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국가 이란에 유대교 우대책이 있는 이유
[세계문명기행II : 페르시아 문명⑧] '세계의 절반' 이스파한에 입성하다
야즈드에서 이스파한은 육로로 35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우리 탐사단은 또다시 사막을 가로질러 고도 이스파한으로 향하는 길을 재촉하였다.
이스파한은 한 마디로 '페르시아의 진주'라 불린다. 아마도 이란을 여행하면서 가장 볼거리가 많은 도시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도시는 16세기 사파비 왕조의 왕도가 되기까지 특별히 역사적으로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았다.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사파비 왕조에서 최대 번성기를 가져온 압바스왕이다. 그는 수도를 카즈빈에서 이곳으로 옮긴 다음 대대적인 도시 가꾸기에 나선다.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이맘 모스크를 만든 것도 그의 집념에 의한 것이었다. 얼마나 도시가 번성했으면 서구인들이 그 당시 이 도시의 별칭으로 '세계의 절반'(네스페 자한)이라 하였을까.
이스파한의 세계문화유산인 이맘 모스크
우리 탐사단은 이스파한에 도착하자마자 이맘 모스크로 향했다. 남북 길이 500여 미터, 동서 길이 160여 미터의 거대한 장방형 광장이다(자료에 의하면 이 광장은 천안문 광장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함). 광장에 들어서면 남쪽 끝에 이맘 모스크, 동쪽 중앙 변에 샤이흐 로트폴라 모스크, 서쪽 중앙 변에 알리 카푸 궁, 북쪽 끝에는 게이사리예 바자르가 광장에 붙어 있다. 그리고 광장의 남북 끄트머리 부분에는 돌 골대가 박혀 있는데 이것은 과거 사파비 왕조 시절에 이 광장이 폴로 광장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광장을 전체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은 수많은 기념품 가게를 비롯한 바자르다. 광장에 면해 있는 가게는 대개 기념품 가게이고 그 배후로 들어가면 약 50여 미터 간격으로 품목이 바뀐다. 수많은 견과류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가 하면, 다음으로 가죽 제품 가게로 이어지고, 또 신발가게로 이어지는 식이다.
아쉽게도 우리가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반. 이미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때였는데, 이맘 모스크는 굳게 잠겨 있었다. 경비병이 있어 잠시만 들어가자고 해도 절대 안 된다고 한다. 이를 어쩌나! 다음 날은 이슬람 역일상 휴일인 금요일이고, 모스크에는 외국인의 출입이 금해지는데…. 이스파한의 세계문화유산인 이맘 모스크를 보지 못하고 이스파한을 떠나게 되어 있으니,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실컷 바깥에서 넘어가는 마지막 햇빛에 의존하여 연신 사진만 찍어 댈 수밖에.
하지만 비록 이 모스크의 내부는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모스크에 얽힌 이야기는 하고 가자.
이 모스크는 사파비 왕조의 최번성기를 이끈 압바스왕에 의해 건립되었다. 그는 살아생전 이 모스크를 보기 위해 상당히 마음이 조급했던 모양이었다. 이 공사를 책임진 알리 아크바르 이스파니에게 조속한 완공을 명하였으나 1611년 착공한 이 공사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스파니는 왕의 명령에도 원칙에 입각한 공사를 진행하였다. 참을 수 없었던 왕은 급기야는 이스파니의 세 아들 중 둘을 죽이고 마지막 아들의 눈을 뺀다. 그럼에도 이스파니는 공사를 서두르지 않았다.
결국 이 공사는 압바스왕이 죽은 다음 해에 완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왕의 서두름 때문인지 이 모스크의 공법은 다른 모스크에 비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공법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모스크 바깥에 붙인 수많은 세라믹 타일은 다른 모스크에서는 하나하나 조각을 붙였지만 이곳에서는 이를 빨리 붙일 수 방법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모자이크 판을 미리 만들어 여러 장의 타일을 한꺼번에 붙여 벽면에 붙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유창한 영어를 하는 차도르의 여인
밤이 되었다. 이란에 와서 처음으로 여유로운 밤을 맞이한다. 우리 일행은 저녁을 먹고 이스파한의 밤을 즐기기 위해 자얀데강으로 갔다. 이 강은 이스파한을 두 구역으로 나누고 있다. 10세기까지 이 강을 끼고 페르시아인들과 유대인들이 각각 거주하였다고 한다.
