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만 잘해도 100만 명 끌어모을 수 있다
[토론이 배틀이 된 시대] 토론의 오락화, 상품화... 상업적 역량으로 인정
▲ 지난 11일 열린 사망유희 토론. 진중권과 변희재는 'NLL(북방한계선)의 진실'이라는 주제로 한시간 반 동안 토론을 진행했다. ⓒ 곰TV
둘은 생각보다 빨리 만났다. 스스로 사망유희 토론의 '끝판왕'이라 자처했던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는 돌연 태도를 바꿔 진중권 동양대 교수의 첫 상대로 나섰다. 자칭이든 아니든 최고 레벨의 '끝판왕'이 1탄에 나오는 게임은 이제까지 없었다.
지면 망신이다. 한쪽은 고소 취하가 달렸고, 다른 한쪽은 논객으로서의 생명이 걸렸다. 사회를 맡은 이상호 MBC 기자는 토론을 앞둔 둘을 두고 "콜로세움에 선 검투사 같다"고 말했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누가 지든 논객 생명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탐색전은 조심스러웠다. 둘은 모두 'NLL(서해 북방한계선)은 헌법상 영토선이 아니다'는 전제에서 토론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충돌 지점은 NLL이 갖는 국제법적 지위였다. 진중권은 "해상분계선을 추후 협상하기로 했다"는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 부속서 조항을 예로 들며 NLL이 국제법적 효력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변희재는 진중권의 주장에 대해 "외교 관례상 '추후 논의'는 실질적인 효력이 없다"며 맞받아쳤다.
1959년 조선중앙연감, 1999년 유엔 사령부의 공식입장, 2007년 11월 27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국방장관회담 회의록. 각자가 준비해 온 사실과 사실이 날카롭게 부딪치는 광경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들의 혈투를 지켜보기 위한 네티즌들로 인해 곰TV 서버는 토론시간 내내 폭주했다. 1, 2, 3부로 나뉜 다시보기 영상은 누적 조회수 110만 건을 기록했다. 이 둘은 지식인이 지녀야 할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일부의 따가운 눈총 속에서도 자신들의 토론을 흥행으로 이끌었다.
토론 실력이 상품성을 얻는 시대
▲ 대학생 토론 배틀3의 한 장면. 예선을 거쳐 본선 토너먼트를 거치는 방식으로 최종 우승자를 뽑았다. 베스트 스피치 3인에게는 CJ그룹 입사 특전이 부여됐다. ⓒ TVn
대중들은 언제부터인가 토론에 승패를 가르기 시작했다. 싫어하는 논객이 논리적으로 무너지는 모습만을 따로 편집해 UCC로 제작하는 네티즌도 있다. 토론 트렌드는 이제 결론이 날 때까지 토론하는 '끝장 토론'을 넘어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토론 배틀'로 이동했다.
재밌게도 '토론 배틀'이라는 개념에 가장 빠르게 적응한 건 대중보다 논객들이다. 토론의 주체들이 먼저 승리와 패배를 인정한다. 논객 '간결'은 진중권과의 토론 뒤 자신의 트위터에 "핑계를 대기엔 너무 심각하게 무너졌다"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진중권 역시 변희재와의 사망유희 토론 직후 "팩트에서 밀렸다"며 변희재의 승리를 사실상 인정했다.
승부가 갈리는 토론은 이제 지적 스포츠로 자리잡을 조짐을 보인다. 지난 9월 종영한 tvN <대학생 토론 배틀 시즌 3>는 월드컵처럼 예선을 거쳐 본선 토너먼트를 통해 최종 승자를 뽑았다. 전편과는 달리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승패를 가를 기준들을 항목별로 점수화했다. 진중권은 그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이었다. 스피치의 정확성, 참신한 통찰력, 쇼맨십과 매너, 그리고 상대방의 주장을 제압하는 논리적 수 싸움 하나하나가 모두 점수화됐다.
지금의 흐름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토론의 오락화, 둘째는 토론이라는 행위에 부여되기 시작한 상품성이다. 단지 토론을 잘 한다는 이유만으로 100만 명을 끌어모을 수 있는 세상이 왔다. 즉석에서 쏟아내는 말이 아닌, 논리로 정립된 주장을 상대방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기술은 이제 중요한 상업적 역량으로 인정받는다.
기업 역시 이 능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왜일까? 상대를 논리적으로 설득할 줄 아는 능력은 프레젠테이션 역량과 직결된다. 실제로 지난 6월 열린 tvN <대학생 토론 배틀 시즌3> 예선과정에는 전편과 달리 면접관 앞에서 진행하는 프레젠테이션 시간 1분이 각 팀에게 배당됐다. 경쟁에서 승리한 팀에게는 논제를 우선 선택하는 혜택이 부여됐다. 우승팀 확정 후 최고 수준의 토론을 보여준 베스트 스피치 3인에게는 상금 100만 원과 CJ 그룹 입사 특전이 부여됐다.
