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 시월이면 생각나는 그 시절
단풍으로 열꽃 피었다 사그라지고... 인파는 산이 앓는 소리를 들으려
대청봉이 치맛자락 한 자락 살포시 늘인 듯한 중청 허리께서 지낸 초승달 뜰 밤도 바람만 텐트를 훑고, 어느덧 어스름 새벽이 밝아오는지 짙은 안개 사이로 희붐히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일출을 보겠다며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만 이런 날씨에 가당키나 할까 싶다.
하지만 다양한 생각들을 지니고 산에 올랐을 그들이 기대하는 동해 일출은 어김없이 구름 저 편에서 분명히 떠오른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듯 말이다. 나도 텐트에서 나와 물통과 코펠에 아침을 지을 쌀과 감자, 양파를 챙겨 샘으로 갔다. 이미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찬 공기가 폐부를 파고든다.
모두 해돋이를 보러 갔는지 샘터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감자를 깎고 살을 씻은 뒤 물을 담아 야영했던 헬기장으로 돌아오는데 샘터를 찾는 이들이 주변을 살피고 있다. 샘터 방향을 일러주며 보니 손엔 세숫비누와 치약을 묻힌 칫솔이 들려들 있다.
물을 떠 와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면 좋으련만... 하루쯤 산중에서 세수를 하지 않아도 누가 뭐랄 사람 없는데, 자신을 꾸미고 청결히 하고자 산을 더럽히는 그들은 왜 산을 오르는지 모르겠다.
지금이야 통나무로 지은 설악산장이 예전 중청대피소 앞에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시점인 1981년에는 시멘트로 돌을 쌓아 지은 대피소가 하나 있었고, 그 뒤로도 샘터가 하나 있었다. 대피소 아래로도 20분가량 걸어 내려가면 샘이 있었고...
대피소에서 잔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식사를 하거나 그대로 대청봉 등으로 각기 목적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할 때서야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끝청봉에서 오색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고, 좀 더 한계령 방향으로 내려가다 독주골로 하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계령으로 하산하기로 마음 정한 터라 천천히 걷다 한계령 샘터쯤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도 상관없다.
느릿느릿 짐을 챙겨 배낭을 꾸리고 나니 시간은 오전 9시를 넘었다. 지난밤 술을 마셨는지 소란을 피우던 옆 텐트는 아직도 잠에 빠진 모양이다.
중청대피소를 지나 곧장 왼쪽으로 들어서면 끝청봉을 거쳐 서북주릉이 시작된다. 아주 잠시 오색마을이 보이는가 싶었으나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내일이면 그곳으로 가니 지금 애써 보려 할 일도 없다. 비스듬히 누운 길가엔 짙은 담갈색으로 물든 진달래가 단풍철이 시작되었음을 일러주려는 모양이다.
중청을 막 벗어나면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 굽어보이는 끝청으로 난 암릉길이다. 아무리 배낭이 무거워도 한 번만 쉬면 끝청까지 단숨에 갈 수 있지만, 서두를 일이 없는 산행이라 전망 좋은 곳이면 배낭을 기대놓고 한참씩 앉아 여유를 부려본다.
칠부바지에 긴 타이즈 양말을 덧신고 앞에 주머니가 달린 등산용 바람막이를 걸친 이들이 무시로 눈에 들어온다. 군화와 농구화를 신고 한껏 멋을 부린 이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간혹 귀하게 구할 수 있는 이탈리아산 가죽 등산화를 신은 이들과 을지로 송림에서 제작한 등산화를 신은 이들도 눈에 띈다. 왁스를 발라 광을 낸 등산화를 신은 이들은 당일치기로 왔거나 지난밤 잠들기 전 왁싱(Wattage)을 했겠다.
지난해 소백산에 갔을 때 한 선배의 손에 이끌려 맞춤 등산화를 처음 얻어 신었다. 내 스스로 이런 등산화를 구입할 엄두도 못 낼 일인데 몇 번 동행하다보니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모습을 보시곤 큰 맘 먹고 하나 선물하셨겠다.