강에 도착하니 아름다운 다리 하나가 보인다. 시오세폴 다리다. 33개의 아치가 있는 이층 다리다. 1층은 보로 사용하고 2층은 보행자 전용도로다. 은은한 불빛이 마치 체코 프라하에서 본 찰스 다리를 보는 듯하다. 이 다리가 바로 사파비 왕조에 만든 다리라니.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 만든 다리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옌다강을 잇는 다리 11개 중 5개가 사파비 왕조 때 건설된 것이라고 한다).
1층에는 아담한 찻집이 있다. 이란의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휴일 전일의 여유로움을 달래고 있다. 가끔 여성들도 보이는데 이들의 차도르는 다른 곳에서 보는 것보다 자유스럽다.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이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나는 다정하게 지나가는 한 남녀를 불러 몇 마디 영어로 물어보았다. 지적으로 생긴 그 여성은 예상외로 유창한 영어로 답을 한다. 그리고 나에게 이스파한에 대한 인상이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어떻게 영어를 이렇게 잘하느냐고 물어보니 그녀는 웃으며 자기는 영어 선생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면 그렇지.
이번 여행에서 재미있는 것이었지만 의외로 이란의 젊은 학생들이 씩씩하고 용감하다는 사실이다. 외국인에 대하여 어려워하지 않고 한 마디라도 영어로 물어보려는 의지가 강했다. 아무리 미국과 사이는 좋지 않아도 영어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는 모양이다.
기독교와 공존하는 이스파한
다음 날(2월 8일) 아침 우리 탐사단은 우선 아르메니아인들의 기독교 교회인 반크 교회로 향했다. 반크 교회를 이야기하기 전에 아르메니아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이곳 이스파한에 있는 이유를 설명해야겠다.
사파비 왕조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다. 이때 이를 구제한 이가 압바스 왕이다. 그는 카스피해 연안의 졸파지역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이스파한으로 집단적으로 이주시키고 거주지역을 그들이 온 곳을 따서 졸파라 이름을 붙였다. 17세기 초의 일이다. 이렇게 들어 온 아르메니아인들은 집단 거주지를 만들고 그들의 종교인 그리스 정교를 신봉한다.
이들은 손재주가 좋아 이스파한에 많은 조형물과 예술품을 남겼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교회 중의 하나가 반크 교회이다. 반크 교회의 앞마당에는 초기 이주 과정에서 큰 업적을 남긴 카챠투르(1590~1646)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성경을 아르메니아어로 옮긴 사람이며 유럽식 인쇄기계를 처음으로 개발한 소위 이란의 구텐베르크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반크 교회를 들어서면서 교회 전체를 보면 기독교와 이슬람의 절묘한 조화임을 알 수 있다. 교회에는 모스크에서 볼 수 있는 돔 양식을 볼 수 있으나 돔의 끝에는 십자가가 달려 있다. 이 두 종교가 앙숙이 되어 피를 흘리는 현대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고로 이란의 종교에 대하여 한마디만 하자. 이란은 엄격한 시아파 이슬람 국가이지만 적어도 몇 개의 종교에 대해서는 그 신봉의 자유를 인정하고 특별한 대우까지 한다(예를 들면 국회의 의석 배분에서도 이들 종교 신봉자를 위한 특별 배려가 있음). 이들 종교가 바로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및 기독교(그리스 정교)다. 이들 종교를 이란이 특별히 존중하는 것은 역사적인 특수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앞서 본대로 페르시아에서 탄생하여 타 종교에 영향을 준 역사적 종교이고, 유대교는 이미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 키루스 대왕이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포로로 와 있는 유대인들을 해방시킨 역사적 관련성이 있는 종교이다. 그리고 그리스 정교의 경우는 바로 위에서 본 사파비 왕조 시절 아르메니아인을 보호한 압바스 왕의 정책과 관련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교회 내로 들어가면 크게 두 곳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본당 건물이다. 이곳에 들어가면 천장과 벽면 전체가 화려한 프레스코 그림으로 차 있다. 모두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를 시대순으로 그려 놓았다.
