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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습에 항거한 여인 '테스'

등록|2012.11.01 16:38 수정|2012.11.01 16:38
"에인절, 에인절, 난 어린애였어요.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난 어린애였어요 ! 난 남자가 무엇인지도 몰랐어요."
"자기는 죄를 짓기보다 당한 거지. 그건 나도 인정해요."
"그럼 용서해 주지 않겠어요 ?"
"용서해요. 그러나 용서가 전부는 아니지." (토머스 하디 '테스, 순수한 여인' 중에서)

민음사에서 출간된 토머스 하디의 <테스, 순수한 여인>입니다. ⓒ 조은미

테스는 가난한 시골 행상의 집안에서 태어난 16살의 여자애입니다. 무능하고 술에 절어 사는 아버지와 아기들만 줄줄이 낳는 어머니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테스는 얼굴이 곱고 마음이 순박한 착한 처녀입니다. 그녀는 집안을 돕기 위해 친척집을 찾아가는데, 그 친척집의 아들 알렉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을 합니다.

테스가 낳은 소로우(Sorrow)라는 슬픈 이름을 가진 아기는 곧 병에 걸려 죽고, 테스는 혼자서 거친 농사일도 하고, 낙농가에서 젖짜는 일도 합니다. 그러다가 낙농가에서 만난 청년 에인절과 서로 사랑에 빠지고, 에인절의 집요한 구애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 첫날밤, 서로의 과거를 고백하자는 에인절의 말에 테스는 어렸을 때 유린당하고 아기까지 낳았던 일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에인절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굳어버립니다.

테스가 원해서 그런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에인절은 '무식한 농사꾼 여자'라는 비난까지 합니다. 그러자 테스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난 사회적 지위 때문에 농사꾼 여자이지, 천성 때문은 아니에요." (토머스 하디 '테스, 순수한 여인' 중에서)

토머스 하디가 1891년 <테스>를 출간했을 때, 당시 보수진영으로부터 심한 비난과 공격을 받았습니다. 하디는 외형적으로 처녀성을 잃은 테스를 진정으로 순결한 여인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제를 '순수한 여인'이라고 달았습니다.) 또한 그렇게 순수하고 고귀한 성품을 지닌 어린 소녀가 사회의 인습과 제도에 의해서 얼마나 처참한 비극을 겪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테스>는 원래 주간지에 연재를 하다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인 독자들에게는 테스가 강간당하는 장면이나, 한밤중에 자신의 아기에게 직접 세례를 주는 장면은 당시의 도덕적, 종교적 풍토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이 장면들은 대체되어 연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단행본에서는 다행스럽게 원래대로 실렸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그 경향이 좀 잦아들었지만, 지난 몇달간 각종 미디어에서는 성폭력과 관련된 크고 작은 기사들이 넘쳐났습니다. 언론들이 보도를 할 때 보수이건 진보이건 상관없이 선정적인 보도가 넘쳐났고, 여자로서 참으로 불편하고 더욱 마음아픈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피해자의 인권에 무딘 것은 성범죄 관련 법정만이 아니라 미디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이런 소식을 접하는 시민들의 마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성범죄 뉴스들이 넘쳐나던 몇달 전에 저는 마침 <테스>를 읽게 되었습니다. 교육받은 적도 없고 가난하기만 한 집안에서 자란 소녀였던 테스도, 그렇게 보수적인 19세기 영국 시골에서도 당당하게 성폭력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그녀는 양심적으로 선하게 살아왔으니 감출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습니다. 그런 테스의 모습을 보며, 독자들은 연민과 공감을 하게 됨은 물론입니다. 다시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비추어본다면, 성폭력을 당했을 때 수치심과 가해자의 협박이 두려워 자살을 하는 경우를 보고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자기가 일하던 피자집 사장에게 협박을 당하고 자살한 어느 여대생의 사건이 그렇습니다.

테스가 살던 19세기에는 순수하고 고귀한 여성이었던 테스가 결국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지만, 우리가 사는 21세기 대한민국은 양심적이고 선한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사회가 되야하지 않을까요.

테스는 자연 속에서는 한없이 평온함을 느꼈는데, 사회 공동체 안에서는 재단받고 낙인찍힌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인적이 없는 숲으로 들어가면 외로움도 느끼지 않았고 '살아있다는 불운이 최소한의 차원으로 축소되는 순간'을 느꼈습니다.

'그녀에게 어두움은 무서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속에 잇는 오직 한 가지 생각은 인간을 – 집단으로 뭉치면 그렇게 무서우면서도 하나의 단위 속에서는 그렇게 보잘것없고 불쌍하기까지 한, 세상이라 불리는 냉랭한 집합체를 – 어떻게 피하는가 하는 것 같았다. (토머스 하디 '테스, 순수한 여인' 중에서)

마침 대선도 멀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현란한 청사진이 넘쳐납니다. 저는 가난하고 힘없는 테스같은 사람들, 사회적으로 약자이지만 순수하고 고귀한 마음을 지닌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보호해주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대선 후보라면 기꺼이 한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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