이젠 바닥 고무가 다 닳아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걷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다. 밑창은 언제든 수선이 가능하다니 조만간 들러서 창을 손 봐야겠다.
끝청을 지나 얼마 동안은 내리막길이다. 독주골로 들어서는 갈림길을 지나면 한동안 산 능선이라기엔 제법 걷기 편한 넓은 길이 나타난다. 독주골과 구곡담 골짜기에서 몰려온 것인지 안개가 짙다.
배낭을 기대기 좋은 바위가 있는 곳에 다다라서야 잠시 쉰다. 발아래 계곡 방향으로 너덜이 있는 걸 보니 온정골을 막 넘어선 모양이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장막 속에 이내 시야에 보이던 사물들이 자취를 감췄다. 불과 몇 미터 앞에 사람이 다가와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안개가 짙다.
사람의 생각이란 게 눈이나 비, 그리고 안개와 같은 사위를 구분 못 할 조건이 되면 막연히 어떤 대상이 그리워지고 외로움에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는 모양이다.
6살 되던 해 봄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집을 떠난 어머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기에 생긴 마음의 병인지도 모르겠다. 12살 때의 일이다. 초겨울 방학을 앞두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하늘은 잿빛으로 낮게 내려앉았고, 까마귀 떼는 들과 나무를 하는 숲으로 날아들어 종일 울어댔다. 까마귀만 보면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나무를 한 짐 가득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불당골을 벗어나 도로로 내려섰을 때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송이는 급기야 옥수수 튀밥 크기만큼 커지더니 이내 쌓인 눈에 발목이 빠진다.
눈이 그리운 대상에 대해 간절하게 만든다는 건 그날 알았다.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어느 사이엔가 말로는 표현 못 할 커다란 그리움이 되어 있었던 거다. 행여 누가 볼까 눈물을 훔치고 애써 마음을 달래려 지고 온 나무를 톱을 다시 잘라 장작을 팼다.
그때처럼 안개가 짙은 날 산길을 걷는 내가 처량하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고향과 산을 한껏 누려보려는데 하늘이 심통 사납게 어깃장을 놓는 모양이라 생각하니 피식 헛웃음이 나온다. 파란 가을 하늘에 뭉게구름 둥실거리는 것까지도 바라지 않았다. 적당히 흐린 하늘이라도 간간히 햇살 곱게 가을 단풍에 스며들기만 했으면 했다. 심통 사나운 영감 소갈딱지처럼 눅눅착찹한 날씨일게 뭐람.
비라도 쏟아지면 낭패다. 어디 한 몸 비 피할 곳 없겠느냐만, 산중에서 그런 청승 또한 없다.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 일어섰다.
두세 명 비를 피할 수 있는 제법 잘 다듬어 놓은 것 같은 평지까지 어떻게 단숨에 걸었는지 모른다. 비가 올 것 같다는 예감에 그리했으리라. 바위에 배낭을 기대놓고 배낭머리에 챙겨둔 간식을 꺼내 요기를 했다. 잘 마시지는 않더라도 술 한 병 가져 올 걸 그랬나 싶다. 이제 한계령삼거리까지는 한 번에 갈 수 있는 거리다. 물론 날씨가 도와줘야 하겠지만...
언제 한계령샘터 바로 위를 지나쳤는지 앞에 너덜지대가 나타났다. 귀때기청봉으로 오르는 길목까지 오고 만 것이다. 한두 방울 비까지 뿌리는데 낭패다. 길을 잃은 건 아니지만, 딱히 길을 잃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어정쩡한 모양이 되고 말았다. 아침에 여유만 안 부렸어도 이 정도 지나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왔던 길 되밟아 샘터 위 삼거리까지 가서 한계령으로 하산할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했고 어차피 극복해야 할 일이니 고통을 덤으로 지고 갈지언정 다시 돌아가야지. 도둑바위골로 내려갈까도 생각했으나 길이 낯설다.
다시 삼거리에 돌아와 가파른 경사를 내려서니 야영을 하려는지 몇 사람이 텐트를 치느라 서성이고 있다. 잠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엉뚱한 길 들어서 고생한 다리를 쉴 겸 앉았다.
