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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옆 대나무숲, 이것만 있었더라면...

행복한 노동을 꿈꾸는 출판노동자들이 만든 책 <출판노동자 가이드북>

등록|2012.11.14 18:35 수정|2012.11.14 18:35
출판사에 입사한 지 한 달이 채 안 되는 어느 날이었다. 회사 분위기가 이상했다. 다들 뭔가를 쉬쉬하며 눈치만 보고들 있었다. 퇴근할 때가 되어서야 알았다. 수습평가를 앞둔 수습사원 한 명이 해고를 당한 것이다. 퇴근하고 근처 카페에 몇몇 직원들이 모였다. 각자 아는 노무사나 변호사, 노동운동가들에게 조언을 구해 보지만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회사에 따져도 봤지만 대표이사는 해고가 아니라 계약해지라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만 댔다. 우리는 무력했다. 아무 것도 몰랐다.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도, 회사의 부당한 결정에 맞설 방법도. 하다못해 그런 상황에서 쫓겨나는 노동자가 챙길 수 있는 권리가 어떤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폭파된 '출판사 옆 대나무 숲' 트위터 계정엔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 이보다 더 한 이야기들이 무성하게 올라왔다. 그 노동자들도 나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법으로 보장된 우리 노동자들의 권리가 무엇이고, 혹은 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싸워서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은 무엇이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싸울 수 있을지 몰랐다.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판계에 이직이 잦은 이유가 젊은이들이 끈기가 없어서라고 생각하는 '꼰대'들은 넘쳤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너 혼자만 힘든 게 아니라며 위로랍시고 해대는 멘토들은 넘쳤지만, 편집자란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알려 주는 책도 여러 권 있었지만, 아무도 우리가 출판노동자로서 어떤 권리를 가지는지, 그 권리를 스스로 찾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어쩌겠나,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지.

목마른 출판노동자들이 직접 판 우물 <출판노동자 가이드북>

<출판노동자 가이드북> 표지출판노동자들의 권리를 출판노동자들이 직접 이야기 한 책 <출판노동자 가이드북> ⓒ 언론노조 출판협의회

<출판노동자 가이드북>(언론노조 출판협의회 펴냄)은 목마른 출판노동자들이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은 출판노동자들의 권리를 직접 이야기한 책이다. '근로계약서가 무엇이고, 그것은 왜 반드시 써야 하고, 어떤 내용으로 써야 하는지', '법에서 정한 근로시간과 휴식시간, 그리고 휴일의 정확한 정의가 무엇인지', '퇴직금을 법에 따라 잘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같은 출판노동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들을 담았다.

근로기준법을 들여다보면 참 어려운 표현들이 많은데, 이 가이드북은 출판노동자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썼기 때문에 쉽게 읽힌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일들, 혹은 내 옆에서 일어난 일들을 동료들의 입을 통해서 듣는 기분이랄까.

요즘 정규직 전환을 조건으로 건 계약직 모집 공고가 꽤 많다. 이렇게 채용된 경우라 해도 해고 요건이 다소 완화된 것일 뿐, '30일 이전에 해고 예고를 해야 한다. 그러지 못했을 경우 30일분의 통상임금을 줘야 한다'는 것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
- <출판노동자 가이드북> 19쪽

위에서 예로 든 수습사원 말고도 내가 회사를 다니는 동안 두 명이나 더 수습을 마치고 해고당했다. 그 수습사원들을 생각하면 무척 속상하다. 이 가이드북이 있었다면, 수습사원이 쫓겨나는 것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통상임금 30일분을 챙겨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출판노동자들이 <출판노동자 가이드북> 곳곳을 보면서 나와 비슷한 아쉬움을 가질 것이다.

'근로계약서를 이렇게 썼어야 했어.'
'사실은 해고당했는데 괜히 내 손으로 사표를 써서 실업수당도 못 받았지 뭐야.'
'퇴직금은 연봉에 포함된 건 줄 알았는데 그거 불법이었구나. 나 퇴직금 받을 수 있었던 거네.'

<출판노동자 가이드북> 개정판 작업을 할 날을 꿈꾸며

물론 이 책이 출판노동자들이 겪는 모든 고충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혹은 그런 답이 다 적혀 있는 매뉴얼이라도 하더라도, 현실에서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된다. 당장 야근수당 문제만 생각해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출판계에 만연한 야근. 하지만 야근수당을 법대로 지급하는 회사는 다섯 손가락을 못 채운다. 야근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게 근로기준법 위반이라는 것을 회사도 노동자도 알고 있지만 법대로 하는 것조차도 요구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만 봐도 정답과 현실의 괴리를 알 수 있다.

내 생각은 이렇다. 권리는 법이 지켜주는 게 아니라 권리의 주체가 스스로 지켜야 한다. 법에서 아무리 보장하더라도 권리의 주체가 그걸 지킬 마음이 없으면, 그 권리는 죽은 권리가 되어 버린다. 지킬 마음이 있더라도 그게 쉽사리 지켜지지 않을 때도 많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거다. 우리가 우리 권리를 지키려고 애쓰고 싸워야만 권리 가운데 몇 가지 것들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포기한다면 우리는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하고 사장님이 던져 준 떡고물(언제 거둬갈지 모르는)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출판노동자 가이드북>은 우리의 권리가 무엇인지 찾아가는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일단 알아야지 뭐라도 주장하고 찍소리라도 할 수 있지 않겠나. 이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내용은 근로기준법에 기초한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지만, 그것은 우리 출판계가 아주 기본적인 것들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많은 출판 노동자들이 <출판노동자 가이드북>을 보고, 우리 권리를 새삼 알게 되고, 힘을 모아서 행복한 노동으로 좋은 책을 만들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때가 되면 이 책도 낡은 책이 되겠지. 이 책이 아직 담지 못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담을 수 있는 날이 오면 개정판 작업에 기쁘게 참여하고 싶다는 작은 꿈을 꿔본다.
덧붙이는 글 이용석님은 <출판노동자 가이드북> 기획,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출판노동자 가이드북>은 서울 합정동에 있는 후마니타스 책다방에서 무료로 배포하고 있습니다. 또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 출판분회 인터넷 카페(cafe.naver.com/booknodong)에 신청하시면 배송해 드리기도 하고 PDF 파일을 직접 다운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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