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성욕의 상징 담배와 흑인노예를 위로한 럼주
[역사와 함께 하는 쿠바 자전거 기행 6] 쿠바의 상징과 헤밍웨이
쿠바를 상징하는 것은 다양하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위대한 혁명가 체 게바라와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아닐까? 그다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수상 처칠이나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초래한 당시 미국 대통령 케네디가 애용했다는 담뱃잎을 굵게 만 시가와 끝없이 펼쳐진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 그리고 참혹한 환경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흑인 노예의 마음을 달래준 사탕수수로 만든 럼주를 꼽을 수 있다.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새로운 자동차가 수입되지 못하고 출고된 지 매우 오래된 차들이 매연을 마구 품어대지만 그래도 잘 굴러가는 구형 자동차, 일명 올드 카는 빔 벤더스(Wim Wenders)의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에 잘 그려져 있다. 미국 작가이지만 쿠바에서 오랫동안 지내고 쿠바인으로 불리기를 원했던 헤밍웨이 그리고 쿠바만의 독특한 음악 등 참으로 다양하다.
쿠바보다 훨씬 잘사는 우리나라의 상징이 무엇인지 외국인에게 물어보면 어떠한 대답을 할까? 세계의 유일무이한 분단국이라는 사실이 유일한 상징이 아닐까? 그 외 더 있다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3대 세습의 북한과 군사적·정치적 긴장관계에 있다는 것이 그 다음을 이을 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한글은 그들이 잘 알 리 없을 것이고, 최근 한류 바람으로 그나마 대한민국의 존재가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잘 살지만 문화가 빈약한 사회와 비록 경제적으로는 빈곤하지만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사회가 있다면 나는 단연코 후자를 택하리라.
아메리카 원주민의 저주 담배
담배연기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발암 물질로 인해 전 세계 인구의 10%의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가스며, 담배의 니코틴은 대마초의 마약 성분보다 중독성이 강해 마약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 사실 때문에 거의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는 담뱃갑에 흡연을 경고하는 문구를 넣고, 경우에 따라서는 흡연을 강력하게 경고하는 무시무시한 사진을 담뱃갑에 첨가하도록 하고 있다. 담배에 관대한 우리나라도 곧 그러한 경고 사진을 담뱃갑에 붙이도록 결정했다. 하지만 완전하게 담배를 금지하는 나라는 없다. 그래서 담배는 인류를 합법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상품이라 일컫는다. 담배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백인에게 내린 저주가 아닐까? 이러한 담배를 16세기 유럽에서는 만병통치약으로 또는 기적의 치료제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백인들은 1492년 11월 쿠바 내륙을 탐험하면서 원주민인 타이노족이 담배 피우는 것을 처음으로 봤다. 원주민들은 담배 피우는 것을 성스러운 종교의식으로 생각했으며 담배연기를 평화와 우정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코와 입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대었으며 주로 사용한 긴 담뱃대를 '평화의 파이프'라 불렀다.
쿠바의 유명한 담배 상표 중 '코이바'라고 있는 데, 이 상표 이름은 카리브 해 지역에 살던 아라와크족이 담배 피우는 의식을 '코이바'라고 부른데서 기인했다고 한다. 타이노족은 담배를 새로운 생명을 창출하는 다산과 성욕의 상징으로 여겼다.
처음에는 원주민들의 담배 피우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백인들이 후에 점차 그들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이 담배를 유럽과 중국으로 전하여 16세기에는 담배가 유럽과 아시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담배 피우는 행위를 이교도의 행위라 보고 가톨릭 국가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는 철저하게 담배를 금지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오히려 담배의 특유한 환각작용으로 고통이 줄어들자 담뱃잎은 귀한 약재가 되어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쿠바는 스페인에 담배를 공급하는 원료 공급지로 전락됐다.
고독한 혁명의 동반자 시가
담배를 경작하는 밭이 주로 아바나 교외에 있어 처음엔 시가를 '아바나의 담배'란 뜻의 엘 아바노(El Habano)라 불렀다고 한다. 스페인 왕실이 담배 산업을 독점하자 궁핍해진 담배 소작농들이 1717년 이후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스페인 국왕은 자유롭게 담배를 판매하도록 허가하였다. 1762년 영국이 1년여 동안 쿠바를 점령하자 담배에 대한 스페인 왕실 독점은 사실상 끝이 나면서 쿠바는 여러 나라에 담배를 수출했고 유럽 각국의 자본가들은 아바나에 담배공장을 세우면서 담배의 부가가치는 점점 높아졌다.