이제는 지나 온 길조차 보이지 않게 안개가 몸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다. 잠시 앉았고 땀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몸이 으슬으슬 춥다고 소름이 돋는다. 지나가는 이들도 제 갈길 바쁜지 주변을 둘러 살피지도 않는다.
여기서부터 2km 조금 더 가면 한계령이다. 귀때기청봉 방향으로 1km 가까이 나갔다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1307봉까지는 도착했으련만. 너무 오래 쉬면 나중이 문제다. 일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제법 경사가 가파른 비탈을 거대한 바위를 끼고 돌아 오른다. 사람들이 젖은 흙을 밝고 딛은 돌은 아차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인데 결국 한 곳에서 몸은 균형을 잃고 나동그라졌다.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돌에 짖긴 모양으로 정강이엔 시커멓게 멍이 들고, 살갗이 벗겨진 자리에서 이내 피가 흐른다. 뿐만 아이라 균형을 잡으려 애쓰며 인가목 줄기를 훑었던 모양이다. 손바닥과 겨드랑이는 아리고, 다리에선 피가 흐르며 제법 뻐근하게 아프다. 당장이라도 비만 피하면 지혈을 하면 좋겠는데...
겨우 한 사람 웅크릴 수 있는 바위 밑에 자리를 잡고 다리를 살펴봤다. 살갗이 벗겨진 줄 알았던 자리가 제법 깊게 패였다. 요오드를 바르고 밴드 하나 붙이는 것 외엔 당장 달리 할 방법이 없다.
1307봉에 올라 잠시 석고덩골방향을 바라봤지만, 가까운 곳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그리 험하지 않은 길로 1km 남짓 걸으면 설악루다.
차가 고개를 넘는지 요란한 엔진소리가 들린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한계령도로개설공사가 1971년 말 완공되는 과정에서 순직한 육군 제1102야전공병단 장병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빗속에 서 있다. 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가 3군단장으로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누군가 그걸 쪼아낸 모양이다.
하긴 군인들만 다치고 죽었던가. 이 도로를 개설하며 아버지께서도 발파작업을 하시다 날아온 돌에 어깨가 부러지고 등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고 1년 이상 고생하셨다.
나이 서른여덟에 아내가 집을 나가고 혼자 자식들을 키우신 분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자식들 버리지 않겠다고 목수일 잠시 접고 도로건설 현장에 나갔다 다치신 것이다.
그런 아버지께서 계신 오색이다.
지난해 도로를 개설하고 근 10년 만에 포장이 된 아스팔트 길 위론 관광버스가 줄지어 넘고 있다. 휴게소를 크게 다시 짓는 모양이다. 잠시 공터 한쪽에서 풀숲에 배낭을 내려놓고 걸터앉았다.
<한계령에서 1>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매일지
삼만 육천 오백 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 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매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 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 1981년 10월 3일 한계령에서 고향 오색을 보며
한계령 노래가 된 한계령에서는 이런 과정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간절한 애증과, 가난한 아버지의 자식을 향한 까닭모를 증오를 닮은 역정까지 솔직한 심정으로 토로했다. 늘 고향을 들리면 부모에게서 못 느낀 사랑을 친구와 그의 어머니는 따뜻한 마음으로 채워주셨음도 잊지 않았다. 이젠 그 친구도 고등학교 2학년의 숙녀가 되어 있다.
지난 글에서 여기까지가 1981년 10월 1일 저녁부터 10월 3일 오후까지 이야기다. 오랜만에 어머니도 연세가 많으시니 염려된다고 다른 곳으로 모셨으면서 고향이고 친구가 있다고 찾아와준 그 덕에 이 글을 쓴다.
시월은 한계령이 몸살을 앓는 시기다. 단풍으로 열꽃이 피었다 사그라지고, 많은 인파는 산이 앓는 소리를 들으려 몰려온다.
하지만 다양한 생각들을 지니고 산에 올랐을 그들이 기대하는 동해 일출은 어김없이 구름 저 편에서 분명히 떠오른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듯 말이다. 나도 텐트에서 나와 물통과 코펠에 아침을 지을 쌀과 감자, 양파를 챙겨 샘으로 갔다. 이미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찬 공기가 폐부를 파고든다.
