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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바닥 치고서야 나, 당신 알았다

[서평] <여성불교> 주간 방남수 시인, 불심 이어주는 첫 시집 <보탕> 펴내

등록|2012.10.31 17:21 수정|2012.10.31 17:21

시인 방남수시인 방남수가 이번에 첫 시집 <보탕>(화남)을 펴냈다 ⓒ 이종찬

고향을 찾았습니다
살구나무 돌담 아래
우두커니 서서 사그라지는 하늘 쳐다보고 있었지요
한갓지게 쉬고 있는 당신을
문득 만난 날 그저 난
당신 이름 잠시 잊고
아우님께 저기, 이름이 뭐지?
보탕이잖아요, 보탕
아! 아! 그래 보탕
무릎을 탁, 친다

보탕이시여 당신은
비바람이거나 진눈깨비 하얗게 섞어 칠 때도
움푹 패인 몸으로
군불용 쏘시기로
생이 마감될 때까지
끝내 도끼날을 피할 수가 없었지요
아! 아! 오늘 난 당신을 본 순간
잊힌 세월 속 당신의 존재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생의 바닥 치고서야
나, 당신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 <보탕> 모두(93쪽)

1974년 도선사에 입산했다가 1982년 쌍계사에서 하산한 뒤 제약회사, 출판사 등에서 일했던 이가 있다. 지금은 서울 도선사에서 펴내는 잡지 <여성불교> 편집주간을 맡고 있는 시인 방남수가 그다. 그가 이번에 첫 시집 <보탕>(화남)을 펴냈다. 1993년 계간 <문예한국>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지 19년 만이다.

시인 방남수가 이번에 펴낸 첫 시집 <보탕>은 승과 속을 넘나들며 힘겹게 살아온 지난 시절에 묻어두었던 아프고도 간절한 시간들이 몸과 마음을 다독이는 염불처럼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마치 시와 불도는 다른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은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쌍둥이라는 듯이 그렇게.   

모두 5부로 나뉘어진 이 시집은 제1부 '숲속의 만찬', 제2부 '쌍계사에서', 제3부 '여적', 제4부 '곡속', 제5부 '보탕' 속에 59편에 이르는 시가 염주알처럼 매달려 있다. 그 염주알 같은 시들은 때론 때가 덕지덕지 묻은 이 세상을 향해 목탁을 두드리기도 하고, 때론 생로병사에 얽매여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이 세상 사람들을 마음에 연꽃 한 송이를 피우기도 한다.

<고드름> <충무로 골뱅이 집> <이끼> <간> <어깨론> <산속 절> <윤회> <붉은 봄> <봄날 같은 그대> <나비> <달> <삼각산사> <풍경 하나> <찰나> <그림자> <합죽선(合竹禪)> <108산사와 선묵 혜자> <바보가 말하기를> <물에게> <법정대종사님은 不在中(부재중)> <마라도에서 내 그리움은> <울진에서> <아버지 1·2> <사랑바위> 등이 그 시편들.

시인 방남수는 '시인의 말'에서 "나는 유년시절 매일 도량을 누비면서 길의 존재를 보았다"고 쓴다. 그는 "길! 나는 길을 좋아한다. 그 길을 떠나며 나는 열심히 살아보리라 다짐하곤 했다"며 "지천명을 훌쩍 넘기고 보니 유년시절 다짐했던 나와의 약속이 잘 지켜졌는지 모르겠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다.

