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가진 자들의 불평등 구조 깨고 '시민'으로 거듭나야

[서평] 제프리 삭스의 <문명의 대가>

등록|2012.11.02 11:52 수정|2012.11.02 11:52

▲ <문명의 대가> 영어본 겉표지 ⓒ 박기용

이 시대 살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용기, 도전의식, 정직, 자신감, 우정, 겸손, 많은 것들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 계층간 이동과 관련해 점차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를 우리 시대 최대의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한다면 '공감능력'과 '측은지심' , 영어로 표현한다면 'empathy'와 'compassion'이 우리 모두의 키워드가 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사회적 성공은 자신만의 능력의 결과물이라는 착각과 자만감을 접고,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이웃과 끊임없이 교통하며,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에대한 안타까움과 자발적 도움이 우리 사회에 확산돼야한다고 말한다면,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의 잠꼬대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가 대기업에 대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거론하면 대기업,전경련 같은 기업단체,그리고 보수언론들은 한 목소리로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라고 딱잘라 말한다. 대기업에 대한 증세라도 거론되면, 경제의 활력을 망치는 무모한 발상이라는 힐난이 쏟아진다.마치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군중에 대해 수천년 묵은 경전을 꺼내들어 한 구절 한 구절 엄숙하게 읽어내려가며 가야할 길을 책망속에 제시하는 종교지도자의 모습같다.

돈이 어째 최종목적이 될 수 있느냐고, 일차적으로는 이윤이겠지만 그 이윤을 넘어 추구할 사회적 가치가 기업에도 있지 않느냐고 항변이라도 할라치면, '경제'의 기본을 모르면 입을 다물라는 전문가들의 힐난이 기다리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거시경제학자 제프리 삭스(Jeffrey D. Sachs) 의 최근 저작 <문명의 대가(The Price of Civilization)>는 일반인들이 대기업이나 부자들에 대해 느끼는 불편한 기본 정서-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대기업의 책임의식 방기-가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든든하고 확실한 우군을 만난 반가움이 있다. 제프리 삭스의 저작에 대해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을 모르는 좌파적 시각이라고 일축하는 경제전문가가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효율성, 공정성, 지속 가능성... 제프리 삭스가 말하는 경제의 세 가지 목표

제프리 삭스는 미국 하버드 대학을 나와 하버드 경제학 교수를 지내다가 지금은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교수 겸 '지구연구소' (Earth Institute) 소장을 맡고 있다. 삭스는 '지구연구소'를 통해 활발한 학제적 (interdisciplinary)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 책도 그러한 작업의 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제프리 삭스가 주장하는 경제의 세가지 목표는 경제적 번영을 위한 '효율성',기회의 '공정성',안전한 환경을 유지하는 '지속가능성'. 그는 이 책에서 이 세가지 키워드를 기본 재료로 다양한 예화와 팩트,학문적 논리 위에서 자신만의 거대한 문명진단 벽화를 펼쳐 보인다.

이제 제프리 삭스가 시대의 자화상으로 구성한 벽화를 구석구석 들여다보자. 삭스는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경제적 위기의 뿌리에는 도덕적 위기, 즉 정치 경제 엘리트들의 시민적 미덕 (civic virtue )의 쇠락이 자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부정직은 전염성이 강한 사회적 질병과도 같아서  '사회적 면역체계'가 심각하게 손상됐다는 것이다.

삭스에 따르면, 문명이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중적인 시민의식이 지불하는 가격에 의해 유지되는 것인데, 현재 미국사회는 미디어 특히 티비가 주도하는 소비주의에 의해 심하게 뒤틀려있어서 시민의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물질적 부를 향한 무한 추구와 소비는 결국 삶의 행복과 미덕을 가져다주기보다는 탐닉과 충동을 초래할 뿐이며 좋은 사회의 양대 기둥은 절제와 측은지심 (moderation and com-passion) 이라는 저자의 진단을 대하면서, 새로운 가치관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야겠다는 다짐이 우리 모두에게 공유되기를 기원한다.

폴 세뮤얼슨의 계승자, 제프리 삭스... "경제를 시장에만 맡겨선 안 돼"

삭스는 아울러 미국사회 전반에 걸친 자신의 정치경제학적 진단이 철학적 사유적 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을 둔 사회과학임을 입증하려는 듯, 지난 수십년간 정부의 경제운용방식의 문제점을 탁월하고도 간결한 경제학으로 분석해낸다.

