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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함께 하는 쿠바 자전거 기행 8]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까마구웨이까지

등록|2012.10.29 10:48 수정|2012.10.29 10:48
젊은 부인 요안나의 안내로 까사의 철제 막대로 만들어진 대문으로 들어섰다. 집에는 요안나와 요안나의 친정엄마와 어린 딸이 있었고 요안나는 영어를 잘 해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길쭉한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니 우리의 보통 천장보다 반 이상이나 높은 스페인식 거실의 천장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현관 바로 옆에 있어 역시 천장이 높은 방 하나와 뒤뜰에 따로 지은 창고 같은 방을 보여준다. 천장이 높은 좋은 방은 고 원장 네 주고 우리는 천장도 낮은 허름한 방을 택했다.

방에는 넓은 침대 하나가 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한 침대를 사용해야 했다. 여행 내내 전 선생과 사이좋은 부부처럼 지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니 아찔했다. 작은 창문이 두 개 있는데 유리는 아예 없다. 벽을 그냥 뚫어놓은 것으로 보면 된다. 단지 창문 밖에 닫았다 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있어 햇빛을 막아주는 데 함석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브라인드처럼 올렸다 내렸다 할 수는 없다.

선풍기가 천장에 달려 있고 에어컨은 벽에 붙어 있다. 더운 나라인지라 에어컨이 있다는 것만도 몹시 반가웠다. 비록 에어컨의 소음은 심했지만 가정집에 에어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쿠바는 늘 들어오던 인민이 굶는 공산국가는 아닌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제법 사는 나라에 속해 있는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더운 나라임에도 샤워기에서 더운 물이 나올 정도로 여유가 있어 보였다. 물론 변기통만 있는 것은 좀 그렇지만.

여장을 풀고 요안나에게 문의해 인근 길가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이른 시간인지라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식당 역시 천장이 매우 높았다. 더운 나라일수록 천장이 높아야 시원함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밖에 있는 식탁에 앉아 길가를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식사를 즐겼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요안나의 남편이 이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을 한다고 했다. 식당은 장식도 잘 되어 있고 해서 그런지 밥값도 제법 많이 나왔다. 비록 샌드위치와 음료 몇 잔 정도였는데도 한국에서 치러야 했던 비용에 버금가는 비용이었고 서비스는 엉망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걸어서 시내로 향했다. 찾아보니 몬카다(Moncada) 병영이 인근에 있어 물어가면서 걸었다. 도시의 풍경은 활발했고 아바나에서 듣고 온 것처럼 산티아고 데 쿠바 사람들은 좀 와일드 하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어쩐지 그런 것 같아 보였다. 도로에는 가끔 한국 대학생처럼 보이는 배낭족들과 외국인 여행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몬카다 병영은 현재 학교와 주거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한 구석에 박물관이 설치되어 있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26일 이 병영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반군 사망자는 8명에 불과했으나 정부군은 반군을 추적해 학살했다. 70명에 가까운 반란자들은 체포돼 즉결 처형되거나 고문 끝에 죽었다. 피델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고 체포되었다. 변호사였던 피델은 스스로 변호하면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는 유명한 연설문을 남겼다. 이 박물관에는 당시의 상황과 쿠바혁명에 관한 여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피델은 1955년 사면을 받고 풀려난 후 세스페데스가 일으킨 10년 전쟁과 몬카다 습격사건을 기념하는 <7·26운동(M7-26)> 단체를 조직한다.

▲ 지금은 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몬카다 병영. 한 구석에 박물관이 있다. ⓒ 이규봉


자존심 때문에 40분을 걷다

스페인 점령 시기에 구축되었고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모로 요새(Castillo del Morro)는 몬카다 병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택시를 타야 했다. 낡을대로 낡아빠진 택시 기사와 흥정하여 5세우세에 가기로 했다. 30분 정도 달리니 성곽 위의 깃발이 보인다. 거의 손상이 없는 이 요새는 돌로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여기저기 구멍마다 대포가 배치되어 있다. 요새 안은 시원했다. 입구 양 옆에는 전시실이 있어 다양한 자료를 볼 수 있다. 요새 맨 위에도 갈라진 성벽마다 대포가 설치되어 있다. 멀리 대서양이 보인다. 이곳은 해적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고 영국 군함이 오가는 곳이라 그들을 대비해 요새를 지었다고 한다.

▲ 맨 아래에서 올려다 본 모로 요새 ⓒ 이규봉


요새를 나섰으나 그 흔한 택시가 한 대도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 좀 기다리면 오겠지 하고 기다렸으나 택시 대신 요새 경비를 서던 친구들이 다가온다. 자신들이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다. 보아하니 요새에서 사설택시를 운영하는 문지기 일당인 것 같다. 요금을 물으니 10세우세를 요구한다. 올 때 이미 5세우세를 주고 온 것을 생각하니 바가지 쓰는 것 같아 요금을 깎자고 했다. 더구나 이것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불법이고 그들은 알바하는 것이니 올 때 지불한 5세우세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10세우세에서 8세우세로 내려갔다. 그래도 거부하고 마치 걸어갈 수도 있다는 듯 우리는 천천히 걸어 나왔다. 왜냐하면 근처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것을 올 때 봤기 때문이다.