모두 해돋이를 보러 갔는지 샘터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감자를 깎고 살을 씻은 뒤 물을 담아 야영했던 헬기장으로 돌아오는데 샘터를 찾는 이들이 주변을 살피고 있다. 샘터 방향을 일러주며 보니 손엔 세숫비누와 치약을 묻힌 칫솔이 들려들 있다.
물을 떠 와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면 좋으련만... 하루쯤 산중에서 세수를 하지 않아도 누가 뭐랄 사람 없는데, 자신을 꾸미고 청결히 하고자 산을 더럽히는 그들은 왜 산을 오르는지 모르겠다.
▲ 대청봉대청대피소와 중청대피소는 사라지고, 지금은 중청 안부에 설악산장이 자리하고 있다. ⓒ 정덕수
지금이야 통나무로 지은 설악산장이 예전 중청대피소 앞에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시점인 1981년에는 시멘트로 돌을 쌓아 지은 대피소가 하나 있었고, 그 뒤로도 샘터가 하나 있었다. 대피소 아래로도 20분가량 걸어 내려가면 샘이 있었고...
대피소에서 잔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식사를 하거나 그대로 대청봉 등으로 각기 목적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할 때서야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끝청봉에서 오색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고, 좀 더 한계령 방향으로 내려가다 독주골로 하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계령으로 하산하기로 마음 정한 터라 천천히 걷다 한계령 샘터쯤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도 상관없다.
느릿느릿 짐을 챙겨 배낭을 꾸리고 나니 시간은 오전 9시를 넘었다. 지난밤 술을 마셨는지 소란을 피우던 옆 텐트는 아직도 잠에 빠진 모양이다.
중청대피소를 지나 곧장 왼쪽으로 들어서면 끝청봉을 거쳐 서북주릉이 시작된다. 아주 잠시 오색마을이 보이는가 싶었으나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내일이면 그곳으로 가니 지금 애써 보려 할 일도 없다. 비스듬히 누운 길가엔 짙은 담갈색으로 물든 진달래가 단풍철이 시작되었음을 일러주려는 모양이다.
중청을 막 벗어나면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 굽어보이는 끝청으로 난 암릉길이다. 아무리 배낭이 무거워도 한 번만 쉬면 끝청까지 단숨에 갈 수 있지만, 서두를 일이 없는 산행이라 전망 좋은 곳이면 배낭을 기대놓고 한참씩 앉아 여유를 부려본다.
칠부바지에 긴 타이즈 양말을 덧신고 앞에 주머니가 달린 등산용 바람막이를 걸친 이들이 무시로 눈에 들어온다. 군화와 농구화를 신고 한껏 멋을 부린 이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간혹 귀하게 구할 수 있는 이탈리아산 가죽 등산화를 신은 이들과 을지로 송림에서 제작한 등산화를 신은 이들도 눈에 띈다. 왁스를 발라 광을 낸 등산화를 신은 이들은 당일치기로 왔거나 지난밤 잠들기 전 왁싱(Wattage)을 했겠다.
지난해 소백산에 갔을 때 한 선배의 손에 이끌려 맞춤 등산화를 처음 얻어 신었다. 내 스스로 이런 등산화를 구입할 엄두도 못 낼 일인데 몇 번 동행하다보니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모습을 보시곤 큰 맘 먹고 하나 선물하셨겠다.
이젠 바닥 고무가 다 닳아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걷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다. 밑창은 언제든 수선이 가능하다니 조만간 들러서 창을 손 봐야겠다.
▲ 끝청에서끝청봉에서는 내외 설악과 남설악까지 조망된다. 끝청봉에서 바로 아래로 내려서면 오색리지만 지금은 등산로가 폐쇄되었다. ⓒ 정덕수
끝청을 지나 얼마 동안은 내리막길이다. 독주골로 들어서는 갈림길을 지나면 한동안 산 능선이라기엔 제법 걷기 편한 넓은 길이 나타난다. 독주골과 구곡담 골짜기에서 몰려온 것인지 안개가 짙다.