논리와 설득 그리고 감정적 호소와 쇼맨십. 이 지점에서 토론과 프레젠테이션은 서로 만난다. 토론과 프레젠테이션은 모두 논리적인 개념들을 전략적으로 재구성해 상대방을 설득한다. 그런 점에서 변희재와 진중권의 토론은 한 무대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동시에 진행하는 경쟁 프레젠테이션의 다른 모습이다.
토론의 지적 스포츠화, 소통 부재 사회의 균열
▲ 2004년 한국교육개발원(KEDI)에서 발간한 ‘한국 교육인적자원 지표’에 따르면 전문적인 분야에서 고도의 문서독해 능력을 지난 사람은 고작 2.4%에 불과했다 ⓒ 한국교육개발원(KEDI)
이 흐름은 물론 탈산업화·분권화·지식 경제화라는 거대한 시대적 추세에 따른 것이다. 권력이 분산된 사회에서의 통치방식은 명령이 아닌 설득이 우선한다. 정치인은 국민들을, CEO는 주주들과 소비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리더의 권위적 통치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참신한 개념을 만들고 여기에 논리를 붙여 설득할 줄 아는 능력이다.
미국은 이미 1980년대부터 기업을 설득하는 능력을 하나의 지적 자산으로 받아들였다. 제리 와이즈먼(Jerry Weissman)은 1988년에 프레젠테이션 컨설팅 업체 '파워 프레젠테이션'을 설립했다. 그는 약 500개의 기업을 상대로 프레젠테이션 노하우를 제공하며 업계에서 독보적인 프레젠테이션 마스터로 자리 잡았다. 흥미롭게도 마이크로소프트의 파워포인트가 출시된 시기 역시 1988년이다. 당시 한국은 중화학공업과 건설인력 수출로 돈을 버는 나라였다.
기존 산업화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은 설득보다 거래에 비중을 뒀다. 개념보다는 실물자산이 우선이었다. 반도체를 원하는 바이어에게 자사의 비전을 설파할 필요는 없다. 가장 성능 좋은 제품을 보여주면 거래는 성사된다. 양쪽에 이견이 있다면 토론 대신 술자리로 가는 게 더 경제적이다.
노·사간에 갈등이 생기면 협상보다는 소송을 걸거나 경찰을 부르는 게 훨씬 간편하다. 이러한 구조는 고질적 부패와 소통 부재를 낳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양산됐다. 한국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다. 토론의 지적 스포츠화는 소통 부족에 시달렸던 한국 사회의 의식구조에 조금씩 균열을 내는 역할을 할 것이다.
기초를 뒤흔드는 혁신의 한계... 대학의 몰락
물론 이러한 현상이 토론문화의 저변 확산으로 바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교육현장에서 이뤄지는 토론의 질과 참여도를 감안하면 여전히 한국 사회는 토론의 불모지다.
초중고교에서의 토론은 정해진 답을 작성하기 위한 형식적 수단에 불과하다. 대학생들은 토론과 프레젠테이션, 레포트 작성이 포함된 교양과목에 수강 신청하길 꺼린다. 기업에서의 토론은 대개의 경우 사내정치와 조직문화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된다. 애초에 토론 즐길 수도, 실력을 쌓을 수도 없는 구조다.
토론 문화의 확산을 가로막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효율적 언어 교육의 실종이다. 거의 모든 국민이 12년 동안 국어를 배우지만 실질적인 문서 해독 능력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2004년 한국교육개발원(KEDI)에서 발간한 '한국 교육인적자원 지표'에 따르면 전문적인 분야에서 고도의 문서독해 능력을 지난 사람은 고작 2.4%에 불과했다.
노르웨이(29.4%), 덴마크(25.4%), 캐나다(25.1%)와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실제로 많은 대학들이 신입생들에게 말하기와 글쓰기를 다시 가르친다. 주술 관계에 맞지 않는 문장으로 레포트나 에세이를 내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고도의 언어수행 능력을 단기간에 배양하기 위해선 현재로선 대학 인문계열에 대한 투자가 유일한 답이다. 하지만 대학은 더 이상 인문학에 투자하기를 꺼린다. 대학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대학가의 철학과와 어문계열 학과들이 그렇게 사라졌다. 대학사회는 수년간 기업이 요구했던 대로 실무형 인재를 만드는 방향으로 학과개편을 추진했다. 그리고 기업들은 이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토론과 프레젠테이션에 능숙한 인재를 원한다.
2011년, 스티브 잡스 신드롬을 분석한 재계는 뒤늦게 인문학 열풍을 조성하며 인문학이 가진 상품적 가치에 대해 조명하기 시작했다. 인문계적 상상력에 이공계의 기술을 더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복합융합기술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주요 대학들은 이미 기초 인문학과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뒤였다.
새로운 흐름이 세상을 뒤흔들 즈음, 기업은 대학에게 또 어떤 인재를 요구할까. 대학사회는 어떤 과를 없애면서 그 흐름에 따라갈까.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그 광경을 구조조정과 혁신이라는 단어로 접하게 될 것이다. 흐름을 창조하지 않고 따라가는, 기초 학문을 등한시한 사회의 혁신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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