그의 어깨는 홈이 패고 뼈가 솟아올랐다

시인 방남수 첫 시집 <보탕>모두 5부로 나뉘어진 이 시집은 제1부 ‘숲속의 만찬’, 제2부 ‘쌍계사에서’, 제3부 ‘여적’, 제4부 ‘곡속’, 제5부 ‘보탕’ 속에 59편에 이르는 시가 염주알로 매달려 있다 ⓒ 화남

그의 어깨는 많은 과거를 담고 있다
책보를 메고 책가방을 메고 지게를 메고 풀을 메고
따블백을 메고 배낭을 메고 서류 가방을 메고
어깨 위 수많은 물건 메고 오는 동안
홈이 패고 뼈가 솟아올랐다
평형을 잃고 왼쪽보다는 오른쪽 어깨가 더 많이
기울고 쳐져 있다

-<어깨론> 몇 토막(27쪽)

강원도 두메산골 울진(그때는 울진이 강원도였다. 박정희가 선거 때문에 경북으로 편입)에서 태어나 자란 시인이 이제 와서 어릴 때 '나와의 약속'을 끄집어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문학을 시작한지 19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렀고, 이제 와서 "첫 시집을 내려고 하니 새삼 걸어온 길에 충실했는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첫 시집을 내는 시인에게 또 하나 걱정이 따라붙는다. "이 땅에 수많은 시인들의 노래가 불리어지는데 과연 나의 졸작이 그 아름다운 노래에 견주어 불리어질 수 있을지" 때문이다. 시인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그친다. 이제는 "시 때문에 가슴앓이 하던 시절을 뒤로 한 채 이제 그 많은 모순덩어리를 하나씩 풀어"내야 하기에.

문학평론가 방민호(서울대 교수)는 이번 시집 해설 '연꽃을 구하는 마음'에서 "순수하고 투명한 방남수 시인의 시들은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들어내준다"며 "시인은 불교적인 세계인식에 바탕을 두면서 마치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깨끗한 시들을 우리들에게 선보인다, 날카로운 관찰력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통찰로 가벼움과 투명함을 충분히 보여준다"고 적었다.

문학평론가 유성호(한양대 교수)는 "방남수의 첫 시집에는 승속(僧俗)을 넘나들며 살아온 지난 시절의 아프고도 절절한, 그리고 침묵 너머의 침묵으로 발화하는 남다른 성장통(痛)이 아련하게 스며 있다"고 평한다. 그는 "요동치 않는 항심(恒心)에 그 옛적 초심(初心)까지 실어 펴내는 이 만산(晩産)의 시집이 그렇게 밝고도 은은한 역동성으로 출렁이고 있다"고 적었다.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말, 말, 말
세상에 말로 망한 사람 많다
옛말에 한마디 말로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했겠다
어떤 선생 군대비하 발언으로 텔레비전 출연금지 당하고
어떤 의원 성적비하 발언으로 탈당 당하고
어떤 의원 노래방에서 기자 껴안은 사건으로 출당 당하고
어떤 군수 계약직 여직원 누드모델 제의했다가 개망신
어떤 시장 약속했다가 지키지 못해 사퇴해야 하는 상황에
어떤 이는 대통령에게 말 잘못하여 이제 막 가자는 거지요, 라는 주의까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함부로 말하지 말자
말실수는 사람을 사지까지 내몰기도 한다
묵언이 최고다
그런데 이 묵언이 어려운 것을 어쩌란 말인가?

-<말> 모두(81쪽)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야말로 말홍수에 휩쓸리고 있다 해도 결코 빈 말이 아닐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말, 말, 말... 이 시를 읽으며 어떤 이들은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나?'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찬찬히 잘 읽어보시라.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말이 지닌 그 속내를 말로 파헤치고 있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말이란 자칫 잘못 내뱉으면 그야말로 개똥(?)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시인 말처럼 "묵언이 최고"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을 살면서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시인이 절간에서 오래 살아왔지만 묵언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인은 지금도 대학교 불교문예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 때문일까. 시인은 이번 첫 시집에서 절간 이야기를 유난히 많이 다루고 있다. "108번의 바느질로 가죽 두 쪽을 이어 / 번뇌를 날리고자 허공을 난다"(BaseBall)라거나, "약수터 오르는 군상들 / 한 움큼 물로 번뇌를 씻는다"(산속 절), "다시 오기 위해 잠시 자리 비울 뿐이라네"(윤회), "이승의 강을 건너는 꼬리에 / 흔들리며 가는 울음"(양파), "한라산 지리산 속리산 지나 / 여기 삼각산까지 오시는 / 부처님"(봄날 같은 그대), "능선을 넘어가는 / 객승이여"(나비), "대범종 소리에 / 나를 실어 보낸다"(삼각산사), "당신 몸속에 부처가 있다"(합장), "아침마다 / 부처를 여는 디딤돌"(디딤돌), "욕망과 해탈의 이중주 / 연꽃은 언제쯤 피어날 텐가"(여적), "법난에 맞서다 / 불의에 맞서다 / 식물인간이 된 스님"(혜성) 등 여러 시에서 승과 속을 잇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아픔이나 슬픔 따위 잘라내며 구르는 염주알