배낭을 기대기 좋은 바위가 있는 곳에 다다라서야 잠시 쉰다. 발아래 계곡 방향으로 너덜이 있는 걸 보니 온정골을 막 넘어선 모양이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장막 속에 이내 시야에 보이던 사물들이 자취를 감췄다. 불과 몇 미터 앞에 사람이 다가와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안개가 짙다.
사람의 생각이란 게 눈이나 비, 그리고 안개와 같은 사위를 구분 못 할 조건이 되면 막연히 어떤 대상이 그리워지고 외로움에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는 모양이다.
6살 되던 해 봄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집을 떠난 어머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기에 생긴 마음의 병인지도 모르겠다. 12살 때의 일이다. 초겨울 방학을 앞두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하늘은 잿빛으로 낮게 내려앉았고, 까마귀 떼는 들과 나무를 하는 숲으로 날아들어 종일 울어댔다. 까마귀만 보면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나무를 한 짐 가득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불당골을 벗어나 도로로 내려섰을 때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송이는 급기야 옥수수 튀밥 크기만큼 커지더니 이내 쌓인 눈에 발목이 빠진다.
눈이 그리운 대상에 대해 간절하게 만든다는 건 그날 알았다.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어느 사이엔가 말로는 표현 못 할 커다란 그리움이 되어 있었던 거다. 행여 누가 볼까 눈물을 훔치고 애써 마음을 달래려 지고 온 나무를 톱을 다시 잘라 장작을 팼다.
그때처럼 안개가 짙은 날 산길을 걷는 내가 처량하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고향과 산을 한껏 누려보려는데 하늘이 심통 사납게 어깃장을 놓는 모양이라 생각하니 피식 헛웃음이 나온다. 파란 가을 하늘에 뭉게구름 둥실거리는 것까지도 바라지 않았다. 적당히 흐린 하늘이라도 간간히 햇살 곱게 가을 단풍에 스며들기만 했으면 했다. 심통 사나운 영감 소갈딱지처럼 눅눅착찹한 날씨일게 뭐람.
비라도 쏟아지면 낭패다. 어디 한 몸 비 피할 곳 없겠느냐만, 산중에서 그런 청승 또한 없다.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 일어섰다.
▲ 끝청봉서북주릉으로 향해 출발하는 끝청봉 주변은 분비나무와 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 정덕수
두세 명 비를 피할 수 있는 제법 잘 다듬어 놓은 것 같은 평지까지 어떻게 단숨에 걸었는지 모른다. 비가 올 것 같다는 예감에 그리했으리라. 바위에 배낭을 기대놓고 배낭머리에 챙겨둔 간식을 꺼내 요기를 했다. 잘 마시지는 않더라도 술 한 병 가져 올 걸 그랬나 싶다. 이제 한계령삼거리까지는 한 번에 갈 수 있는 거리다. 물론 날씨가 도와줘야 하겠지만...
언제 한계령샘터 바로 위를 지나쳤는지 앞에 너덜지대가 나타났다. 귀때기청봉으로 오르는 길목까지 오고 만 것이다. 한두 방울 비까지 뿌리는데 낭패다. 길을 잃은 건 아니지만, 딱히 길을 잃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어정쩡한 모양이 되고 말았다. 아침에 여유만 안 부렸어도 이 정도 지나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왔던 길 되밟아 샘터 위 삼거리까지 가서 한계령으로 하산할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했고 어차피 극복해야 할 일이니 고통을 덤으로 지고 갈지언정 다시 돌아가야지. 도둑바위골로 내려갈까도 생각했으나 길이 낯설다.
▲ 설악산 단풍설악산의 단풍은 언제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술을 부린다. ⓒ 정덕수
다시 삼거리에 돌아와 가파른 경사를 내려서니 야영을 하려는지 몇 사람이 텐트를 치느라 서성이고 있다. 잠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엉뚱한 길 들어서 고생한 다리를 쉴 겸 앉았다.
이제는 지나 온 길조차 보이지 않게 안개가 몸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다. 잠시 앉았고 땀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몸이 으슬으슬 춥다고 소름이 돋는다. 지나가는 이들도 제 갈길 바쁜지 주변을 둘러 살피지도 않는다.
