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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시신 첫 촬영 기자 등 4·19혁명 공로자 선정

고 허종 기자와 3·15의거 시위주동자 5명... 24일 건국포장 전수

등록|2012.10.23 11:22 수정|2012.10.23 11:22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던 모습을 처음으로 촬영·보도했던 신문기자가 4·19혁명 공로자로 인정됐다.

23일 (사)3·15의거기념사업회는 고 허종 기자(1924~2008, 당시 부산일보 마산주재)와 3·15의거 시위주동자 5명이 유공자로 인정됐다고 밝혔다. 오는 24일 국가보훈처 강당에서 열리는 4·19혁명 유공자 전수식에서 이들한테 건국포장이 수여된다.

3·15마산의거 시위주동 유공자는 명예회복과 함께 앞으로 국립3·15민주묘지 안장 등의 혜택을 받게 된다. 3·15의거 관련 유공자는 2005년 7명, 2007년 5명, 2010년 23명에 이어 이번에 6명이 추가로 발굴되었으며, 총 41명으로 늘어났다.

▲ (사)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는 2011년 11월 14일 오후 마산중앙부두 쪽에 있는 김주열열사 시신인양지 부근에서 "경남도 지정 문화재" 표지판 제막식을 가졌다. ⓒ 윤성효



허종 기자는 1960년 3월 15일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사망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그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이를 최초로 촬영해 보도했다. 이 보도는 AP통신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되어 4·19혁명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기념사업회는 "허종 기자는 3·15부정선거 규탄과 시민학생들의 항쟁 현장에서 공안기관의 갖은 협박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기자정신으로 신속하고 사실감 있는 취재로 언론에 보도했다"고 소개했다.

강대인(1934년생, 당시 동국대 졸업)씨는 3·15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하고 분개하여 이날 낮부터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시민들이 부정선거 개표가 진행되던 마산시청으로 가서 개표를 중단시키고자 하였으나 경찰의 강력한 저지와 실탄사격으로 시민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부상자를 병원으로 이송시키기도 했다.

이후 그는 시위 주동자로 몰려 경찰의 추적을 당하자 19일 서울로 피신하였고, 21일 한국일보에 그날 밤 시위현장을 수기로 기고하여 사회면 전면에 게재되어 마산의 상황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감광풍(1940년생, 당시 마산상고 3년)씨는 자유당 정권이 부정선거를 획책하자 이에 분개하여 마산상고 재학생으로 시위대에 참여해 앞장섰다. 경찰이 폭력과 실탄으로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것을 보고, 그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맞서 싸웠다. 이어 그는 김주열 열사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다시 시위대에 합류해 마산도립병원(현 마산의료원) 부근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주동자로 찍혀 마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가 4월 26일 석방되었다.

▲ 창원 소재 국립 3.15민주묘지 안에 있는 부조. ⓒ 윤성효


안양문(1941년생, 당시 철공소 근무)씨는 시위 현장으로 달려가 남성파출소 앞에서 항거하던 중 연행되어 마산시청 지하에 구금되었다가 다음 날 석방되었다. 또 그는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도립병원으로 이송되자 달려가 시위에 앞장서서 "김주열 사살한 경찰 색출하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어 그는 마산경찰서 안으로 진입하여 각종 서류 등을 폐기하다 피신한 뒤 체포되었고, 구타와 고문 끝에 주동자로 몰려 마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이후 석방되었다.

정현팔(1937년생, 당시 동아대 4년 재학)씨는 3·15부정선거감시단으로 활동하며 부정선거 현장 사진을 찍어 시민들에게 고발하였다. 민주당의 선거포기선언 첫 시위를 위한 회의에 참석해 계획을 세우고 현수막과 머리띠를 만드는 등 실무를 담당했다.

그는 남성동파출소 앞 시위 등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으며, 3월 17일 북마산파출소 방화범으로 경찰에 긴급체포되어 방화범과 용공분자로 몰려 7일간 고민을 당했는데, 경찰은 끝내 그의 혐의를 찾지 못하고 풀어주었던 것이다. 석방 뒤 그는 국회조사단에 출석해 부정선거현장과 고문에 대해 고발하기도 했다.

조명제(1940년생, 당시 택시운전사)씨는 승객들로부터 자유당의 부정과 불법에 대해 듣고 분개하던 중 민주당의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 장면을 목격하고 다른 승객들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퇴근 뒤 남성파출소 앞 시위대에 합류하여 마산시청으로 행진하던 중 경찰의 총과 최루탄 공격을 받기도 했다.

당시 그는 대퇴부에 총을 맞고 쓰러져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고, 수시로 경찰의 취조와 압박 속에 3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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