1840년에 시가 필터 부분에 띠를 두르면서 담배는 고급화 되었다. 담배 띠는 러시아 여제 예카트리나의 손가락이 담배연기에 찌들지 않도록 띠를 둘렀던 것이 담배 띠의 시작이라고 알려졌다. 이러한 담배에 두른 띠는 시가의 대표적인 상표가 되었고 가장 효과적이고 완벽한 장식물이 되었다. 역사적인 의미에 창작성과 예술성까지 갖춘 독특한 담배 띠와 상표 덕분에 시가는 오늘날까지 마니아들의 주요 수집품이 되었다.
담배는 쿠바의 독립혁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1895년 2월 스페인 식민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제 행동개시에 관련한 암호를 담배에 끼워 전달했기 때문이다. 늘 시가를 입에 물고 다닌 체 게바라는 "시가는 고독한 혁명의 길에 가장 훌륭한 동반자"라고 칭송하였을 정도로 시가는 혁명군들의 상징이 되었다.
담배를 전혀 피지 않는 필자는 작은 시가(Romeo y Julieta Mini) 한 통을 샀다. 여기에는 50개의 아주 작은 시가가 들어있었다. 크기는 꼭 가느다란 국산 담배만 했다. 작은 선물로 이만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쿠바를 다녀온 기념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권했다.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맛이나 보라며 주었다.
흑인 노예의 피와 땀인 사탕수수
쿠바의 지형은 동쪽과 서쪽 끝에 산맥이 있고 그 중간은 거의 평야이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아바나로 가는 도로의 양쪽에는 끝없이 펼쳐진 사탕수수 농장이 대부분이었다. 사탕수수는 처음부터 쿠바에서 생산된 것은 아니었다. 1493년 콜럼버스가 2차 항해에 나설 때 사탕수수 전문가를 데리고 와 에스파뇰라 섬에 사탕수수를 재배한 것이 그 시초이다. 사탕수수는 왕성하게 자라면서 여러 지역으로 번졌다.
사탕수수 재배에 쿠바는 여러 가지로 안성맞춤이었다. 1547년 스페인은 쿠바에서 본격적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사탕수수 농장주는 농장 안에 설탕공장을 세워 설탕을 생산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에서는 쿠바에서 사탕수수와 설탕을 수입해 럼주를 만들고 이를 아프리카로 수출했고 쿠바는 수출한 돈으로 흑인노예를 수입하였다. 영국이 쿠바의 사탕수수 수입을 제한하자 밀수가 성행했다. 영국이 수입관세를 강제 징수하기 시작하자 세금 부담이 가중된 북아메리카 13개 주에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니 쿠바의 사탕수수는 미국의 독립을 촉진시킨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이티가 최초로 식민지에서 독립하여 흑인공화국을 세우자 설탕제조업자들은 쿠바에 투자하기 시작하여 쿠바에서는 설탕산업이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1810년 스페인 식민지들이 잇달아 독립운동을 일으켰으나 설탕업자인 쿠바에서 태어난 크리오요 백인들은 아이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설탕업자인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스페인 제국에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쿠바의 독립은 지연됐다.
1867년 쿠바는 전 세계 사탕수수 생산량의 1/3을 차지하였고 주요 수출국은 미국이었다. 스페인이 쿠바에서 수출하는 설탕에 부과하는 세금을 올리자 크리오요는 1868년 처음으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1959년 쿠바혁명이 성공하고 1960년 쿠바 정부는 미국의 뜻과는 반대로 모든 기업을 국유화 한다. 그러자 미국은 쿠바의 설탕 수입을 금지했다. 결국 설탕은 소련으로 수출되었고 그 대가로 쿠바는 석유를 얻었다. 1990년 소련이 붕괴되자 쿠바는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설탕 생산량이 급감하고 위기상황에 처하게 된다.