문지기들이 포기하고 가자 또 다른 한 젊은이가 따라오더니 계속 협상을 하잔다. 다시 7세우세까지 내려갔다. 우리는 처음 말한 5세우세에 자존심을 지킨다는 같지 않는 명분으로 계속 5세우세를 주장했다. 그러자 그 젊은 쿠바 친구는 알아들을 수 없게 무어라 중얼중얼 거리더니 그도 포기하고 갔다. 6세우세만 제시했어도 못 이기는 척하고 타려 했었는데. 그러나 1세우세를 양보하지 않은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정신적으로는 이겼을지는 모르지만 육체적으로는 네 명이 약 40분 정도 산길을 걸어 내려가야 하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택시를 타고 올라오면서 봐서 그런가, 가까이 있을 거라 생각한 버스 정류장은 실제는 꽤 멀리 있었다.

그라씨아! 택시 기사님

버스가 정차하는 마을까지 내려가니 한 집에 택시가 정차해 있었다. 그 집에 들어가 갈 수 있냐고 물으니 비번이라 일 안 한다고 한다.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으니 마침 그 택시 기사가 나와 시동을 걸기에 분명 시내로 가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태워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타라고 한다. 결국 우리는 40분을 걸어 내려와 택시를 탔다. 아무리 못줘도 5세우세는 줘야할 것 같았으니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줄 것은 다 줘야하는 꼴이 되었으니.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집에서 나온 기사는 소매 없는 내의 차림으로 운전했다. 시내 입구에서 갑자기 내리라고 한다. 그는 자기 집에 가는 중이었고 시내 쪽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우리는 되지도 않는 말을 해대며 시내까지 좀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제복을 입지 못해 시내에서 운전할 수 없다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갖고 있는 옷을 빌려주며 이것을 입고 가자고 졸라대니 그는 밝게 웃으며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가자며 근처 집으로 향했다.

그가 옷을 갈아입고 오는 동안 우리는 주변을 서성거리며 기다렸다. 마침 과일과 채소를 싣고 가는 자전거 행상이 지나가기에 오늘 저녁 식사에 필요한 양배추와 토마토를 헐값에 샀다(물론 우리나라 물가 기준으로). 고 원장이 주인에게 오늘 저녁은 우리가 차리겠다 하고 주인 식구들을 모두 초대한다고 이미 말을 해 놓았기 때문에 반찬거리가 필요했다. 말도 잘 통하지 않으면서 어쩜 그렇게 잘 초대하는지 모르겠다.

그 사이 기사가 제복을 입고 나왔다. 다시 차를 타고 우리가 원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우리가 돈을 주려하자 그는 비번이라 안 받는다고 했다. 와! 그러니까 비번은 일해서 돈을 벌면 안 되니까 봉사한 것이다. 우리는 그라씨아!를 반복하여 외쳤다. 쿠바에서 처음 겪은 좋은 모습이다. 달랑 자존심 때문에 그 고생을 하며 내려 왔으나 결국 돈 한 푼 안 들이고 택시를 타고 시내까지 들어온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시내를 활보하며 힘차게 숙소로 향했다.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서 먹으며 산티아고 데 쿠바 거리를 통과해서 돌아왔다.

고 원장의 첫 작품 돼지 소금구이

저녁에 필요한 돼지고기를 사려 했으나 주변에 정육점이 통 보이지 않는다. 말이 안 통하니 정육점이 어디 있는 지 물어 보기도 힘들다. 돼지 그림을 보여주고 어디서 파냐고 동네 아주머니들을 여기저기 붙잡고 물어 보니 식당을 가르쳐 준다. 식당에 가서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을 사먹으라는 것인지. 결국 포기하고 까사로 돌아가 그래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요안나에게 물어 사러 갔다.

요안나가 알려준 곳은 노천시장이었다. 아마 집에서 기른 채소며 닭이며 돼지 등을 도축해서 파는 것 같았다. 냉장고도 없이 되는대로 고기를 썰어서 노천 진열대에 놓고 팔고 있었다. 우리는 삼겹살에 해당되는 뱃살로 하기로 했다. 돼지고기가 너무 쌌다, 2kg에 4000원 정도 주었다. 아무리 싸도 그렇지 너무 많이 산 것 아니냐는 말에 인심 좋은 고 원장은 '남으면 주인 주지 뭘' 한다.

고 원장이 직접 요리하겠다고 주방에 들어간다. 아무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하며 혼자 다 준비했다. 돼지고기를 썰고 이것저것 분주하게 준비하는 것을 보니 집에서 많이 해본 솜씨이다. 나도 대학생 시절 자취를 해서 음식은 그런대로 만들었고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설거지는 나와 함께 사는 늦잠꾸러기 친구가 했지만. 결혼 후 그 좋아하는 주방의 권리를 아내에게 빼앗긴 이후로 30여 년간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 본적이 거의 없다. 라면은 자주 끓여 보았지만.

돼지고기를 우리식으로 소금구이 하고 밖에서 사온 토마토와  양배추를 잘라 풍성한 샐러드를 만들었다. 키 큰 나무 아래에 있는 뒤뜰 우리 방 바로 앞에 고물 탁자를 펴서 주인 식구와 함께 먹었다. 돼지가 토종이라 그런지 너무 맛있었다. 주인 식구는 요안나와 그의 어린 아들, 친정어머니 그리고 마침 그 때 들어온 남편까지 모두 4명이었다. 돼지 소금구이를 안주로 최고급 럼주 아바나 클럽 7년산 블랙 한 병을 모두 마시면서 대망의 출정식을 가졌다.

집은 친정어머니 소유이고 요안나의 남편은 인근 식당에서 주방장을 하고 있으니 그는 처갓집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유리창도 없고 모기향도 없는 방에는 모기가 극성이었다. 어떻게 하룻밤을 보냈는지. 하루 숙박비로 25세우세를 주었고 아침으로 3세우세 그리고 샌드위치와 청량음료 한 캔이 준비된 점심 도시락으로 2세우세 도합 1인당 5세우세를 추가로 지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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