와 시위, 근로자의 단체 행동 등이 빈번해질 조짐이 만연해있었음을 의미했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파시즘적 군국주의를 내면화하여 이상으로 삼고 있던 박정희로선 감내하기 어려운 사태전개였다.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위기

뿐만 아니라 그동안 박정희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성장을 거듭해온 기업들 역시 이 시기에 이르러 휘청거리고 있었다. 차관을 들여와 키운 수출기업들이 한계를 보이면서 부실기업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1969년 정부발표에 따르면 차관업체 89개 중 45퍼센트가 부실기업이었고, 이런 속에서 외채에 대한 원리금 상환 압박이 가중되어 경제적 위기국면이 조성됐다.

기업에게 온갖 특혜를 주는 식의 불균등 발전전략을 채택해 경제성장을 추구해온 박정권으로선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박정희는 1972년 이른바 8·3조치를 전격적으로 단행했는데, 기업의 부채를 3년간 상환 유예하고 정부가 조달한 2000억 원으로 기업의 단기은행부채 30퍼센트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기업의 금융 부담을 중간층과 서민층에게 전가하는 폭력적 조치"로서 일반 대중의 정권 이반을 초래할 수 있는 있었다.

이와 같은 박 정권이 직면한 사회경제적 위기는 '선거'라는 정치적, 민주적 형식을 통해 표출되었다. 1971년 4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일대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분열되고 무기력한 야당의 모습이 아닌, 3선 개헌까지 해가며 출마한 박정희를 크게 위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4대국 안전보장, 남북교류론, 양극화 해소 등의 획기적인 공약을 내건 김대중을 향한 지지는 뜨거웠다. 4월 18일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유세장에는 백만 인파가 몰렸다. 여기에는 박 정권에 대한 불만이 많던 서민층의 지지가 큰 역할을 했는데, 이들에게는 변화를 향한 열망이 깔려 있었다. 이틀 전 같은 장소에서 열린 박정희의 유세장에도 많은 인파가 모였지만 이들은 대개 동원된 인파였다.

위기를 느낀 박정희로선 새로운 선거 전략이 필요했다. 그래서 늘 영구집권을 향한 욕망이 강렬했던 박정희는, 4월 25일 서울 유세장에서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 여러분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 하는 정치연설은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라는, 전혀 내키지 않는 말을 해야 했고, 또 권력 내 2인자, 후계자를 용납하지 않던 박정희는 역시 선거 막판에 "나에게 마지막이 될 이번 선거에서 다시 한 번 신임해준다면 유능한 후계인물을 육성하겠다"라는, 마음속에 없는 말을 해야 했다.

그로선 참기 힘든 굴욕이었다. 오죽하면 이 무렵 박정희가 측근들에게 "이제 그따위 놈의 선거는 없어"라고 말했을까.

비록 선거 결과는 94만여 표 차이로 박정희의 신승으로 끝났지만 당선을 위해 국가예산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600~700억 원을 퍼붓고, 관권을 동원하고, 영호남을 분열시켜가며, 그리고 마음에는 전혀 없는 말을 해가며 얻은 결과치고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더 중요한 것은 대선 이후 5월에 치러진 총선이었다. 총선 결과 공화당 131석, 신민당 89석을 얻어 야당이 개헌 저지석보다 20석이 더 많아 박정희의 재집권 야욕에 빨간불이 켜졌다. 특히 야당은 서울의 19개 선거구에서 18석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고 전반적으로 대선에서처럼 여촌야도 현상이 나타났다. 그동안 박정희 정권이 농촌보다 상대적으로 공을 들여온 도시에서 오히려 박 정권을 배반하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또 이 선거에서 공화당은 전국적으로 47.8%를, 신민당은 43.5%를 득표해 박정권에 대한 지지기반이 상당히 균열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은 이러한 선거 결과에 대해 "1975년에는 대통령을 바꾸겠다는 한국 대중의 의지가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 평가처럼 이제 박정희가 합법적으로 개헌을 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 탓일까. 총선 이후 권력 내부에서도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바로 1971년 10·2항명파동 사건이다. 이른바 공화당 내 4인체제가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 통과 과정에서 대통령 지시를 어기고 항명을 한 사건이다. 이에 박정희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체포해 고문했다. 이로써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 의지를 명확히 했고, 권력 내의 그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으며 1인 체제 혹은 친정체제를 확립해갔다. 그리고 이는 유신체제로 가는 도정이었다.

이상과 같은 1970년대 초반의 정치적 위기 국면 앞에서 박정희가 선택한 진로는 그에게 내면화되어 있던 일본의 군국주의적 파시즘과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의 시선에서 볼 때 다원화된 사회를 반영하는 정치적 기재인 민주주의체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1971년 들어 급증한 민주화 요구는 이러한 그의 의식을 폭발시켰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971년 무렵 박 정권이 직면한 위기가 유신체제라는 극단적 파시즘체제로 개편해야 할 정도의 커다란 위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의 유신체제 수립은 당시의 객관적 조건보다도 그의 주관적 의지가 더욱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즉, 박정희는 1960년대 경제개발을 거치며 다원화되고 분화된 사회를 향해 전체주의적 능률주의를 외치며 완벽한 1인 독재와 영구집권이 보장되는 체제를 수립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다원화된 사회가 아닌 파시즘적 사회로의 획일적 개편을 통해 1인 독재체제와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것이 유신체제의 궁극적 목표이자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일으킨 이유였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박태균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창비, 2006
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역사비평사, 2007
이준식 <박정희의 식민지 체험과 박정희시대의 기원> <역사비평> 2009 겨울호
김연철 <7·4남북공동성명의 재해석> <역사비평> 2012 여름호
윤성환 <50년 전 함석헌의 예언, 무섭게도 정확하다> <오마이뉴스> 2012년 7월 25일자
한홍구 <유신과 오늘② 유신전야> <한겨레> 2012년 2월 11일자
한홍구 <유신과 오늘③ 공작명 풍년사업> <한겨레> 2012년 2월 25일자
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창비, 2012
황병주 <유신의 파산, 유신의 유산> <내일을 여는 역사> 2012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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