흑인노예의 마음을 달래준 럼주
럼주의 원료는 사탕수수이다. 럼주는 설탕을 제련하고 남은 당밀을 발효시킨 주정으로 만든다. 럼주는 달콤한 향기를 낸다. 이 달콤한 냄새를 음미하면서 고통스럽고 비참한 생활을 한 흑인 노예를 돌이켜 본다. 럼주는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한다. 흑인 노예들은 럼주를 마시면서 고단한 삶을 이겨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흑인 노예들에게 럼주는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흑인 노예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한 사탕수수를 경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흑인 노예들은 이러한 사탕수수로 만들어진 럼주로 그들의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해적들이 즐겨 마셨던 독한 럼주는 선원이나 노예들이 마시는 하층민의 술이었다. 그러나 증류법이 개발되면서 쿠바를 대표하는 술이 되었다. 럼주는 빚은 지 1년 반이 지나면 맑고 투명해져 실버 또는 화이트 라벨, 3년 지나면 옐로, 5년이 지나면 골드, 7년 이상은 블랙 라벨로 부른다. 화이트와 옐로 라벨은 칵테일 용으로, 골드와 블랙은 스트레이트로 마신다. 헤밍웨이는 모히토를 즐겼다고 하는 데 이것은 럼주의 칵테일이다. 모히토는 럼주에 설탕과 레몬즙 그리고 소다수와 박하 잎을 넣어 만든다. 럼주의 대표 상표는 '아바나클럽'이다. 아바나클럽의 상표 디자인에는 한 여인이 있다. 그는 이사벨로 당시 쿠바 총독 소토의 부인이었다. 남편이 플로리다에 원정을 나섰다가 죽자 부인 이사벨도 곧 죽었다. 한 건축가가 이사벨의 동상을 만들어 아바나의 상징이 되었고 아울러 아바나클럽의 대표 상표가 됐다.
쿠바를 여행하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신 것은 맥주였다. 왜냐하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너무도 목이 마르기 때문이다. 럼주는 가끔씩 저녁 식사와 함께 즐겼다. 쿠바를 상징하는 럼주에 미국을 상징하는 콜라를 섞으면 기막힌 칵테일이 된다. 이 칵테일의 이름은? 쿠바 리브레(Cuba Libre)이다. 쿠바의 자유라는 뜻이다. 누가 이름 지었을까? 당연히 미국인들이다.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해야 마음 놓고 쿠바를 주무를 수 있으니까. '비바 쿠바 리브레!' 럼주의 최고급이라는 7년산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지만 쿠바 사람들이 다니는 일반 식당에서는 구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쿠바 사람들이 사 먹기에는 다소 비싸니까.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새로운 자동차가 수입되지 못하고 출고된 지 매우 오래된 차들이 매연을 마구 품어대지만 그래도 잘 굴러가는 구형 자동차, 일명 올드 카는 빔 벤더스(Wim Wenders)의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에 잘 그려져 있다. 미국 작가이지만 쿠바에서 오랫동안 지내고 쿠바인으로 불리기를 원했던 헤밍웨이 그리고 쿠바만의 독특한 음악 등 참으로 다양하다.
쿠바보다 훨씬 잘사는 우리나라의 상징이 무엇인지 외국인에게 물어보면 어떠한 대답을 할까? 세계의 유일무이한 분단국이라는 사실이 유일한 상징이 아닐까? 그 외 더 있다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3대 세습의 북한과 군사적·정치적 긴장관계에 있다는 것이 그 다음을 이을 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한글은 그들이 잘 알 리 없을 것이고, 최근 한류 바람으로 그나마 대한민국의 존재가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잘 살지만 문화가 빈약한 사회와 비록 경제적으로는 빈곤하지만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사회가 있다면 나는 단연코 후자를 택하리라.
아메리카 원주민의 저주 담배
담배연기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발암 물질로 인해 전 세계 인구의 10%의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가스며, 담배의 니코틴은 대마초의 마약 성분보다 중독성이 강해 마약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 사실 때문에 거의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는 담뱃갑에 흡연을 경고하는 문구를 넣고, 경우에 따라서는 흡연을 강력하게 경고하는 무시무시한 사진을 담뱃갑에 첨가하도록 하고 있다. 담배에 관대한 우리나라도 곧 그러한 경고 사진을 담뱃갑에 붙이도록 결정했다. 하지만 완전하게 담배를 금지하는 나라는 없다. 그래서 담배는 인류를 합법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상품이라 일컫는다. 담배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백인에게 내린 저주가 아닐까? 이러한 담배를 16세기 유럽에서는 만병통치약으로 또는 기적의 치료제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백인들은 1492년 11월 쿠바 내륙을 탐험하면서 원주민인 타이노족이 담배 피우는 것을 처음으로 봤다. 원주민들은 담배 피우는 것을 성스러운 종교의식으로 생각했으며 담배연기를 평화와 우정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코와 입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대었으며 주로 사용한 긴 담뱃대를 '평화의 파이프'라 불렀다.
