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이황이 말한 고려 500년 제1의 인물은?

[노래의 고향 25] 경북 성주 <다정가>

등록|2012.11.12 16:46 수정|2012.11.13 11:00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 이조년은 경북 성주에 유배를 와 있을 때 <다정가>를 노래했다. 사진은 그의 아버지 이장경 등 이씨 집안 유명 인물들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는 경북 성주 <안산영정>에 있는 이조년의 초상이다. 물론 작품의 일부만 촬영되었기 때문에 전체 그림과는 느낌, 구도 등이 다르다. ⓒ 정만진

<다정가>로 알려진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노래다. 여기서 '시조'라 하지 않고 '노래'라 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과 지금 사람들이 서로 다른 눈으로 시조를 보기 때문이다. 현대시조는 곡조가 없는 '문학'이지만 고려와 조선 시대의 고시조는 곡조와 가사를 두루 지닌 '노래'였다.

우리나라 시조의 대표작 중 하나 <다정가>

<다정가>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지닌 수준에 힘입어 '국민 시조'의 반열에 올랐다. 이화, 월백, 은한, 삼경, 일지춘심, 자규, 다정, 병, 잠 못 들어 하노라…… 시어만으로도 너무나 아름다우니 더 이상 내용은 따져서 왈가왈부할 여지도 없다.

이조년은 이장경의 5남이다.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이 그의 네 형이다. 재미있는 작명법이다. 그런데 형제의 이름만 재미있는 데 그치지 않고 이씨 집안은 전체가 살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조년을 포함하여 다섯 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가문의 이름이 나라 안에 펄펄 날게 되었기 때문이다.

▲ 경북 성주 최고의 역사유산 답사지로 여겨지는 세종대왕자 태실.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태실지다. 조선 세종 때 왕실은 서울에서 그토록 먼 이곳 성주의 태봉을 '나라 최고의 태실 명당'으로 선정하고는 미리 묘를 써 있던 이장경 가의 묘를 이장시켰다. 그리고 왕자들의 태실을 안장했다. 오른쪽 사진은 전경이고, 왼쪽 사진은 표준렌즈에 잡히지 않아 따로 찍은 단종 태실이다. ⓒ 정만진


▲ 겨울에 본 세종대왕자태실. 오른쪽 사진의 파괴된 태실은 안평대군의 것으로 세조 즉위 즉시 파괴되었다. ⓒ 정만진


이장경의 묘소는 본래 지금의 세종대왕자태실 자리인 태봉에 있었다. 그러나 왕궁에서 '전국 최고의 태실 명당'으로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사 왼쪽의 태봉을 지목하면서 이장경의 무덤은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로 옮겨졌다. 장경의 다섯 아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과거에 합격하고, 그 자손들도 대를 이어 고관대작을 지낸 것을 보면 과연 태봉 자리가 명당이기는 명당인가 보다.

경북 성주 최고의 역사유적은 세종대왕자태실

<다정가>를 노래할 때 이조년은 성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서울을 떠나 고향 성주로 와서 산 세월이 무려 13년이나 되었다.

이조년은 자신의 집에다 백화헌(百花軒)이란 현판을 붙였는데 백 가지 꽃이 만발한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만큼 그는 꽃을 재배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살았다.

▲ 안산영당 ⓒ 정만진


그러나 이 무렵 남긴 한시 '백화헌시'를 보면 그가 꼭 온갖 꽃을 심고 키우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백화헌시'를 한글로 번역한 내용만 대략 읽어보자.

이 꽃 저 꽃 주섬주섬 심을 것 있나
백화헌에 백화를 피워야 맛인가
눈 속에는 매화꽃 서리 치면 국화꽃
울긋불긋 여느 꽃 부질없느니

울긋불긋 철 따라 빛깔이 변하는 여느 꽃들은 다 부질없다. 권력의 향배를 따라가며 잽싸게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하는 기회주의자들이 이 세상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 이조년은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 <다정가>도 성주에서 썼으니 어쩌면 백화헌시와 대동소이한 착상에서 작품이 태동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정'이 단순한 다정다감 차원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을 걱정하는 뜻깊은 심려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배나무꽃에는 달빛이 은은하고 은하수는 밤 12시 전후를 흐르는데, 한 가닥 나뭇가지에서 배어나오는 봄의 기운을 소쩍새가 어찌 알고 울겠냐마는, 다정다감한 것도 병인 듯하여 나도 이 밤을 잠 못 들고 있노라

▲ 안산영당을 거느린 이씨 재실의 전경. 경내의 오른쪽 뒤편 구석에 있는 안산영당은 사진으로든 실경으로든 이런저런 건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정만진


이조년은 <다정가>를 노래할 무렵 왜 성주에 살았을까. 사실 그는 성주에 귀양 와 있었다. 원의 실질적 지배를 받던 당시, 중앙 관리들은 자신과 친한 왕족을 권좌에 앉히기 위해 파벌을 이루어 원에 줄을 대며 싸워댔다. 이조년은 중립을 지켰지만, 결국 권력을 잡은 쪽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다.