삭스는 미국 최초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의 학문적 후계자임을 자처한다.  시장의 힘과 정부의 행동이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봤던 새뮤얼슨은 정부가 해야 할 세 가지 본질적 역할을 강조했다. 가난하거나 불운한 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부의 재분배, 사회간접자본과 과학연구를 위한 공공재 제공, 거시경제의 안정.

그런데 미국이 70년대 유가폭등 속에서 경제는 침체되는 이른바 스테그플레이션(stagnation + inflation) 을 겪으면서 폴 새뮤얼슨의 경제이론이 퇴조하고, 시장의 자율성을 강조한 경제학파가 등장했다.

경제분야에 대한 정부의 역할에 회의감을 표시하면서 시장기능을 강조한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예크가 주류학파로 떠오르고 이러한 경제이론을 현실정치에 접목한 정치세력-미국의 레이건, 영국의 대처-이 구축한 경제운용방식이 지금까지 30 ,40 여년간 미국을 지배했다는 것이 삭스의 분석이다.

미국의 경우 레이건을 거쳐 클린턴과 오바마 등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지만 부유층에 대한 조세감면과 기업규제완화 등 시장의 탐욕을 부추기는 정책에서는 공화당과 차별성이 없었다고 질책한다. 대공황을 수습한 루즈벨트 식 정부의 강한 역할은 온데 간데 없고 민주,공화 양당 모두 가진자에게는 굽신거리면서 없는 자를 쥐어짜는 점에서는 당파성을 초월했다고 (bipartisan) 조소를 보낸다.

극단적 자유시장주의자들의 주장은 '거대한 환상'일 뿐

▲ 제프리삭스를 '임상경제학자' , 응급실 금융닥터라고 소개한 글이 흥미롭다. ⓒ 박기용


개인은 사회에 대한 어떤 책임감도 가질 필요 없으며, 정부의 역할은 법과 질서를 지키고 개인재산을 보호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시장의 자유와 자발적 사적 계약에 의해 사회가 지배돼야 한다는 극단적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삭스는 '거대한 환상'이라고 일축한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시장의 효율성은 사회적 공평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공정성을 진작함으로써 경제적 효율성도 동시에 높아진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예컨대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인 하이예크나 프리드먼도 자연환경을 보호하기위한 시민적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더 나아가 자본의 힘에 휘둘리는 민주주의와 경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일반 대중들이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저자는 경제에 대한 미국정부의 리더십이 정점에 도달했던 시기를 60년대 중반이라고 회상한다. 케네디가 암살되고 그 뒤를 이어 집권한 린든 존슨 시대에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회적 법안들이 마련됐다. 1965년 한 해만 해도 투표권, 초중고등 교육, 수질 관리, 대학교육, 고형폐기물 처리, 자동차에 의한 대기가스 오염방지, 담배광고 규제와 관련한 법안들이 대규모로 의회에서 통과됐다.

저자가 미국경제와 사회전반에 걸쳐 강한 비판을 쏟아내면서도 비관주의에 함몰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과거 미국의 영화이다. 망가진 현실을 일으켜 세울 역사적 모델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과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다. 미래로 나아가는 동력이 될 과거의 모범이 부재한 한국. 경제의 활력과 양극화 해소라는 십자가를 양쪽 어깨에 둘러맨 한국사회는 문제해결을 위한 보다 큰 정치사회적 '집중'이 필요하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제프리 삭스는 미국 정당시스템의 취약성을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지난 번 미 대선 국면에서 세 차례 열린 티비 토론에서 '빈곤', '가난하다'라는 말이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면서, 미국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고 한탄한다. 미국의 민주, 공화 양당 모두 중도우파라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정치시스템은 진정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며, 두 개의 강력한 정당이 오랜 세월 안정적으로 지배하는 양자독점(duopoly)이라고 규정한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대선국면에 접어든 한국사회도 비슷한 고민이 아닐까? 형식상 여야로 나뉘어있고 어떤 정당과 후보를 선택해야 하나 고민하지만 결국 '한 주인이 낸 두 가게'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