언뜻 보아도 바로 알 수 있는 '최후의 심판', '바벨탑', '예수의 탄생', '예수의 12제자상' 등이 눈에 띈다. 원래 프레스코 회화는 유화에 비하여 내구성이 짧은데 이곳은 건조한 기후를 가지고 있어 유럽의 프레스코화보다 훨씬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300년이 넘은 그림이건만 그림의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아르메니아인의 수난 기록
다음으로 가보아야 할 곳이 교회 내의 박물관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이곳에 이주하여 이루어 놓은 예술품을 진열하여 놓았다. 특히 볼만한 것은 어느 여인의 머리카락에 새겨 놓은 글자이다. 지름 0.1밀리미터, 길이 7밀리미터의 머리카락에 성경의 한 구절을 써놓았다고 하는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신기에 가까운 손재주와 섬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박물관에서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전시품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집단살해에 대한 기록이다. 1915년 터키는 150만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적으로 학살한다. 이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박물관 한편에 있다. 이것을 보다 보면 시간은 지났지만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는 반인도적 범죄에 다시금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박물관을 만들어 후대들이 이런 참상을 목격하게 하는 것이 하나의 예방책이 될 수 있으리라. 용서하되 결코 잊을 수 없는 과거사. 이것은 비단 아르메니아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근세사에서 경험하였던 뼈아픈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이스파한은 한 마디로 '페르시아의 진주'라 불린다. 아마도 이란을 여행하면서 가장 볼거리가 많은 도시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도시는 16세기 사파비 왕조의 왕도가 되기까지 특별히 역사적으로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았다.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사파비 왕조에서 최대 번성기를 가져온 압바스왕이다. 그는 수도를 카즈빈에서 이곳으로 옮긴 다음 대대적인 도시 가꾸기에 나선다.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이맘 모스크를 만든 것도 그의 집념에 의한 것이었다. 얼마나 도시가 번성했으면 서구인들이 그 당시 이 도시의 별칭으로 '세계의 절반'(네스페 자한)이라 하였을까.
이스파한의 세계문화유산인 이맘 모스크
▲ 이맘 광장에 황혼이 깃든다, 정면에 이맘 모스크가 보인다. ⓒ 박찬운
우리 탐사단은 이스파한에 도착하자마자 이맘 모스크로 향했다. 남북 길이 500여 미터, 동서 길이 160여 미터의 거대한 장방형 광장이다(자료에 의하면 이 광장은 천안문 광장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함). 광장에 들어서면 남쪽 끝에 이맘 모스크, 동쪽 중앙 변에 샤이흐 로트폴라 모스크, 서쪽 중앙 변에 알리 카푸 궁, 북쪽 끝에는 게이사리예 바자르가 광장에 붙어 있다. 그리고 광장의 남북 끄트머리 부분에는 돌 골대가 박혀 있는데 이것은 과거 사파비 왕조 시절에 이 광장이 폴로 광장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광장을 전체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은 수많은 기념품 가게를 비롯한 바자르다. 광장에 면해 있는 가게는 대개 기념품 가게이고 그 배후로 들어가면 약 50여 미터 간격으로 품목이 바뀐다. 수많은 견과류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가 하면, 다음으로 가죽 제품 가게로 이어지고, 또 신발가게로 이어지는 식이다.