"사진 속 얼굴이 울고 있다 / 저 얼굴은 유명을 달리한지 / 십수 년이 되었다 / 평생을 울다 간 사람 / 평생을 독주와 살다 간 사람 / 평생을 바보처럼 살다 간 사람 / 담벼락에 나 뒹구는 빈 병과 / 보일러실로 둔갑한 뒤주 / 허물어져 가는 기와집 / 방치되어 땅 속 묻힌 우물 / 늙은 밤나무 / 해 건너 열매 무척 많이 열리는 뒤뜰 살구나무 / 저 건너 큰 평지 텅 빈 들판 농장엔 / 개망초 이리저리 / 몸체 흔들어 울고 있다 / 사진 속 그분이 울고만 있다 / 아니, 내가 운다 / 내가 술을 푸며 그분이 되어 울고 있다" - <아버지2> 모두(100쪽)

시인 방남수 첫 시집 <보탕>은 말 그대로 이 세상을 쪼개거나 이 세상살이가 주는 아픔이나 슬픔 따위를 잘라내며 구르는 염주알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사람들을 옭죄는 우리 사회에 불심이란 화두를 툭 던진다. 그 불심은 가을밤에 휘영청 떠오른 달, "처마 끝 매달린 // 또 하나의 정적 // 외로운 달 떨어지는 소리 // 부처가 돌아서서 우는 소리"가 되어 날마다 사리알로 빛난다.  

작가 현기영은 "동자승 닮아 둥근 그의 얼굴에는 늘 환한 웃음이 번져 있는데, 그처럼 그의 시들도 둥글고 환하다"고 콕 짚는다. 그는 "들끓는 욕망의 바다에 떠있는 해탈의 둥근 달 같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그의 시들에 나타난 둥글고 환한 사생관"이라며 "완전한 소멸은 없다고, 종말이 곧 시작, 환생이라는 그의 둥근 순환론이 내 마음을 안심시켜준다"고 평했다.

시인 오세영(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은 "굳이 선시(禪詩)라는 표현은 쓰지 않겠다. 선정(禪定) 속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향기가 배어 있는 까닭"이라고 쓴다. 그는 "아직 이승의 번뇌에 한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깨달음을 갈구하는 마음이 처연하게 아름답다"며 "불교적 서정이라는 말이 허락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시집의 정서가 그 같은 경우"라고 썼다.

작가 김영현(시인)은 "내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그가 있어 이토록 정결한 언어로 남몰래 시의 숲을 가꾸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문을 연다. 그는 "시장 바닥의 남루한 삶에서 수행승의 깊고 높은 마음까지 시의 몸을 빌려 풀어놓고 있었던 것"이라며 "언어의 현란함에 물들지 아니하고, 시의 수식에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할 수 있는 것은 방남수 만이 지닌 겸손과 그 세월의 힘"이라고 되짚었다.

시인 방남수는 1958년 울진에서 태어나 1974년 조계종 직할교구인 도선사에 입산하여 1982년 조계종 13교구 쌍계사에서 하산한 뒤 1993년 계간 <문예한국>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엮은 책으로 <뜰 앞에 잣나무>가 있으며, 공저 <58개띠들의 이야기>를 펴냈다. 지금 동방대학원 대학교 불교문예학과 박사과정에 있으며, 월간 <여성불교> 편집주간, 장안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문학in]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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