쿠바의 유명한 담배 상표 중 '코이바'라고 있는 데, 이 상표 이름은 카리브 해 지역에 살던 아라와크족이 담배 피우는 의식을 '코이바'라고 부른데서 기인했다고 한다. 타이노족은 담배를 새로운 생명을 창출하는 다산과 성욕의 상징으로 여겼다.
처음에는 원주민들의 담배 피우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백인들이 후에 점차 그들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이 담배를 유럽과 중국으로 전하여 16세기에는 담배가 유럽과 아시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담배 피우는 행위를 이교도의 행위라 보고 가톨릭 국가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는 철저하게 담배를 금지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오히려 담배의 특유한 환각작용으로 고통이 줄어들자 담뱃잎은 귀한 약재가 되어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쿠바는 스페인에 담배를 공급하는 원료 공급지로 전락됐다.
고독한 혁명의 동반자 시가
담배를 경작하는 밭이 주로 아바나 교외에 있어 처음엔 시가를 '아바나의 담배'란 뜻의 엘 아바노(El Habano)라 불렀다고 한다. 스페인 왕실이 담배 산업을 독점하자 궁핍해진 담배 소작농들이 1717년 이후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스페인 국왕은 자유롭게 담배를 판매하도록 허가하였다. 1762년 영국이 1년여 동안 쿠바를 점령하자 담배에 대한 스페인 왕실 독점은 사실상 끝이 나면서 쿠바는 여러 나라에 담배를 수출했고 유럽 각국의 자본가들은 아바나에 담배공장을 세우면서 담배의 부가가치는 점점 높아졌다.
1840년에 시가 필터 부분에 띠를 두르면서 담배는 고급화 되었다. 담배 띠는 러시아 여제 예카트리나의 손가락이 담배연기에 찌들지 않도록 띠를 둘렀던 것이 담배 띠의 시작이라고 알려졌다. 이러한 담배에 두른 띠는 시가의 대표적인 상표가 되었고 가장 효과적이고 완벽한 장식물이 되었다. 역사적인 의미에 창작성과 예술성까지 갖춘 독특한 담배 띠와 상표 덕분에 시가는 오늘날까지 마니아들의 주요 수집품이 되었다.
담배는 쿠바의 독립혁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1895년 2월 스페인 식민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제 행동개시에 관련한 암호를 담배에 끼워 전달했기 때문이다. 늘 시가를 입에 물고 다닌 체 게바라는 "시가는 고독한 혁명의 길에 가장 훌륭한 동반자"라고 칭송하였을 정도로 시가는 혁명군들의 상징이 되었다.
담배를 전혀 피지 않는 필자는 작은 시가(Romeo y Julieta Mini) 한 통을 샀다. 여기에는 50개의 아주 작은 시가가 들어있었다. 크기는 꼭 가느다란 국산 담배만 했다. 작은 선물로 이만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쿠바를 다녀온 기념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권했다.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맛이나 보라며 주었다.
흑인 노예의 피와 땀인 사탕수수
쿠바의 지형은 동쪽과 서쪽 끝에 산맥이 있고 그 중간은 거의 평야이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아바나로 가는 도로의 양쪽에는 끝없이 펼쳐진 사탕수수 농장이 대부분이었다. 사탕수수는 처음부터 쿠바에서 생산된 것은 아니었다. 1493년 콜럼버스가 2차 항해에 나설 때 사탕수수 전문가를 데리고 와 에스파뇰라 섬에 사탕수수를 재배한 것이 그 시초이다. 사탕수수는 왕성하게 자라면서 여러 지역으로 번졌다.