비례대표시스템을 채택한 유럽에서는 중도좌파 정당에 의해 또는 모든 정당에서 일정 정도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는 기능이 존재하지만 , 지역구에서 단 한 명을 뽑는 미국의 선거시스템은 지역구의 주요 산업과 부유한 유권자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는 사회적 약자 배제한 중도우파 양당의 독점

저자는 책 곳곳에서 가진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또한 동시에 이른바 중산층, 일반 대중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사람들이 미디어가 부추긴 과도한 소비주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추구, 이기적 욕망에 함몰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자기 비하적 열등감으로 전화될 위험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빠져나와 측은지심과 상호부조, 집단적 의사결정을 이루는 사회를 만들자고 저자는 촉구하고 있다. 분배정의와 연대감, 상호존중의 핵심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우선 대중의 각성이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충분히 공감할 만한 현대문명진단이 아닐 수 없다.

다시 구체적 경제지표를 통해 현 경제상황을 진단해보자. 미국의 재정적자는 3년 뒤인 2015년에 GDP의 75%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전시가 아닌 평시의 재정적자규모로는 유례가 없는 일인데, 저자는 이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예산삭감과 증세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금을 올린다는 것은 누구나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산삭감만으로 재정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에 솔깃해지지만, 저자는 예산사용상의 막대한 낭비가 있기 때문에 이를 줄이면 된다는 개념은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현재 미국의 상위 1%는 미국 전체 가계소득의 21%, GDP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과거에 비해 부의 독점현상이 심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 고소득층의 소득세율은 지난 70년 47%에서 현재 31%로 낮아졌다. 소득은 커졌는데 세금은 오히려 줄어든 셈이다.저자는 고소득층에 대한 소득세율을 올리고 부유세를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법인세도 대폭 손질을 해야한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법인세 감면조항이 많고 '텍스 헤이븐' 조세회피국가로 기업이익을 이전하는 사례가 증가하는 등 법인세 체계에 허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지난 60년 법인세 징수실적이 GDP의 3.5%였으나 지금은 1.5% 수준이다.

한국기업도 실효법인세율이 전 세계 최하위권이다. 명목세율은 22%이지만 기업의 실제부담은 18%수준이다. 이는 중국, 홍콩, 싱가포르보다 낮고 일본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한국도 경제활성화와 양극화 해소를 위해 고소득층과 기업에 대한 소득세, 법인세 세율인상이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

예산삭감만으로는 국가재정문제 해결 못해... 고소득층 증세 불가피

제프리 삭스는 가진자들, 대기업의 끝없는 탐욕과 이들에 대한 편들기로 일관하는 정부를 질책하면서, 섬뜩하게도 세 개의 숫자를 나열한다.

1914, 1917,1933

1914년은 1차 세계대전, 1917년은 러시아의 시월혁명, 그리고 1933년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을 말한다.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낡고 가혹한 현재의 경제시스템을 전면 재정비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우리 앞에 기다릴지 알 수 없다는 저자의 묵시록적 경고에 다름 아니다.

끝으로 제프리 삭스는 미국사회 가진자들의 절제되지 않는 이기심을 설득력있는 지표로 개탄한다. 미국의 보수적우파들은 입만 열면 저소득층의 근로의욕 부족, 과도한 복지예산을 거론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부지출은 그야말로 코끼리 비스켓이다.

예를 들어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세 환급액은 전체 GDP 의 0.3 % 에 불과하며 일시적 긴급구호예산 또한 GDP 의 0.2 % 라는 것이다. 복지예산의 대부분은 백인중산층, 심지어 티파티도 지지하는 메디케어 - 노인층을 위한 의료복지 - 와  퇴직연금 (social security)이다. 정말로 가난한 자에게 지급되는 복지예산의 비중이 아주 미미한 수준에 불과한데 마치 이것이 경제에 주름살을 주는 것처럼 억지를 편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따라서 저자는 과학적 근거없이 예산삭감만을 주장하지 말고 가진자와 기업에 대한 세금을 올림으로써 재정불균형을 해소하라고 주문한다. 단순한 선전선동이 아니라 꼼꼼한 데이터 분석에 의해 건져올린 제안이라는 점에서 제프리삭스의 정치경제학은 시대의 진전을 가로막는 낡은 세력들의 허구를 깨고 나가는 도구로 유용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양극화를 해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데 필요한 논리적 나침반을 장착하기를 기대한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