아쉽게도 우리가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반. 이미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때였는데, 이맘 모스크는 굳게 잠겨 있었다. 경비병이 있어 잠시만 들어가자고 해도 절대 안 된다고 한다. 이를 어쩌나! 다음 날은 이슬람 역일상 휴일인 금요일이고, 모스크에는 외국인의 출입이 금해지는데…. 이스파한의 세계문화유산인 이맘 모스크를 보지 못하고 이스파한을 떠나게 되어 있으니,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실컷 바깥에서 넘어가는 마지막 햇빛에 의존하여 연신 사진만 찍어 댈 수밖에.
하지만 비록 이 모스크의 내부는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모스크에 얽힌 이야기는 하고 가자.
이 모스크는 사파비 왕조의 최번성기를 이끈 압바스왕에 의해 건립되었다. 그는 살아생전 이 모스크를 보기 위해 상당히 마음이 조급했던 모양이었다. 이 공사를 책임진 알리 아크바르 이스파니에게 조속한 완공을 명하였으나 1611년 착공한 이 공사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스파니는 왕의 명령에도 원칙에 입각한 공사를 진행하였다. 참을 수 없었던 왕은 급기야는 이스파니의 세 아들 중 둘을 죽이고 마지막 아들의 눈을 뺀다. 그럼에도 이스파니는 공사를 서두르지 않았다.
결국 이 공사는 압바스왕이 죽은 다음 해에 완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왕의 서두름 때문인지 이 모스크의 공법은 다른 모스크에 비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공법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모스크 바깥에 붙인 수많은 세라믹 타일은 다른 모스크에서는 하나하나 조각을 붙였지만 이곳에서는 이를 빨리 붙일 수 방법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모자이크 판을 미리 만들어 여러 장의 타일을 한꺼번에 붙여 벽면에 붙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유창한 영어를 하는 차도르의 여인
▲ 시오세 폴 다리, 밤 풍경이 매우 고혹스럽다. ⓒ 박찬운
밤이 되었다. 이란에 와서 처음으로 여유로운 밤을 맞이한다. 우리 일행은 저녁을 먹고 이스파한의 밤을 즐기기 위해 자얀데강으로 갔다. 이 강은 이스파한을 두 구역으로 나누고 있다. 10세기까지 이 강을 끼고 페르시아인들과 유대인들이 각각 거주하였다고 한다.
강에 도착하니 아름다운 다리 하나가 보인다. 시오세폴 다리다. 33개의 아치가 있는 이층 다리다. 1층은 보로 사용하고 2층은 보행자 전용도로다. 은은한 불빛이 마치 체코 프라하에서 본 찰스 다리를 보는 듯하다. 이 다리가 바로 사파비 왕조에 만든 다리라니.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 만든 다리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옌다강을 잇는 다리 11개 중 5개가 사파비 왕조 때 건설된 것이라고 한다).
▲ 시오세 폴 다리와 다리 카페에서 여유로움을 즐기는 이스파한의 시민들. ⓒ 박찬운
1층에는 아담한 찻집이 있다. 이란의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휴일 전일의 여유로움을 달래고 있다. 가끔 여성들도 보이는데 이들의 차도르는 다른 곳에서 보는 것보다 자유스럽다.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이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나는 다정하게 지나가는 한 남녀를 불러 몇 마디 영어로 물어보았다. 지적으로 생긴 그 여성은 예상외로 유창한 영어로 답을 한다. 그리고 나에게 이스파한에 대한 인상이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어떻게 영어를 이렇게 잘하느냐고 물어보니 그녀는 웃으며 자기는 영어 선생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면 그렇지.
이번 여행에서 재미있는 것이었지만 의외로 이란의 젊은 학생들이 씩씩하고 용감하다는 사실이다. 외국인에 대하여 어려워하지 않고 한 마디라도 영어로 물어보려는 의지가 강했다. 아무리 미국과 사이는 좋지 않아도 영어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는 모양이다.