유배지 성주에서 <다정가> 노래한 이조년

그러던 중 간신들이 원에 호소하여 임금을 바꾸려 획책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조년은 단신으로 원나라 조정을 찾아가 황제를 설득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그 후 1331년과 1339년에도 이조년은 비슷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원나라를 찾아갔다. 1339년에는 그의 나이가 무려 71세였으니, 그러한 고령에 멀리 중국까지 찾아다니며 자신의 임금을 구출한 충정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 안산영당으로 드나드는 별도의 출입문 ⓒ 정만진

그래서 이황은 말했다. '이조년은 고려 500년 제1의 인물이다.' 어째서 이황은 그렇게 이조년을 극찬했을까.

이조년은 <다정가>가 단숨에 보여주듯이 뛰어난 문장가였다. 유능한 행정가로서 높은 벼슬도 지냈다. 특히 그는 나라의 위기를 개인적 능력으로 해결해내는 역량을 발휘했다. 그만 하면 이황의 인물평이 지나친 극찬이라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사실에 어긋나는 발언으로 간단히 치부할 일도 아닐 법하다.

타락한 왕, 충언 수용 않자 벼슬 버리고 귀향

게다가 이조년은 73세 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벼슬살이에 연연하지 않았다. 국정 살피기에 소홀한 왕을 여러 번 충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서슴없이 낙향했다. 꿋꿋한 선비의 기질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75세에 타계했고,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영당에서 모셔져 배향되고 있다. 안산영당은 본디 숙종 10년(1680)에 '안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은 서원이었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피하기 위해 안산영당으로 개칭했다.

안산영당의 성격은 이름에 영당(影堂) 두 글자가 들어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 이곳은 이조년 외에도 그의 아버지 장경 등 여러 선현(先賢)들의 초상화를 모셔두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217호다. 

▲ 성주 참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성주에 왔으면 국내 유일의 '참외 박물관'을 관람해야겠다. 성주 읍내에서 성밖숲을 지나 가야산 방향으로 얼마 아니 가면 도로변에 있어 찾기도 쉽다. 사진은 건물(위)과 홍보물 일부. ⓒ 정만진

울긋불긋 여느 꽃 다 부질없다

이조년은 선비의 대쪽 같은 충성심과 절개를 노래했다.

'눈 속에는 매화꽃 서리 치면 국화꽃, 울긋불긋 여느 꽃 부질없느니.'

그런 이조년의 영정을 고이 모시고 있는 안산영정. <다정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찾아볼 곳이다. 그러나 찾기가 쉽지 않다.

성주읍에서 출발하여 벽진 면소재지로 들어간 다음 우회전, 벽진 중학교 앞 도로를 지난다. 길은 도로변 돌비석에 '上占福'이라는 흥미로운 동명을 새겨둔 마을까지 줄곧 올라간다. 상점복은 벽진면의 끝마을이다.

상점복 마을이 끝나면 금세 오르막이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정점에 닿는다. 곧 초전면 표지판이 나타나면 이내 왼쪽으로 '안산영당 1.5km', 직진하여 '백세각 3km, 완정고택 4.7k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길 우측에 서 있다.

'별고을' 성주의 밤하늘, <다정가>처럼 은하수가 가득하네

도무지 길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왼쪽 임도를 따라 들어간다. 경북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41번지. 대낮에도 은하수가 하늘 가득 깔려 있는 듯 느껴지는 고즈넉한 산속이다. 안산영당 주위에는 아무 인가도 없다.

이조년 선생이 계시는 곳은 인기척 하나 없는 조용한 산중이다. 어느 철에 방문해도 늘 배꽃이 만개한 듯한 느낌을 주는 맑은 숲속이다. <다정가>도 자정 전후로 은하수가 가득하다고 했고, 성주군(星州郡)도 '별고을'을 한자로 옮겨적은 이름이니, 이곳 안산영당 일대는 밤이 되면 은하수들로 하늘이 가득할 것이다. 어쩐지 선생은 지금도 여전히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고 계실 듯하다.

▲ 경북 성주에 갔으면 당연히 가야산에 가보아야 한다. 칠불봉(사진 왼쪽)과 우두봉에 올라본다면 더 이상 말할 것 없이 좋다. 성주에서 오르면 칠불봉에 닿는데, 이 길은 특히 등산로 입구에 야생화전시관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합천에 해인사도 있다. 해인사에서 오르면 우두봉에 도착한다. 우두봉과 칠불봉 사이는 700m가량 된다. ⓒ 정만진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