사탕수수 재배에 쿠바는 여러 가지로 안성맞춤이었다. 1547년 스페인은 쿠바에서 본격적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사탕수수 농장주는 농장 안에 설탕공장을 세워 설탕을 생산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에서는 쿠바에서 사탕수수와 설탕을 수입해 럼주를 만들고 이를 아프리카로 수출했고 쿠바는 수출한 돈으로 흑인노예를 수입하였다. 영국이 쿠바의 사탕수수 수입을 제한하자 밀수가 성행했다. 영국이 수입관세를 강제 징수하기 시작하자 세금 부담이 가중된 북아메리카 13개 주에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니 쿠바의 사탕수수는 미국의 독립을 촉진시킨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이티가 최초로 식민지에서 독립하여 흑인공화국을 세우자 설탕제조업자들은 쿠바에 투자하기 시작하여 쿠바에서는 설탕산업이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1810년 스페인 식민지들이 잇달아 독립운동을 일으켰으나 설탕업자인 쿠바에서 태어난 크리오요 백인들은 아이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설탕업자인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스페인 제국에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쿠바의 독립은 지연됐다.
1867년 쿠바는 전 세계 사탕수수 생산량의 1/3을 차지하였고 주요 수출국은 미국이었다. 스페인이 쿠바에서 수출하는 설탕에 부과하는 세금을 올리자 크리오요는 1868년 처음으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1959년 쿠바혁명이 성공하고 1960년 쿠바 정부는 미국의 뜻과는 반대로 모든 기업을 국유화 한다. 그러자 미국은 쿠바의 설탕 수입을 금지했다. 결국 설탕은 소련으로 수출되었고 그 대가로 쿠바는 석유를 얻었다. 1990년 소련이 붕괴되자 쿠바는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설탕 생산량이 급감하고 위기상황에 처하게 된다.
흑인노예의 마음을 달래준 럼주
럼주의 원료는 사탕수수이다. 럼주는 설탕을 제련하고 남은 당밀을 발효시킨 주정으로 만든다. 럼주는 달콤한 향기를 낸다. 이 달콤한 냄새를 음미하면서 고통스럽고 비참한 생활을 한 흑인 노예를 돌이켜 본다. 럼주는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한다. 흑인 노예들은 럼주를 마시면서 고단한 삶을 이겨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흑인 노예들에게 럼주는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흑인 노예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한 사탕수수를 경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흑인 노예들은 이러한 사탕수수로 만들어진 럼주로 그들의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해적들이 즐겨 마셨던 독한 럼주는 선원이나 노예들이 마시는 하층민의 술이었다. 그러나 증류법이 개발되면서 쿠바를 대표하는 술이 되었다. 럼주는 빚은 지 1년 반이 지나면 맑고 투명해져 실버 또는 화이트 라벨, 3년 지나면 옐로, 5년이 지나면 골드, 7년 이상은 블랙 라벨로 부른다. 화이트와 옐로 라벨은 칵테일 용으로, 골드와 블랙은 스트레이트로 마신다. 헤밍웨이는 모히토를 즐겼다고 하는 데 이것은 럼주의 칵테일이다. 모히토는 럼주에 설탕과 레몬즙 그리고 소다수와 박하 잎을 넣어 만든다. 럼주의 대표 상표는 '아바나클럽'이다. 아바나클럽의 상표 디자인에는 한 여인이 있다. 그는 이사벨로 당시 쿠바 총독 소토의 부인이었다. 남편이 플로리다에 원정을 나섰다가 죽자 부인 이사벨도 곧 죽었다. 한 건축가가 이사벨의 동상을 만들어 아바나의 상징이 되었고 아울러 아바나클럽의 대표 상표가 됐다.
쿠바를 여행하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신 것은 맥주였다. 왜냐하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너무도 목이 마르기 때문이다. 럼주는 가끔씩 저녁 식사와 함께 즐겼다. 쿠바를 상징하는 럼주에 미국을 상징하는 콜라를 섞으면 기막힌 칵테일이 된다. 이 칵테일의 이름은? 쿠바 리브레(Cuba Libre)이다. 쿠바의 자유라는 뜻이다. 누가 이름 지었을까? 당연히 미국인들이다.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해야 마음 놓고 쿠바를 주무를 수 있으니까. '비바 쿠바 리브레!' 럼주의 최고급이라는 7년산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지만 쿠바 사람들이 다니는 일반 식당에서는 구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쿠바 사람들이 사 먹기에는 다소 비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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