기독교와 공존하는 이스파한
▲ 아르메니아인들의 교회 반크 교회, 돔 위에 십자가가 보인다. ⓒ 박찬운
다음 날(2월 8일) 아침 우리 탐사단은 우선 아르메니아인들의 기독교 교회인 반크 교회로 향했다. 반크 교회를 이야기하기 전에 아르메니아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이곳 이스파한에 있는 이유를 설명해야겠다.
사파비 왕조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다. 이때 이를 구제한 이가 압바스 왕이다. 그는 카스피해 연안의 졸파지역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이스파한으로 집단적으로 이주시키고 거주지역을 그들이 온 곳을 따서 졸파라 이름을 붙였다. 17세기 초의 일이다. 이렇게 들어 온 아르메니아인들은 집단 거주지를 만들고 그들의 종교인 그리스 정교를 신봉한다.
이들은 손재주가 좋아 이스파한에 많은 조형물과 예술품을 남겼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교회 중의 하나가 반크 교회이다. 반크 교회의 앞마당에는 초기 이주 과정에서 큰 업적을 남긴 카챠투르(1590~1646)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이란의 구텐베르크, 카챠투르. ⓒ 박찬운
그는 성경을 아르메니아어로 옮긴 사람이며 유럽식 인쇄기계를 처음으로 개발한 소위 이란의 구텐베르크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반크 교회를 들어서면서 교회 전체를 보면 기독교와 이슬람의 절묘한 조화임을 알 수 있다. 교회에는 모스크에서 볼 수 있는 돔 양식을 볼 수 있으나 돔의 끝에는 십자가가 달려 있다. 이 두 종교가 앙숙이 되어 피를 흘리는 현대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고로 이란의 종교에 대하여 한마디만 하자. 이란은 엄격한 시아파 이슬람 국가이지만 적어도 몇 개의 종교에 대해서는 그 신봉의 자유를 인정하고 특별한 대우까지 한다(예를 들면 국회의 의석 배분에서도 이들 종교 신봉자를 위한 특별 배려가 있음). 이들 종교가 바로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및 기독교(그리스 정교)다. 이들 종교를 이란이 특별히 존중하는 것은 역사적인 특수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앞서 본대로 페르시아에서 탄생하여 타 종교에 영향을 준 역사적 종교이고, 유대교는 이미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 키루스 대왕이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포로로 와 있는 유대인들을 해방시킨 역사적 관련성이 있는 종교이다. 그리고 그리스 정교의 경우는 바로 위에서 본 사파비 왕조 시절 아르메니아인을 보호한 압바스 왕의 정책과 관련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교회 내로 들어가면 크게 두 곳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본당 건물이다. 이곳에 들어가면 천장과 벽면 전체가 화려한 프레스코 그림으로 차 있다. 모두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를 시대순으로 그려 놓았다.
언뜻 보아도 바로 알 수 있는 '최후의 심판', '바벨탑', '예수의 탄생', '예수의 12제자상' 등이 눈에 띈다. 원래 프레스코 회화는 유화에 비하여 내구성이 짧은데 이곳은 건조한 기후를 가지고 있어 유럽의 프레스코화보다 훨씬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300년이 넘은 그림이건만 그림의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아르메니아인의 수난 기록
다음으로 가보아야 할 곳이 교회 내의 박물관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이곳에 이주하여 이루어 놓은 예술품을 진열하여 놓았다. 특히 볼만한 것은 어느 여인의 머리카락에 새겨 놓은 글자이다. 지름 0.1밀리미터, 길이 7밀리미터의 머리카락에 성경의 한 구절을 써놓았다고 하는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신기에 가까운 손재주와 섬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박물관에서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전시품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집단살해에 대한 기록이다. 1915년 터키는 150만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적으로 학살한다. 이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박물관 한편에 있다. 이것을 보다 보면 시간은 지났지만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는 반인도적 범죄에 다시금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박물관을 만들어 후대들이 이런 참상을 목격하게 하는 것이 하나의 예방책이 될 수 있으리라. 용서하되 결코 잊을 수 없는 과거사. 이것은 비단 아르메니아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근세사에서 경험하였던 뼈아픈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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