여기서부터 2km 조금 더 가면 한계령이다. 귀때기청봉 방향으로 1km 가까이 나갔다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1307봉까지는 도착했으련만. 너무 오래 쉬면 나중이 문제다. 일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제법 경사가 가파른 비탈을 거대한 바위를 끼고 돌아 오른다. 사람들이 젖은 흙을 밝고 딛은 돌은 아차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인데 결국 한 곳에서 몸은 균형을 잃고 나동그라졌다.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돌에 짖긴 모양으로 정강이엔 시커멓게 멍이 들고, 살갗이 벗겨진 자리에서 이내 피가 흐른다. 뿐만 아이라 균형을 잡으려 애쓰며 인가목 줄기를 훑었던 모양이다. 손바닥과 겨드랑이는 아리고, 다리에선 피가 흐르며 제법 뻐근하게 아프다. 당장이라도 비만 피하면 지혈을 하면 좋겠는데...
겨우 한 사람 웅크릴 수 있는 바위 밑에 자리를 잡고 다리를 살펴봤다. 살갗이 벗겨진 줄 알았던 자리가 제법 깊게 패였다. 요오드를 바르고 밴드 하나 붙이는 것 외엔 당장 달리 할 방법이 없다.
▲ 한계령개통 위령비이 위령비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가 3군단장으로 적혀있었으나, 10·26 직후 누군가 정으로 이름을 파냈다. ⓒ 정덕수
1307봉에 올라 잠시 석고덩골방향을 바라봤지만, 가까운 곳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그리 험하지 않은 길로 1km 남짓 걸으면 설악루다.
차가 고개를 넘는지 요란한 엔진소리가 들린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한계령도로개설공사가 1971년 말 완공되는 과정에서 순직한 육군 제1102야전공병단 장병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빗속에 서 있다. 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가 3군단장으로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누군가 그걸 쪼아낸 모양이다.
하긴 군인들만 다치고 죽었던가. 이 도로를 개설하며 아버지께서도 발파작업을 하시다 날아온 돌에 어깨가 부러지고 등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고 1년 이상 고생하셨다.
나이 서른여덟에 아내가 집을 나가고 혼자 자식들을 키우신 분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자식들 버리지 않겠다고 목수일 잠시 접고 도로건설 현장에 나갔다 다치신 것이다.
그런 아버지께서 계신 오색이다.
지난해 도로를 개설하고 근 10년 만에 포장이 된 아스팔트 길 위론 관광버스가 줄지어 넘고 있다. 휴게소를 크게 다시 짓는 모양이다. 잠시 공터 한쪽에서 풀숲에 배낭을 내려놓고 걸터앉았다.
<한계령에서 1>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매일지
삼만 육천 오백 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 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매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 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 1981년 10월 3일 한계령에서 고향 오색을 보며
▲ 한계령 도로1971년, 이전의 군사작전도로를 44번 국도로 개통했으며 1980년 12월 도로는 확포장이 되어 지금에 이른다. ⓒ 정덕수
한계령 노래가 된 한계령에서는 이런 과정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간절한 애증과, 가난한 아버지의 자식을 향한 까닭모를 증오를 닮은 역정까지 솔직한 심정으로 토로했다. 늘 고향을 들리면 부모에게서 못 느낀 사랑을 친구와 그의 어머니는 따뜻한 마음으로 채워주셨음도 잊지 않았다. 이젠 그 친구도 고등학교 2학년의 숙녀가 되어 있다.
지난 글에서 여기까지가 1981년 10월 1일 저녁부터 10월 3일 오후까지 이야기다. 오랜만에 어머니도 연세가 많으시니 염려된다고 다른 곳으로 모셨으면서 고향이고 친구가 있다고 찾아와준 그 덕에 이 글을 쓴다.
시월은 한계령이 몸살을 앓는 시기다. 단풍으로 열꽃이 피었다 사그라지고, 많은 인파는 산이 앓는 소리를 들으려 몰려온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다음 뷰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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